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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34)

입력 Oct 08, 2010 02:51 PM KST

본지는 한신대 이장식 명예교수의 교회 역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이 교수는 얼마 전 본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예수는 평신도였고, 초대교회 예수 운동을 이끈 무리들 역시 평신도들이었다"며 교회사에 큰 기여를 한 무명의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을 조명했습니다. 앞으로 연재되는 글이 평신도들의 신앙 생활 함에 있어 좋은 길잡이가 되어 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편집자주 
 

제3장 당조의 경교

시리아의 에뎃사에서부터 그리스도교의 동양 선교가 시작된 이래로 시리아는 동양의 그리스도교 선교의 본거지가 되었으며, 페르샤의 사산왕조 때 박해를 받았고 또 그 후 이슬람교 아래에서 박해를 받았지만 동양 전역에 그리스도교는 계속 전파되었다.

인도 선교 이야기는 일찍부터 있었지만 중국 선교에 관한 이야기는 1623년 산시성 시안(西安)에서 우연히 땅 속에서 한 비석이 발견된 때까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비석의 비문에는 당조 정관(貞觀) 9년에 시리아에서 아라본 대덕(阿羅本 大德)이 장안(長安)에 들어와서 그리스도교를 전파하였다고 새겨져 있는데 서기로는 638년이다. 즉 근 1천년 동안 중국 선교 역사가 땅 속에 묻혀 있었다는 말이다. 이 비석이 유명한 ‘대진경교유행중국비’(大秦景敎流行中國碑)인데 높이 10척, 폭 5척, 두께 1척이며, 경교의 역사에 관한 기록은 1,870여 문자로 새겨졌고 측면에는 시리아 문자로 경교 선교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경교 비문에 따라 당나라 때 경교가 전파된 역사의 발전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당조의 태종(太宗, 李世民)이 경교의 고승 아라본에게 경교(파사교)의 선교를 서기 635년, 정관(貞觀) 12년 7월에 허락하고 그리스도교 경전을 한문으로 번역할 것을 명령하고 말하기를, ‘도무상명 성무상체(道無常名 聖無常態, 도가 한 가지 이름만이거나 거룩이 한 가지 모양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은 3년 후 국비를 가지고 파사사(波斯寺, 경교 교회)를 세우고 파사승 21명을 그곳에 배치하였다.

제3대 황제 고종(高宗)은 부친의 정책을 수용하여 13도 358주에 파사사 하나씩을 건립케 하였고 파사교(경교)의 고승에게 ‘진국대법주’(鎭國大法主)라는 칭호를 붙여주었다. (이것은 경교를 당조의 국교로 간주한 조처가 된다.

고종이 죽고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왕권을 잡고 나라 이름을 주(周)라고 부르고, 불교를 숭상하고 경교를 박해하여 경교사원들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측천무후가 705년에 죽고 현종(玄宗)이 집권하여 경교를 박해하고 중국의 재래종교의 부흥을 도모하였다.

이때 마침 페르샤의 이슬람교가 세운 사라센 왕국의 사절단이 당조에 파견되었는데 그 사절단원 중 한 사람의 이름이 대덕 급열(大德 及烈)이라고 되어있는데, 大德은 중국어로는 法主이고 그리스도교에서는 대주교 또는 대감독이라고 번역하여 불리는 고위사제이다. 及烈이라는 이름은 중국어 발음으로는 키릴(Ki·lie)인데 아마도 가브리엘을 음독한 것 같다. 아무튼 이 이름은 그리스도교인의 이름인데 그가 당조에 와서 박해 아래 있던 경교가 박해에서 벗어나게 하였다. 이때 당조와 페르샤(파사)의 신흥 이슬람 왕국과 국교를 맺으려는 외교사절 단원으로 온 及烈은 동양교회의 고위 성직자 감독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경교 비문에는 及烈의 이름 앞에 다른 한 인명인 승수 라함(僧首 羅含)이 나온다. 僧首는 사제의 우두머리라는 뜻이고 羅含은 아브라함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승수 아브라함과 대덕 가브리엘 두 사람이 페르샤의 국가 외교사절이 아니고 동양교회의 외교사절로서 당조에 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현종은 경교를 자유롭게 하였고 가브리엘은 궁전에 자유롭게 출입하고 중국어를 배워서 조정에 온 외교사절단의 통역자로도 일하였고, 태종의 초상을 비롯하여 당조 5대 황제들의 초상화를 경교 사원 벽에 걸게 하였는데 이것은 황실이 경교를 보호한다는 표시였다. 현종은 형제 5명을 경교 사원에 보내서 파괴된 사원을 재건하게 하였고, 장안에 와있던 경교를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교와 마니교와 구별짓기 위하여 천보 4년(서기 745년)에 칙령을 내려서 파사사를 대진사(大秦寺)로, 파사승을 대진승(大秦僧)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다. 또 파사경교(経敎)를 고쳐서 경교(景敎)라고 부르게 하였다.

당시 당나라의 문화 발달은 절정에 이르렀다. 현종의 신뢰를 받던 안록산(安祿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곽자의(郭子儀) 장군의 부관으로 경교도 이사(伊斯-이삭)가 임명되었다. 이사는 이때 반란군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현종의 아들 숙종이 이사의 공을 크게 치하하고 경교를 후대하여 넷 고을에 경교 사원을 짓게 하였다.

숙종은 환관에게 시해되고 그의 아들 대종(代宗)이 집권하였을 때도 티베트군이 장안을 침략해 왔을 때 이사가 다시 한 번 공을 세웠다. 그리하여 대종이 경교도를 추대하여 자기의 생일 때마다 경교도를 불러서 연회를 열었다.

경교 비문에는 이사가 당조의 벼슬 제일품(第一品)의 고관이며, 부절도사(副節度使)가 되어 있고 황제가 그에게 승복을 주어서, 그를 이사승이라고 불렀다. 이사가 본래 동양교회의 사제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경교 비문에는 이사가 가난하고 헐벗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선한 일을 많이 하였고 가난한 사람들의 장례식도 치러주었다고 한다. 경교가 당조 때 사회사업을 많이 한 것을 언급하면서 마태복음을 인용하여 배고픈 자와 병든 자에게 자선을 베풀고 사회봉사에 힘쓴 것을 기록하였고, 오순(五旬)이라는 말을 한 것은 오순절을 뜻하는 것인데 경교도들이 이 절기에 금욕생활을 실천한 것을 일러주는 것이다.

경교 비석을 세우려는 의사는 이사의 상관 곽자의로부터 나왔다고 한다. 곽자의는 본래 서방에서 온 그리스도교인이라고 한다. 그는 경교도가 숙종, 대종, 덕종 3대의 황제의 충신들이 되어서 나라를 지켜주고 백성을 위해서도 선한 일을 많이 한 것을 기념할 생각을 가졌던 것이다. 비문 말미에는 이 비석을 세울 때의 바그다드에 주재한 동양교회의 총대주교의 이름 하난-예수(Hanan-Isho)가 있고 이어서 이 비석을 세우는 일을 한 경교 사제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시리아 글자로 Yazedbouzid의 아들 집사, 또 이어서 시리아 글자로 Mar Sergius 신부 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비석 좌측에는 시리아 인명이 새겨져 있는데 53명이고 우측에는 55명인데 모두 경교 성직자들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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