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창세기 11:1-9, 에베소서 4:1-4, 사도행전 2:1-4
설교문
요즘은 스마트폰을 잘 활용하면 외국인과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한 시대입니다. 인공지능(AI) 기능을 탑재하면 동시통역도 가능한 시대입니다. 그런데 문자적인 통역이 되었다고 의사소통이 완벽하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생각과 감정이 소통되는 것은 아닙니다. 같은 한국어를 사용해도 '말이 안 통하는'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외국어를 배우는 데 어려움을 겪은 사람은 성서의 바벨탑 사건으로 인해 이 세상에 수많은 언어가 생겨났다고 불평하기도 합니다. 실제 바벨탑 사건을 보도하는 구약성서 창세기 11장을 열면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1절)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온 땅'은 꼭 세계 전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앞장인 창세기 10장을 보면 이미 다양한 민족이 온 땅에 흩어져 각기 자기들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고 했는데(5, 20, 31절), 이를 보면 창세기 11장의 '온 땅'은 세계 전체를 의미하기보다 어떤 특정 지역의 전체를 가리키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문학적으로는 제유법[提喩法]에 해당합니다.)
그곳은 11장 2절이 보도하는 대로 '시날(Shinar) 평지'입니다. 시날은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지역입니다. 오늘날 시날이 어디인지 그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기는 어렵습니다. 훗날 시날은 바벨론을 가리키는 명칭으로 사용됐습니다.(스가랴 5:11, 다니엘 1:2) 성서가 관심하는 것은 그곳의 정확한 위치가 아니라 동방 어디에선가 사람들이 몰려와 시날 평원 어느 곳에 정착하여 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라는 말은 시날 평지에 정착한 그 사람들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언어는 '같은 나라의 말'이라기보다 '같은 내용의 말'입니다. 히브리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들은 '하나의 입술'(사파)로 같은 '말들'(데바림)을 했습니다. 강조점은 동일한 언어가 아니라 동일한 말들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말을 하지만, 바벨탑 사건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서로 같은 생각과 말을 반복해서 주고받으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서로 말합니다.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3절) 고대사회에서 벽돌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햇볕에 말린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에 구운 것입니다. 당연히 불에 구운 벽돌이 햇볕에 말린 벽돌보다 훨씬 더 단단했습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건축을 위한 돌을 구하기 힘든 지역이었습니다. 그런데 불에 구워서 단단한 벽돌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단지 거주용 집만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건축물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기술적 토대가 마련되었다는 걸 의미했습니다. 여기에 그들은 "역청(瀝靑, 아스팔트)으로 진흙을 대신"(3절)했습니다. 지금도 중동 지역에 원유가 발견되는 것처럼, 쉽게 구할 수 있는 역청으로 벽돌 사이를 메우니 방수도 되고 더욱 튼튼한 건축물을 만들 수 있게 되었습니다. 원하는 규모의 건축물을 무한히 건설할 수 있는 기술적 토대가 마련된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인공지능(AI)의 도래와 견줄 만한 문명의 획기적 발전이었습니다.
자신감이 하늘을 찌르자, 그들은 서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4절) 지금도 인간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라는 명성을 갈아치우기 위해 더 높은 건물을 지으려 합니다. 현재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은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 할리파로 163층, 828미터에 달합니다. 우리나라 롯데월드타워는 123층, 554.5미터입니다. 이러한 초고층 건물을 마천루(摩天樓)라고 합니다. '하늘[天]을 문지르는[摩] 다락(樓)'이라는 뜻입니다. 영어로는 '스카이스크래퍼'(skyscraper)합니다. 매우 높아서 하늘(sky)을 긁어내는(scrape) 건물이라는 뜻입니다. 한자 마천루와 영어 스카이스크래퍼의 뜻이 같습니다.
그들이 이런 초고층 건물을 지으려는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였습니다. "이름을 내고"의 뜻은 '명성과 영광을 얻자'이고, "흩어짐을 면하자"의 뜻은 '이대로 유지하자'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 원리와 목적을 거스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맨 처음에 사람을 지으시고, 또 노아의 홍수 이후에도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세기 1:28, 9:1, 7) 하셨습니다. 이 말은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라]"(공동번역) 혹은 "많은 자녀를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현대인의성경)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한 입술로 같은 말들'만 주고받던 시날 평야의 사람들은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일사불란(一絲不亂)하게 하늘을 '문지르고' 하늘을 '긁어내는' 높은 탑을 쌓고 흩어지지 않으려 했습니다.
그들의 이런 행동을 하나님은 유심히 지켜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건설하는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습니다.(5절) 내려오신 것은 하나님이 멀리 있는 것을 보지 못하셔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이 아무리 높고 거대한 건축물을 지어도 높이 계신 하나님에게는 친히 내려와 확인해야 할 만큼 작고 미약하다는 뜻입니다. 헛된 일을 꾸미는 세상의 군왕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시편 2:4)라고 어떤 시편 기자는 노래하였습니다. 그런데 땅으로 내려와 그 성읍과 탑을 보신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안에 하나님께서 그들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가 드러납니다. "보라, 한 백성이요, 그들 모두에게 언어가 하나다."(6절, "Behold, they are one people, and they all have the same language" - NASB)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하나님은 '한 입술로 동일한 말들'을 주고받는 백성의 위험성을 아셨습니다. 일사불란하게 자기들이 설정한 목표를 향해 앞뒤를 보지 않고 달려가는 백성처럼 위험한 백성이 없습니다. 독일의 나치와 일본 군국주의 시대를 떠올려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이런 백성의 위험성을 아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 하는 일은 겨우 시작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앞으로 어떤 일을 벌일지 모릅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이 하는 일을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우려하셨습니다. 그들을 지금 막지 못하면 후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하나님께서는 노아의 홍수 이후 다시금 심판을 단행하셔야 하는 상황이 벌어질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결심하셨습니다. 그 지경에 이르기 전에 시날 평야 사람들의 행동을 막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쓰신 방법은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7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시는]"(8절) 것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바벨'이라는 이름이 생겨났습니다. 바벨은 바벨론 말로 '신에게 이르는 문'(밥-일라니)을 의미하지만, 히브리어로는 '혼잡하게 하다'라는 의미의 '발랄'에서 유래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과 영광을 위해 흩어지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말을 혼잡하게 하여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시고 그들을 온 땅 위에 흩으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심판이나 저주가 아닙니다.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신 언어의 혼란은 오히려 파멸로부터 인류를 지키려는 배려와 예방적 조치라 말할 수 있습니다.
놀랍게도, 구약성서의 바벨탑 사건은 신약성서의 오순절 다락방 사건으로 완성됩니다. 성서의 바벨탑 사건과 오순절 사건이 하나의 사건입니다. 오순절(Pentecost)이 되어 예수님의 제자들이 한곳에 모였습니다. '오순'(五巡)이라는 말은 '50일째'라는 말로, 예수님 부활하신 지 50일째가 되는 날에 예수님의 제자들이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습니다. 120명쯤 모였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은 가룟 유다를 대신해 뽑힌 맛디아를 포함해 12명의 사도가 다 거기에 있었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이 정확히 어디인지는 모르지만, 그 장소가 어디든, 120명이나 되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리며 한 자리에 모였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그들이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가 되었을 때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날 준비는 끝났습니다. 지금도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하나 되어 기도하면 기적은 일어납니다.
기적은 하늘로부터 갑자기 불어온 바람 소리로 시작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니라."(사도행전 2:2) 바람, 즉 '프노에'(pnoe)는 곧 성령, 즉 '프뉴마'(pneuma)였습니다. 바람 소리로 들린 성령은 불의 혀처럼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사도행전 2:4)라고 했습니다. 불은 태우고, 번지고, 깨끗하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기록한 누가는 그냥 불이라고 하지 않고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라고 했습니다. '불의 혀'는 굳었던 제자들의 혀를 움직이는 불길이었습니다. 닫혔던 입을 열어 말하게 하는 불길이었습니다. 그런 불의 혀가 임하자 "그들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했다]"(사도행전 2:4) 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첫 번째 핵심은 바로 이 '말하게 하심'입니다. 각기 '다른 언어들'로 말하게 하심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이후 두려움에 꽁꽁 숨어 있던 제자들이 담대히 입을 열어 하나님의 크신 일을 여러 다른 언어로 말하게 하신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두 번째 핵심은 이렇게 제자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사도행전 2:4)했을 때 세계 각국에서 온 수많은 사람이 그 말을 모두 알아들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2장 5절 이하를 보니, 오순절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큰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그리로 몰려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말하는 것이 그들에게 "저마다 자기네 지방 말로 들리므로 모두 어리둥절[했다]"(6절, 공동번역)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놀라고 또 한편 신기하게 여기며 지금 말하고 있는 저 사람들은 모두 갈릴리 [지방] 사람들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는 저 사람들이 하는 말을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듣고 있으니 어찌된 셈인가?"(7-8절, 공동번역)하고 놀랍니다.
이 사람들이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그들의 출신 지방명이 사도행전 2:9-11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는데(바대, 메대,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이집트, 구레네 근처 리비아의 여러 지역, 그리고 로마입), 그들은 유대인, 유대교로 개종한 사람, 크라테 사람, 아라비아 사람 등이었습니다. 글자그대로 "천하 각국으로부터" 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당연히 서로 '언어가' 통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서로 '말이' 통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각각 '다른 언어들'로 선포하는 이야기를 저마다 자기가 태어난 지방의 말로 들은 것입니다. 통(通)한 것입니다.
재미있는 통계를 하나 보았습니다. 미국 사람들의 평균 전화 통화 시간에 관한 통계인데, 만국 공통일 것 같습니다. 제목은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Statistics Don't Lie)입니다. "소년이 소년에게 : 59초 / 소년이 엄마에게 : 50초 / 소년이 아빠에게 : 30초 / 소년이 소녀에게 : 1시간 23분 59초 / 소녀가 소녀에게 : 5시간 29분 59초 / 남편이 아내에게 : 3초 / 엄마가 결혼한 딸에게 : 10시간 50분 59초 / 아내가 남편에게 : 14번 전화 놓침." 통신기기가 아무리 발달해도 소통(疏通, communication)이 이루어지는 건 아닙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합니다. 이 말을 처음 제안한 클라우스 슈밥(Klaus M. Schwab)은 4차 산업혁명을 "디지털 혁명에 기반해 물리적 공간... 생물학적 공간의 경계가 희석되는" 초연결 사회의 도래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스마트폰과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이 연결되어 인간이 일일이 간섭하고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척척 일을 하는 시대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사람도 연결될까요? 초연결될까요?
그런데 이런 4차 산업혁명의 시대의 언제부턴가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나와 견해가 비슷한 사람들과만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SNS가 발달하면서 이 현상은 더욱 심해졌습니다. 그러면서 '반향실 효과'(echo chamber effect)가 일어났습니다. 밀폐된 공간에서 말하면 내 소리만 들리는 현상을 반향실 효과라 말합니다. 생각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이야기를 하니 이런 현상이 일어납니다. 언제부턴가 이렇게 우리는 좋아하는 사람들과만, 나와 견해가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휴먼 네트워크는 서서히 닫히고 공감력은 극히 떨어졌습니다. 이윽고 '내 편 네 편'으로 나누는 메커니즘이 작동하면서 어떤 사람들에게 낙인을 찍고 꼬리를 붙이며 혐오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게 우리 안의 성찰(省察)과 반문(反問)의 능력은 사라졌습니다. 같은 한국어를 사용하지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닫힌사회'가 되었습니다.
사람은 서로 공감하고, 소통하고, 연결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기술의 문제가 아닙니다. 공감과 소통과 연결은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성령은 '교통하시는 분'입니다. 소통하시는 분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편지의 맨 마지막을 우리 귀에 익숙한 이 축복의 인사로 마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지어다."(고린도후서 13:13)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은혜'가, 하나님에게는 '사랑'이, 그리고 성령에게는 '교통하심'이 그분의 가장 중요한 속성으로 헌정되었습니다. '교통'으로 번역된 말 '소드'(sod)는 서로 막힘이 없는 관계를 뜻합니다. 성령은 서로 막힘이 없는 관계를 창조하시는 분입니다. 모든 장벽을 허물고 경계를 넘어 사랑으로 만물을 연결하시는 분입니다. 진정한 소통은 '사이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사이가 없는 것이 성령의 교통하심입니다. 나와 이웃 사이에 사이가 없는 것이 성령의 교통하심입니다. 하나님과 만물 사이에, 나와 피조물 사이에 아무 사이가 없는 것이 소통이고 교통이며 교감입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의 핵심은 소통입니다. 온 땅 위에 흩어져 '여러 입술'로 서로 '다른 말들'을 하던 사람들이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따라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고, 소통하여 하나 되게 하신 사건이 오순절 성령강림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구약성서의 바벨탑 사건의 완성입니다. '한 입술'로 '같은 말들'만 하던 사람들을 온 땅에 흩으신 하나님은 그들이 서로 이해하고, 공감하고, 소통하게 하십니다. 성령은 사람들의 흩어진 말들을 부정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서로 다른 말을 하는 것을 인정하시며 그 다른 말들을 서로 알아듣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이것이 "사랑 가운데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에베소서 4:2b-3)입니다. 하나님은 각 지방 말을 무시하고 없애서 한 가지 언어로 복음을 듣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은 우리의 다양성을 소멸하는 하나 됨이 아니라 우리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이루어지는 하나 됨입니다. 이것이 일치를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신비한 경륜입니다.
성령강림절입니다. 교우 여러분, 성령의 대화를 나누십시오. 스스로 불화하고 외면하고 자기 자신과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대화를 나누십시오. 서로 등 돌린 가정 안에서, 그리고 서로 배척하고 싸우는 일터 안에서, 또 남북으로도 모자라서 동서로 나뉜 이 나라 안에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사랑의 대화를 나누십시오. 성령의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담대히 말하십시오. 그리고 들으십시오. 마음으로 들으십시오. 열린 마음, 진심 어린 공감의 마음으로 들으십시오. 하나 되게 하시는 성령께서 그 서로 다른 말들을 자기 말처럼 듣고, 이해하고, 공감하게 하는 기적을 일으키실 것입니다.
어느 시인의 <귀를 기울이며>을 읽으며 오늘의 말씀을 마칩니다. "귀로 듣고 / 몸으로 듣고 / 마음으로 듣고 / 전인적인 들음만이 / 사랑입니다 // 모든 불행은 / 듣지 않음에서 시작됨을 / 모르지 않으면서 / 잘 듣지 않고 / 말만 많이 하는 / 비극의 주인공이 / 바로 나였네요 // 아침에 일어나면 / 나에게 외칩니다 // 들어라 / 들어라 / 들어라 // 하루의 문을 닫는 / 한밤중에 / 나에게 외칩니다 // 들었니? / 들었니? / 들었니?"
기도합시다. "오소서, 성령이여! 메마른 땅에 성령의 단비를 내리소서. 만민에게 거룩한 영을 부어 주시어 우리 자녀들이 장래 일을 말하고, 우리 늙은이들이 꿈을 꾸며, 우리 젊은이들이 이상을 보게 하소서.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도록 뜨거운 사랑의 영 날마다 부어 주소서. 우리가 닫힌 마음의 문 열고, 굳은 혀를 풀어서, 서로 사랑의 말을, 용서의 언어를, 그리고 평화의 대화를 나누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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