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젠슨의 ‘신의 뜻’ 발언에 대해 호주 일간지인 The Australian은 2005년 1월 4일 ‘부적절한 시기에 나온 신학적 논쟁’이라는 사설을 실어 그의 주장을 강력히 비판했습니다. 사설은 재앙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두고 죄악의 대가니 신의 뜻이니 운운하는 것은 희생자들의 생애를 모독하는 것이라고 반박했습니다. 그리고 희생자 중에는 크리스천과 어린아이들까지 포함되어 있음을 상기시키면서 과연 그들도 죄의 대가로 희생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지 반문했습니다. 아울러 쓰나미 재앙이 신의 뜻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자연현상에 의한 것인지 논쟁하는 것은 ‘시기가 적절치 못한 논쟁’이라며 재앙으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비통해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돕는 일이 우선임을 강조했습니다. 사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지금 믿을 수 있는 것은 피해현장에 파견된 의사와 간호사, 기술자 및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의 솔선수범과 도덕적 지도력이다. 그들의 희생적인 봉사가 필립 젠슨 주교의 말보다 훨씬 더 신의 뜻에 가까울 것이다.”
2010년 1월 아이티에서 강도 7.0의 지진이 나서 30만명이 목숨을 잃는 참사가 일어난 직후 미국의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세계에서 지진에 가장 취약한 도시 20곳을 선정해 발표했습니다. 미국의 비영리 리서치 기관인 Geohazards International이 건물의 안전수준과, 구조 인프라, 인구밀도 등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결과에 따라 지진의 위험에 가장 취약한 세계의 주요 도시 20곳을 선정했습니다. 1위 네팔의 카트만두로부터 20위 일본의 고베에 이르기까지 모두 20곳이 지진취약도시로 선정되었는데 대부분 환태평양지진대에 위치한 도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포브스의 기사를 국내 한 기독교매체가 인용보도하면서 제목을 이렇게 뽑았습니다. ‘대지진에 취약한 세계 우상숭배 도시 20곳’. 그리고 이렇게 보도했습니다. “이번 통계 자료에 등장하는 나라들은 거의 이슬람 국가와 가톨릭 국가 그리고 불교나 힌두교 국가인데 대부분 우상숭배는 물론이고 육신적인 간음죄로 넘쳐나는 나라들이라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침묵하신다고 말하지만 오래 참으시다가도 그들의 죄악이 극에 달할 때면 한 번씩 땅을 뒤흔들어 징계하시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지진대가 그렇게 분포되어 있었기에 필연적으로 지진이 날 수밖에 없었다고 생각하고 만다. 그렇다면 왜 그들이 그곳에 살았어야만 했으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그 가증한 죄들을 범했단 말인가?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인가? 결코 우연히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아심에 따라 그 지진대는 그분의 방법대로 그들에게 사용하실 도구들이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은 그들의 사악함에 따라 하나님을 대적하여 죄를 지은 것이다.”
지진이나 쓰나미 같은 자연재앙으로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는 참혹한 비극 앞에서 그것을 신의 뜻이라고 거침없이 말하는 이들은 대체 누구일까요? 그들이 믿는 신은 대체 어떤 신일까요? 재앙을 신의 뜻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의 믿음은 참으로 ‘끔찍한 믿음(horrible belief)’입니다. 이번에 일본 동북부 지방을 초토화시킨 지진과 쓰나미를 놓고도 어김없이 같은 주장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조용기 목사는 이번 재앙을 두고 “일본 국민이 신앙적으로 너무나 하나님을 멀리하고 우상숭배, 무신론, 물질주의로 나간 것에 대한 하나님의 경고가 아닌가 생각이 든다”고 발언해 또다시 불필요한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과연 자연재앙으로 목숨을 잃은 희생자들을 그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요?
누가복음 13장에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충격적인 보고를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갈릴리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다가 학살을 당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총독 빌라도가 죽은 자들의 피를 제사 드리는 동물의 피에 섞어 제단에 바쳤다는 충격적인 보고였습니다. 사건의 내막은 이렇습니다. 예루살렘성전에 수로를 건설하는 공사비용을 성전의 기금으로 충당하려는 빌라도의 계획에 유대인들이 반대하자 빌라도는 무장군인들을 보내 성전에서 제사 드리고 있던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보란 듯이 그 피를 희생제물의 피와 섞어 제단에 바쳤습니다. 노골적으로 성전제사를 모독한 셈이지요. 예수께서는 이 충격적인 보고를 들으신 후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눅13:2) 학살당한 희생자들이 죄가 더 있어서 희생당한 것이라고 생각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질문에 이렇게 스스로 답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그리고 예수께서는 곧바로 당시의 비극적인 사건 하나를 예로 들었습니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열여덟 명이 사고로 죽은 사건입니다. 예수께서는 다시 물었습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눅13:4) 그리고 다시 똑같은 답을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성전에서 일어난 학살사건과 실로암망대 붕괴사건으로 인한 희생자들의 죽음을 죄의 대가로, 하나님의 심판으로 정죄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성전에서 죽임을 당한 갈릴리사람들이나 실로암망대 붕괴사건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우상숭배 죗값으로 죽어 마땅한 이교도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제사 드리던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죄의 대가로 죽은 게 아니라 자신에게 반대하는 자를 폭력으로 대했던 불의한 권력의 희생자였습니다. 재앙의 희생자들에게 죄의 대가, 신의 뜻 운운하는 자들이 저지르는 잘못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들은 희생자를 희생자로 보지 않고 죄인으로 낙인찍어 희생자를 두 번 죽이는 잘못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것도 믿음이라면 참으로 ‘끔찍한 믿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예측하지 못한 사고와 재앙으로 죽어갑니다.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릅니다. 무고하게 희생을 당할 수도 있고 사고로 뜻하지 않게 죽음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누구든 그렇게 죽을 수 있습니다. 죽은 자들은 죄를 더 지어서 재앙을 만나 죽은 것도 아니고 산 자들은 죄가 가벼워서 재앙을 피해 살아남은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나 하루아침에 짐승처럼 죽을 수가 있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재앙으로 희생당한 자들을 애도하고 그 가운데서도 살아남은 자들을 위로하며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저들을 돕는 일입니다. 그리고 거대한 자연의 위력 앞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연약함을 다시 한 번 절실하게 깨닫고 하나님과 자연 앞에 다시금 겸허해져야 합니다.
글: 김성 목사(예수원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