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출 3:7-14, 갈 5:1, 13-15, 요 8:31-38)
설교문
[삼일 독립운동과 그 정신]
오늘 우리는 사순절 둘째주일이자, 3.1절 기념주일로 예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다 아시겠지만 3.1절은 일제의 식민 통치 아래 신음하던 한민족이 자주독립을 선언한 날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는 3.1운동의 독립선언을 실현하기 위해 1919년 4월 13일 중국 상해에서 수립된 '임시 정부'에서 공표한 것입니다. 1948년 제정된 '제헌헌법' 전문 역시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함에 있어서"라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또한 1948년이 건국이 아닌 '재건'임을 누차 강조하였고, 당해 '연호'를 '대한민국 30년'으로 기록했습니다.
올해로 107돌을 맞는 3.1 독립운동 현장에서는 "조선 독립 만세", "왜놈과 왜놈 군대는 물러가라", "조선 독립 정부를 세우자", "조선은 조선 사람의 것", "자유와 평등 만세" 등의 외침이 가득했습니다. 모든 조선 민중들이 구호를 외치고 태극기를 흔들며 길거리로 뛰어나왔습니다. 독립선언식과 만세 시위는 전국으로 들불처럼 퍼졌고 자유와 평화, 생존과 번영, 정의와 사람의 도리를 역설하는 독립 선언의 메아리는 5월 말까지 3개월 이상 줄기차게 퍼져 나갔습니다.
3․1 독립운동은 경술 국치 이후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적 식민 무단 통치에 맞선 다양한 반일 민족해방 운동이 한 물결이 되어 터져 나온 성난 파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일제가 이 나라를 침탈하자 독립을 위해서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국내외 무장 투쟁조직을 지원한 비밀결사 운동이 생겼고, 독립하려면 스스로 힘을 키워야 한다는 교육문화 운동과 식민지 경제 수탈에 맞서 농민․노동자들의 생존권을 수호하려는 투쟁들이 이 땅에서 생겨났습니다. 또 국제적으로는 제국주의에 맞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와 레닌의 약소민족 자결권선언이 이어졌습니다. 이런 변혁의 분위기에 맞춰 식민지 사회에서 겪어야 하는 모든 모순을 없애 버리고자 온 인민이 들고일어난 것입니다.
구한말 계속된 의병 투쟁과 그리스도교 민족주의자들의 주체적인 자주독립 정신이 3․1운동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고, 일본 자본가와 매판 자본가의 착취와 압박 속에서도 근근이 견뎌 온 일부 민족 자본가들은 물질적 후원을 하였으며, 근대적 교육기관과 교회를 통해 배출된 교사 ․ 학생 중심의 일반 지식층과 식민지 예속 경제의 가장 큰 피해자였던 상인 ․ 노동자 ․ 농민들의 지지는 확실한 대중적 기반이 되었습니다. 3·1 독립운동이 우리에게 남긴 유산은 명확합니다. 진정한 '자유'와 '독립' 없이는 참다운 삶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독립이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세파에 흔들리지 않으며 '홀로 자유롭게 굳건히 서는 것'입니다. 스스로 서지 못하는 노예의 삶은 살아있으나 죽은 것과 다름없기에, 우리 선조들은 인간답게 살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던 것입니다.
[자유로운가?]
향린교회는 '자유'를 소중히 여기는 공동체입니다. 60주년 기념 책자의 이름이 '자유인의 교회'였고, 우리는 매 주일 "자유인으로 사십시오!"라는 파송사를 가슴에 품고 세상으로 나갑니다. 하지만 묻게 됩니다. "지금 우리는 진정 자유로운가?" 물리적 억압은 사라졌을지 모르나, 현대인은 여전히 무언가에 쫓기듯 불안해하며 타인의 시선이라는 감옥에 갇혀 '자유의 멀미'를 앓고 있습니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책 《자유로부터의 도피》(Escape from Freedom, 1941.)에서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현대인은 자유를 두려워할 뿐만 아니라 그것으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그 자유라는 엄청난 부담을 덜어내기 위해 스스로 권위에 복종한다." 한편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모든 것이 고정되지 않고 흐르며, 무한한 선택지가 주어지는 '액체 현대(Liquid Modernity)'라고 명명하면서 흥미로운 통찰을 던집니다. 현대인은 과거 그 어느 때보다 법적·제도적인 '객관적 자유'를 많이 누리고 있지만, 정작 내면에서는 끊임없는 불안과 자기 착취에 시달리는 '주관적 부자유'를 경험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왜 우리는 자유를 꿈꾸지만 오히려 불안에 시달리게 되는 것일까요? 바로 이 간극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우리에게 과연 성서는 무엇을 가르쳐주고 있을까요?
[자유의 시작]
역시 자유의 첫 단계는 억압으로부터의 탈출입니다. 출애굽기에서 하나님은 이집트라는 거대 제국의 부품으로 전락한 백성들의 고통을 '똑똑히 보시고, 들으시고,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내려오시고, 모세를 부르십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자유는 인간의 투쟁 이전에 하나님의 '내려 오심'에서 시작됩니다. 진정한 자유는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비롯해 모든 피조물은 의존적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스스로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을 때 모세가 자신의 무력함에 떨며 "내가 누구라고 감히 가겠습니까?"라며 되묻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밝히시는데, 사실은 밝힌 것이 아닙니다. 흔히들 이 본문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다."라고 알고 있지만, "나는 있을 곳에 있는 자이다."라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이름은 단순한 자기소개가 아닙니다. 너는 내 이름을 묻지 말고 가거라, 그러면 그 자리에 언제나 내가 있겠다는 선언이지요. 동시에 하나님은 어떤 제국의 권력도, 어떤 역사의 흐름도 당신을 규정하거나 소유할 수 없다는 선언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어떤 규정에도 얽매일 수 없는 분만이, 파라오의 채찍이 붙여 놓은 '노예'라는 이름표를 떼어내고 우리에게 참된 이름을 돌려주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자유의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고생하는 백성을 해방시키셔서 '객관적 자유'를 보장하였습니다. 그러나 광야로 나온 백성들은 곧바로 '주관적 부자유'에 빠집니다. 몸은 광야로 나왔으나 마음은 여전히 이집트의 고기 가마 곁을 기웃거립니다. 즉 자유란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인데, 이런 자유의 속성이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도 자유의 중요한 특징을 깨닫게 됩니다. 즉 자유란 목적지에 도달하는 순간이 아니라, 날마다 이집트로 돌아가고 싶은 유혹을 거스르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외부의 억압이 사라졌다고 해서 우리가 곧바로 자유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진정한 자유는 날마다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는 자유]
오늘 예수님은 요한복음서 본문에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을 다시 생각해 보면 자유롭게 하지 않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객관적 자유가 보장되어도 주관적 부자유에서 해방되려면, 우리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자유 의지 및 책임 등의 문제를 깊이 연구한 미국의 철학자 해리 프랭크퍼트(Harry Gorden Frankfurt, 프린스턴 대학 철학과 명예교수, 1929-2023)는 자유를 '욕구의 위계'로 설명합니다. 배고프면 먹고 싶고, 화나면 소리 지르고 싶은 본능이 '1차적 욕구'라면, "비록 화가 나지만, 소리 지르지 않는 사람이 되겠다는" 고차원적 의지가 '2차적 욕구'입니다. 1차 욕구와 2차 욕구에 대한 분석을 통해서 우리 또한 자유에 대해 더 깊이 들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몸을 가진 존재로서 육신의 종입니다. 우리가 고난 주간이나 또 특별한 때에 금식을 해 보지만 몇 끼만 굶어도 우리의 모든 감각은 예민해 집니다. 코는 맛있는 냄새를 맡기 시작하고, 저절로 입안에 침이 고이며 음식이 눈에 보일 때마다 먹고 싶은 충동이 일어납니다. 노자가 말했듯이 우리의 몸이 있기 때문에 모든 근심거리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몸이 없다면 무슨 걱정이 있을까요?(吾所以有大患者, 爲吾有身. 及吾無身, 吾有何患? 도덕경 13장 중에서)
또한 우리는 남들로부터, 이 사회로부터 인정받길 원합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듯이 세상 사람들이 얽히고설켜서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 종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부모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고,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들어가면 선생님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다가, 조금 더 자라면 친구들의 인정을 받기를 원하고, 성인이 되어서는 이 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길 원하는 것입니다. 공자가 남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해도 서운한 마음이 들지 않을 때야 진정한 군자(人不知而不慍, 不亦君子乎? 학이 1.)라고 했지만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인정욕에 굶주려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정 욕구는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다른 모양을 지닙니다. 신분제 시절에는 모두 왕이나 귀족이 되길 원합니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두 부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재능과 관심과 개성을 잃어버리고, 그 시대와 세상이 갈망하는 것에 자신을 맞추려고 합니다. 스스로 종이 되려는 것입니다.
이 땅에 살면서 그 시대의 정신과 분위기를 매번 거스를 수 없는 것이지만, 오늘날처럼 물질만능주의 시대를 사는 우리들은 때로 너무 과한 욕망과 소비에 물들게 됩니다. 돈만 있으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고, 소비할 때 행복하다고 느낍니다. 남을 지배할 힘을 추구하며, 경쟁에서 이기는 것에만 몰두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기면 교만해지고, 지면 침울해지고 자신감을 상실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시대에 지구 를 뒤덮은 전염병은 대체로 우울증이고, 스스로 자신을 경쟁에 내몰다가 탈진에 빠지는 소진증후군입니다.
1차적 욕구야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지만, 2차적 욕구를 어떻게 다루느냐가 이제 우리가 자유인으로 산다는 것과 매우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세속의 삶이 인간으로 하여금 잘못된 방법을 제시함으로써 참 자유를 누리지 못하게 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독특한 삶을 살지 못하도록 할 때, 인문학적 성찰과 위대한 종교의 지혜와 가르침들은 새로운 대안을 제시하곤 했습니다. 즉 예수님의 말씀처럼 억압하는 진리가 아닌 자유롭게 하는 진리를 말해 왔던 것입니다.
[자유로워야 진리이다]
그런데 덜 성숙한 종교는 세상 못지않게 사람을 종으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셨는데, 인류의 역사를 보면 진리의 이름으로 사람들의 삶을 억압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인 율법은 원래 신령스럽고 좋은 것이지만, 율법에 매인 사람의 삶은 늘 주눅이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더 깊게 하기 위해 시작한 성경 공부나 기도, 성경 읽기도 어느 날부턴가는 본래 가졌던 초심이 사라지면서 하나의 고역이 됩니다. 마음에서 하고 싶지 않은데 억지로 하려고 하면 그것은 짐이요, 족쇄입니다. 우리 속담에 "비 들자 마당 쓸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비를 들고 나가서 마당을 쓸어 보려고 하는데 마침 누군가 "마당 좀 쓸어라!" 하고 명령하면 기분이 나빠지면서 하기가 싫어지지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동안 많은 종교 지도자는 독실한 신앙의 이름으로 너무나 많은 것을 강요해 왔습니다. 원래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쌓이고 말씀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성령님과 동행하면서 주님과의 소통이 많으면 많을수록 훨씬 더 편하고 자유로워집니다. 웃음이 저절로 나오고 기쁨이 넘칩니다. 사람 됨됨이가 더욱 부드럽고 여유가 생기며 마음도 넓어집니다. 작고 큰일들이 터져도 크게 요동하지 않습니다. 산이 버티고 서 있듯이, 강물이 유유히 흐르듯이 신앙의 사람도 그러합니다.
그런데 덜 영근 교계지도자들이 설교를 통해 자꾸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 "그렇게 하면 벌 받는다." "순종하지 않으면 나중에 하나님이 크게 치신다." 하면서 교회에서도 강요와 협박이 난무하였습니다.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다는 인과응보적 사유에 갇혀서 어떤 조건도 걸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과하고, 때때로 목사의 욕망 때문에, 교리의 왜곡된 해석으로 많은 신자들은 괴롭고 두려움에 떨어야 했습니다. 매우 작은 차이에서 비롯되었지만 성서의 문자적 이해나 교리의 맹목적 순종, 목사와 하나님을 착각하고, 교회의 권위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신앙인의 삶을 불편하고 숨 막히게 만들었습니다.
기쁜 마음으로 자발성을 가지고 헌신하면 그 자체로 보람이요, 행복이요, 자유인데, 마음이 내키지도 않는데 누군가 강요하면 그것은 복음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 누가 말해도 진리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또 고민해 보아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진짜로 자유로운 삶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진짜 신앙은 자유로워야 합니다. 무언가에 얽매여 있다면 그것은 참된 신앙이 아닙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인 우리에게 창조하는 자유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을 닮아 이 지구의 다른 생명체와 달리 새로운 문명과 문화를 만들어 내었습니다. 새로운 상상력을 펼치고 다른 생명체에게 피해가 가지만 않는다면 그 무엇이라도 도전해보고 모험하는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를 가진 인간입니다.
[자유의 훈련과 완성]
자유(自由)라는 한자어는 '스스로 말미암는다.'는 뜻입니다. 즉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시작해 보는 것입니다. 남이 말한 것, 남에게서 들은 것, 세상이 말하는 것, 세상이 강요하는 것을 우선 자신이 차분히 따져 보자는 것입니다. 자기 삶에 들어맞는 것인지,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지 아니면 오히려 거부하는 것이 좋은지 바로 자기 자신으로부터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안에 자신의 형상을 두셨습니다. 그러니 바로 그 하나님의 형상으로부터, 창조적인 자유로부터 시작해도 됩니다. 그런데 오늘의 많은 사람들은 남이 하니까 자기도 해야 할 것 같아서 하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영어로 자유는 프리덤(freedom)입니다. 그런데 이것의 동사나 형용사형은 프리(free)입니다. "자유로운"이라는 형용사를 동사로 쓸 때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억압받지 않고 풀려나고 해방되는 자유 즉 free from을 말할 수 있고, 또 다른 한편으로 무엇을 위한 자유 즉 free to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하기 싫은 것, 얽매이기 싫은 것, 억지로 하는 것, 누군가가 시켜서 하는 것으로부터 빠져 나오는 자유도 있지만, 우리에게 주어진 이 자유를 무엇을 위해 쓸 것인가를 결정하는 자유도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바울 사도께서 우리에게 해 주는 말씀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을 부르셔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고,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free from)가 아니라 무엇에로의 자유(free to)에서 완성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 나에게 주어진 자유를 쓸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것이 없으면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는 길을 잃고 방황하게 되거나 방종이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울 사도는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매지 말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누구에게도 판단 받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업신여김을 당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총의 바다에서 자유를 누렸다면 우리는 주님께서 보여 주시는 새로운 곳을 향해 또 항해해야 하는 것입니다. 다시 종살이의 늪으로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다시 종살이의 늪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옳은 판단을 하는 눈을 지녀야 합니다. 돈이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의 권력이 자유를 줄 수 없습니다. 이름뿐인 진리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내 자신조차 나를 자유하게 하지 못합니다. 나 또한 이미 나쁜 습관에 물들었고, 나 또한 이미 나를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일상적 삶에 녹아 있는 유교(儒敎)에서는 자유인으로 살기 위해 엄청난 수행을 강조합니다. 자유란 깊이 생각하고(사변이성적인 지식, 思) 때에 맞게 몸으로 훈련해서(경험 축적적인 지식, 學而時習)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상황에 꼭 들어맞는 적실한 행동이 나오는 것(不思而得, 不勉而中)이라 말합니다. 공자는 그의 나이 70이 되어서야 그 경지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從心所慾不踰矩). 유교의 길은 사람 사이의 관계(禮)를 바르게 설정하기 위해 개인의 인문학적 수양(仁)을 강조하는 윤리의 길을 만들었습니다.
불교는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일어난다는 깨달음 즉 인연생기(因緣生起)를 통해 일체의 집착과 탐욕에서 해방되는 자유의 경지에 들어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너와 내가 다르지 않고, 이 사건이 저 사건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좋고 나쁘고", "옳고 그르고"는 같은 것의 양면일 뿐, 인간의 단견으로 구별 짓고 차별을 두는 것은 모두 깨닫지 못한 무지의 소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고타마 싯달타는 보리수 나무 아래서 이 모든 것을 깨닫고 깨달은 자, 즉 붓다가 되어 열반적정의 경지에 들게 됩니다. 불교는 마음에서 일어나는 일체의 현상을 직시함으로써 참 자유를 누리는 깊고 넓은 심리학의 길을 열어 놓았습니다.
유교가 수행을 통한 윤리의 길을, 불교가 깨달음을 통한 심리의 길을 열었다면, 바울 사도는 '관계의 길'을 제시합니다. 나의 수행이나 깨달음이 아니라, 나를 먼저 사랑하신 하나님의 은총 안에서 타인을 사랑할 때 주어지는 선물로서의 자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터하여 사랑으로 서로 섬기는 것을 통해 자유를 완성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본회퍼 목사님의 시 하나를 읽어 드릴까 합니다.
이 시를 통해 참된 자유가 어디에 있는지 하나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해서입니다. 분명한 것은 자유의 훈련은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스스로 택하고 또 그 선택에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것입니다.
자유에 이르는 길 위의 정류장들
훈련
그대가 자유를 찾아 떠나려거든
감각과 영혼을 훈련하여,
욕망과 몸의 지체들이 그대를
이리저리 끌고 다니지 못하게 하라.
그대의 정신과 몸을 정결하게 하고
정해진 목표를 찾아
자신을 던지고 순종하라
훈련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자유의 신비를 경험하지 못한다.
행위
순간의 쾌락이 아니라 정의를 행하라.
가능성 속에서 동요하지 말고,
현실적인 것을 담대하게 붙잡아라.
자유는 사상의 세계로 도피하는 곳에서가 아니라,
오직 행위 속에서만 존재한다.
불안 가운데 주저하지 말고 사건의 폭풍우 속으로 나아가라.
하나님의 계명과 그대의 신앙이 그대를 뒷받침해 주며,
자유가 그대의 혼을 환호하며 감싸 안아 주리라.
수난
놀라운 변화, 강하고 힘찬 손이 그대를 붙잡고 있다.
이제 그대는 무력하고 고독하게 그대 행동이 끝났음을 본다.
그러나 안심하고, 조용하게 믿으며,
강한 하나님의 손 안에 정의를 맡기라.
그러면 그대는 만족하게 되리라.
단 한순간이지만, 그대는 자유를 맛보는 축복을 받았다.
그 자유를 하나님께 맡기면,
하나님께서 영광중에 찬란하게 성취하시리라.
죽음
오라, 영원한 자유를 향한 길 위에 펼쳐진 최고의 축제로.
죽음아, 덧없는 우리의 육신, 현혹당한 영혼의
무거운 쇠사슬들과 방벽들을 부수어
이 세상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마침내 보게 해다오.
자유여, 우리는 훈련하며 행동하며 고난을 당하며
오랫동안 그대를 찾아다녔다.
이제 죽음에 이르러,
우리는 하나님의 얼굴에서 그대 자신을 본다.
잠시 침묵으로 기도하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죄의 사슬을 끊고, 세상의 유혹에 굴복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로
여러분의 삶을 멋지고 아름답게 가꾸어 나가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