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한아름교회 홍정수 목사로부터 한 통의 메일을 받았다. 작년 9월 故 변선환 박사의 추모기일 즈음에 본지가 요청한 추모글에 대한 답신이었다. 변 박사의 학문적 성취에 찬사를 아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막상 뚜겅을 열어보니 추모글이 아니었다. 종교재판를 전후하여 변 박사와 얽히고설킨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글이었다. 이 글에서 홍 박사는 많은 이들의 예상과 달리 현대판 종교재판 비극의 당사자 고 변선환 박사와 자신이 비단 한 배를 타고만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사실을 확연히 보여줬다.
홍 박사에게 변 박사는 한편으로는 ‘열정의 학자’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목회자와 신학자의 어울림의 공간, 토론의 장을 만들지 못한 채 목회자들을 충분히(?) 존경하지 못했던, 자신을 포함한 유치했던 신학자들 중 한 사람이었으며 ‘학자’나 ‘행정가’로서 그 모습을 달리하는 변덕스럽기까지 한 신학자였다.
답신을 받은 지 이미 반년이 지났지만 한 신학자의 학자적 양심이 묻어있는 이 글을 뒤늦게라도 밝히는 이유는 역사의 앞마당에서 벌어진 일들을 소상히 논하지 않고, 역사의 뒷마당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논하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는 판단에서다. 다음은 홍정수 박사가 보낸 글의 전문.- 편집자
변선환 선생님, 열정의 학자, 그러나 우리는 유치했었다
▲LA 한아름교회 홍정수 목사 ⓒ베리타스 DB |
“밖에서는 당신과 나를 한 배 탄 놈들이라 하는데, 몰라서 그래. 너는 박OO의 새끼야!” 이 한 마디 속에 감신대 근세사 비극의 비밀이 다 들어 있다.
1. 변선환 박사, 그는 열정의 학자였다
내가 선생님을 처음 만난 건 1967년, 신학도라는 나의 여정 출발점에서였다. “신”에 대하여 알고 싶어 문을 두드렸던 신학교, 그 신학교에서 신을 만나지는 못하였지만, 매 시간 거품을 품고 강의하시던 변선환 선생님을 만났고, 그것은 행운이었다. “나도…” 하는 감격을 얻었으니까. 이에 비하여, 참으로 죄송하지만, 내가 만난 무수한 목회자들에게서는 그런 감격을 얻지 못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직 교회 울타리 안에 머물러 있는 나 개인에게는 비애이다. 목회자의 길을, 한순간도 즐거운 맘으로 달려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훗날 텍사스에서도 그런 열정을 가지고 강의를 하시는 교수님 한분을 만났고, 우연히도 두 분 선생님들이 조직신학자였던 고로, 나의 전공, 조직신학은 나의 자부심이 되었다. 다른 분야 교수님들은 전혀 나의 흥미를 끌지 못하였다(그렇다고 그들의 학식이 떨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그러므로 나에게 있어 신학교 시절의 스승 한분을 꼽으라면, 그것은 당연히 변선환 선생님이시다. 그러나 우리의 만남은 선생님에게도 나에게도, 그리고 한국 감리교회에게도 좋은 일만은 아니었다.
2. 선생님에게 불행한 인연
아마 1978년, 내가 도미하기 전이었을 것이다. 잠시, 무급으로 일하던 곳이 “월간 목회.” 그 잡지 창간 당시 편집주간으로 잠시 일 한 적이 있다. 우리 팀(통합측 목사님, 장로님, 합동측 장로님, 집사님 그리고 나)은 그냥 수시로 모여 교계의 소식을 주고받으면서 목회자들을 돕는 잡지를 만들자 하고는 그 틀을 잡는 동안, 편집주간 일을 내가 봤다.
창간 후 곧 목회자들을 깨우는 특집으로 변선환-박아론 지상토론을 내보냈다: “교회 밖에도 구원 있다/없다.” 그러고는 뒷감당을 하지 못한 채, 나는 유학의 길에 올랐다. 도미 전에 만난, 선생님은 “야, 임마! 너 때문에 내가 죽게 되었다!”하셨다. 그러나 선생님의 입가에는 웃음이 서려 있었고, 나는 안심했다. 그 이전에도 다른 학자들의 다원주의적 사상을 종종 소개하고 있었지만, 이 사건 이후로 “교회 밖에도 구원 있다!”는 메시지는 변 선생님의 다른 이름이 되고 말았다.
한편, 감신에서는 이미 윤성범 선생님이 툭하면, 교권의 호출을 받으셨고, 그 때마다 “이것은 나의 신학이다. 나의 신앙은 당신들과 같다”는 정치적 발언을 하시고, 안전하게 귀가하던 판이었다. 이 지상논쟁 사건으로 인하여, 변 선생님도 같은 제스쳐를 도구로 삼아야 했다. 말도 안 되는, 비겁한 작전이었지만, 당시로서는 그것이 최상이라고 나도 믿었다. 학문적 토론의 장은 마련될 분위기가 전혀 성숙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3. 나에게도 불행한 인연
1981년, 내가 감신대 교수 생활을 시작할 때, 감신대는 변 선생님과 숙적인 박OO 박사가 학장을 하고 있었고, 두 사람 사이의 깊은 알력은 몇몇 사람을 죽이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국 감리교회의 역사를 계속하여 뒤틀고 있었다. 먼저 학위를 받았다고, 혹은 유능한 정치꾼 기질을 발휘한 덕에, 박OO 박사가 홍현설 학장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마침내는 선배인 김OO 교수, 변선환 교수를 제치고 학장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감신대 근세의 학내사태의 시발점이 되고 말았다. 변 선생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박OO 박사의 행정에 시비를 걸었고, 나의 전공이 조직신학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변 선생님이 “내 분야에는 홍정수, 못 들여 놓는다”하여, 결국 나는 부전공인 윤리학 교수로 모교인 감신대에 첫발을 들여놓게 되었다(이 대목은 나중에 안 일이다). 그래서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나는 박OO 학장님에게 진 빚을 갚아드렸다. 82년도(?) 학내 사태의 시비는 “제자가 스승을 제치고 학장의 직에 앉는 것은 부도덕하다”는 것이었는데, 이런 어거지 논리는 아무리 단합된 총학의 의지라 할지라도, 젊은 나로서는 묵과할 수 없었다. 학생 채플에다 바리케이트를 치고, 단식 농성을 하던 학생들을 나 홀로 설득해 초긴장의 학내 사태를 경찰 없이 해산시켰던 것이다.
그러나 변-박 사이의 앙숙은 몇 년이 못되어 재연,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되었다. 이 일로 인하여 교수진들은 서로 원수처럼 이간되었고, 박OO 박사는 감신대에서 영영 물러나가게 되었다. 그리고 다른 한 교수가 학장직을 거친 후, 숙원이던 학장직이 변 선생님의 차례가 되었다.
변 선생님을 만난 게 선생님에게도 나에게도 악연이었다는 건 뒤늦게 안 일이지만, 학자로서 교수로서의 변 선생님과 학장이라는 행정 수반으로서의 선생님은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이것은 당시 아직 설익은 나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변 선생님은 그렇게 증오하던 박OO 학장의 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했을 뿐, 그렇게 소리쳐 외치던 “감신 학풍의 고양”은 안중에도 없었다. 결국 나는 또 다시 선생님의 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힘 가진 자에게 할 수 있는 힘을 다하여 비판하는 것, 이것이 학자적 양식임을 몸으로 보여 주었던 변 선생님, 그 제자인 나는 다른 길을 알지 못하였다. 그래서인지, 변 선생님의 머리 속에는, “홍정수는 박OO의 새끼”라는 낙인을 지우지 못하고 사셨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종교재판이라는 또 다른 비극으로 이어졌다.
4. 꽁수바둑을 두신 선생님
종교재판 사건 당시, 곽OO 감독과 밀약을 한 후, 평안한 맘으로 네팔을 다녀온 당시 감신대 학장 변 선생님. 귀국 후 너무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곽 감독과의 밀약 내용은, “홍정수만 죽인다”였었다. 그러나 총회에서 박OO라는 감리사가 일을 저지르고 말았기 때문이다. 곧 감리교 총회는 “둘 다, 죽이자!”를 통과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이리하여 감신대의 비판적 학풍 죽이기 작업은 빠른 속도로 성공해 나갔다.
5. 우리는 유치했었다
나는 변 선생님이 학문을 사랑하고, 감리교회 전통을 사랑한다는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러나 선생님과 나도, 그리고 학자라는 직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교회의 일반 신도들, 그리고 교회를 돌보고 있는 동료 목회자들을 충분히 존경하지 못하였다. 감신대의 당시 풍토는 공부 잘 하면 교수, 썩 잘 못하면 목회. 그런 분위기였었고, 이런 분위기는 지금도 별도 다를 바 없다고 본다. 이 얼마나 수치스런 어리석음인고! 노래를 잘 하는 사람이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을 무시한다면? 상상이나 할 일인가? 한 몸의 다른 지체들이라는 말, 단지 머리 속에 있는 단어였을 뿐, 살이 되고 피가 되는, 삶 속의 지침은 결코 아니었다.
“나, 감신대에 가서, 강의 좀 하자!” 나중에 안 일이지만, 김OO 목사(K교회)가 풀러에서 D.Min. 학위를 받은 후, “나도 박사다, 좀 가르치자!”한 것을 거절한 게 훗날 종교재판 저변의 한 사연이 되었다니, 감신대의 풍조를 얼마나 단적으로 입증해 주는가!
6.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너무 늦기 전에, 교수들은 공부 참으로 열심히 하고, 목회자들은 목회를 바르게 하되, 한 몸의 서로 다른 지체임을 깊이 자각하고, “우리가 어찌 하면 이 시대의 소명을 다할 것인가?”하고 뜻을 모으며 ‘공개적으로 토론’하는 장을 모색해야 한다. 지난 날의 어떤 한 개인을 영웅시하는 유치한 놀이를 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