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미가 6:6-8, 고린도후서 2:14-16, 마태복음 8:18-20
설교문
얼마 전 누군가에게 꽃을 선물할 일이 있어 꽃집에 갔습니다.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저도 가끔은 '꽃을 든 남자'가 됩니다. 꽃집에 들어가니 예쁜 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중에서도 유난히 제 눈길을 끄는 장미가 있었습니다. 정말 탐스럽고 화려했습니다. 그때 꽃집 주인이 저를 한참 보더니 이렇게 묻더군요. "선물하시는 거죠?" 순간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 내 얼굴을 보고는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시는구나.'
저는 그 장미를 가까이 들어 향기를 맡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아무 향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한 번 맡아 보고, 조금 더 가까이 다시 맡아보았습니다. 혹시 제가 감기에 걸렸나 싶어 옆에 있는 꽃도 맡아보았습니다. 그런데 장미들에서는 아무 향기도 나지 않았습니다. 꽃은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꽃잎은 백 장도 넘을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향기가 없었습니다. 순간 엉뚱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요즘은 장미의 향기도 옵션으로 파나?'
나중에 알고 보니, 요즘 이런 장미가 적지 않다고 합니다. 박찬숙 작가는 『난잎에 베이다』에서 그 이유를 아주 흥미롭게 설명합니다. "지금의 튤립이나 장미는 대기업의 자본이 장기 투자로 교배 육종을 최대한 밀어붙인 결과이다. 계속 교배해서 꽃잎이 백 장을 넘는 탐스러운 장미를 만들다 보니 '향기 없는 장미'가 계속 생겨나는 것이다. 꽃은 기가 막히게 예쁜데 향기가 전혀 나질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의 힘을 빌릴 필요 없이 피는 꽃들이니 벌과 나비를 유혹할 향기를 만들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저는 이 대목에서 멈춰 한동안 책장을 넘기지 못했습니다. '향기를 만들 필요가 없어졌다.' 참으로 묘한 말입니다. 꽃이 더 이상 벌과 나비를 기다리지 않아도 되니 향기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꽃이 향기를 만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자기만족을 위해서가 아닙니다. 누군가를 초대하기 위해서입니다. 벌과 나비를 부르기 위해서입니다. 향기는 언어입니다. "내게 와도 됩니다", "나는 당신을 환영합니다", "우리는 함께 생명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꽃의 언어입니다. 꽃의 인사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현대의 장미는 더 이상 벌을 기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대신 수정해 주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대신 번식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벌과 나비와의 관계가 없어도 생존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향기를 만들 필요도 없습니다. 꽃의 향기가 사라진 것은 능력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관계가 불필요해졌기 때문입니다. 향기는 관계를 위해 존재합니다. 그런데 관계가 필요 없어지니 향기도 사라졌습니다. 저는 이것이 현대 문명을 설명하는 하나의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이 화려한 문명은 '향기 없는 장미'와 같지는 않을까요.
오늘날 우리는 사람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믿습니다.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영화를 보고, 혼자 여행합니다.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고, 화면으로 회의하고, AI와 대화합니다. 마음 아픈 사람은 상담도 사람과 하지 않고 밤새 AI와 합니다. 점점 더 많은 일을 사람을 통하지 않고 해결할 수 있습니다. 기술은 점점 더 우리를 관계가 없이도 기능하는 존재로 만들어 갑니다. 이것 자체가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관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삶은 향기까지 잃어버리기 쉽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능력을 극대화합니다. 경력을 쌓고, 외모를 가꾸고, 스펙을 늘리고, 성과를 만들어 냅니다. 꽃잎은 점점 많아집니다. 더 화려해집니다. 그런데 향기는 점점 희미해집니다. 관계보다 경쟁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사람은 더 이상 서로를 끌어들이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이기기 위해 살아갑니다. 그러니 향기가 사라집니다. 사람의 향기가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향기 없는 장미'는 단지 원예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현대인의 영적 초상입니다. 우리는 점점 더 아름다워지고, 점점 더 전문적으로 되고, 점점 더 효율적으로 되고, 더 크게 성공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 누군가를 환대하는 마음,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마음은 점점 메말라 갑니다. 그래서 향기가 사라집니다. '사람의 향기'가 사라집니다. 요즘의 과일은 옛날보다 크고 탐스러운데 과일의 향기가 전혀 나지 않는 것처럼 말입니다.
예수님에게서는 '사람의 향기'가 났습니다. 진한 사람의 향기가 났습니다. 흥미롭게도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자신을 가장 자주 부르신 이름은 '메시아'도, '하나님의 아들'도 아닙니다. '인자(人子, Son of Man)'입니다. 곧 '사람의 아들'이었습니다. 복음서 전체에서 '인자'라는 말은 약 80회(공관복음 약 69회, 요한복음 약 13회)나 등장하는데, 거의 모두 예수님 자신의 입에서 나옵니다. 초대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자신은 스스로 '인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겸손의 표현이 아닙니다. 그분의 철저한 자기 이해였습니다. 그분의 정체성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인자'입니까? 첫째로,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인자입니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의 인자입니다. 한 서기관이 예수께 나아와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겠다고 하니,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태복음 8:20) 머리 둘 곳도 없다면 노숙자 아닌가요. 또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사람들이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한다"(마태복음 11:1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인자는 배고프고, 피곤하고, 잠자고, 길을 걷고, 친구들과 함께 식사하는 사람입니다.
둘째로, 고난받는 인자입니다. 복음서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인자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림을 받아 죽임을 당할 것"(마가복음 8:31)이라 예고하셨습니다. 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 10: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때의 인자는 고난받고, 배신당하고, 죽임당하는 존재입니다.
셋째로, 영광 가운데 오는 인자입니다. 예수님은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마가복음 14:62)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인자는 우주의 심판자이며 주권자입니다.
원래 '인자'라는 말에는 두 가지 성서적 배경이 있습니다. 첫째는 에스겔서입니다.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를 거의 90번 이상 "인자야"라고 부르십니다. 히브리어로 "벤 아담(בן־אדם)"입니다. 직역하면 "사람의 아들"입니다. 뜻은 간단합니다. "너는 인간이다." 즉 피조물, 연약한 존재, 죽을 존재라는 뜻입니다.
둘째는 다니엘 7장입니다. 여기서는 전혀 다른 그림이 나옵니다. 다니엘이 환상 중에 보니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와서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에게 나아가 그 앞으로 인도되매 그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고 모든 백성과 나라들[이]... 그를 섬기게 하였[다]"(7:13)라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인자는 하나님께 권능을 받고 모든 나라를 다스리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를 메시아적 존재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이 두 의미를 하나로 묶으셨습니다. 사람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왕을 기다렸고, 혁명가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러한 이름들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인자'를 사용하셨습니다. 그 안에는 두 가지 의미가 동시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인자는 가장 인간적인 존재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 권능을 받은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향기는 바로 이 '인자'라는 호칭에서 드러납니다. 가장 진하게 드러납니다. 예수님은 굶주리는 사람이셨습니다. 목마른 사람이셨고, 친구를 잃고 우는 사람이셨습니다. 피곤하여 우물가에 앉는 사람이셨고, 유혹을 받는 사람이셨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셨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을 피처럼 흘리신 분이셨습니다. 이 모든 모습이 '인자'입니다.
예수님은 권력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 주지 않으셨습니다. '인간됨'(humanity)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 주셨습니다. 눈물, 연민, 식탁, 우정, 용서, 고난, 자기 내어줌 - 이것이 하나님의 얼굴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에게서 나는 향기는 신성(神性, divinity)을 덮고 있는 향수가 아닙니다. 신성을 감추고 있는 껍데기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향기는 인간성 속에서 피어난 하나님의 향기입니다.
그분에게서는 사람 냄새가 났습니다. 어린아이들을 안아 주셨고, 식탁에 함께 앉으셨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웃으셨고, 시장과 들판을 걸으셨고, 평범한 사람들의 집을 찾아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신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함께 걸으시는 인자이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나를 숭배하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먼저 사람이 되셨습니다.
향수는 몸에 뿌립니다. 그러나 사람의 향기는 인격(人格)에서 납니다. 예수님에게서 풍긴 것은 향수 냄새가 아니라 그분의 인격, 그분의 존재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 있으면 정죄 대신 회복을 경험했습니다. 두려움 대신 평안을 얻었습니다. 수치 대신 존엄을, 절망 대신 희망을, 고립 대신 관계를, 미움 대신 사랑을, 죽음 대신 생명을 맛보았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전혀 다른 존재로 바꾸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처음 지으시고 꿈꾸셨던 '참 사람'으로 회복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예수님 곁에 있으면 조금씩 자기 자신을 되찾아 갔습니다. 향기는 누군가를 억지로 변화시키는 힘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본래의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끄는 존재의 힘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인자' 되심의 가장 아름다운 의미입니다.
고린도후서 2:15에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구원받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바울은 "우리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사람들"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 왜 하필 향기일까요?
향기는 말보다 먼저 전해집니다. 설명보다 먼저 느껴집니다. 눈으로 보기 전에 마음으로 닿습니다. 향기는 누군가를 설득하려 애쓰지 않습니다. 다만 그 존재 자체로 주변을 변화시킵니다. 바울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일으키셨습니다. 폭풍을 잠잠하게 하셨고,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셨습니다. 사람들은 감탄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를 자세히 읽어 보면, 예수님을 끝까지 따르게 만든 것은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였습니다. 예수님의 향기였습니다. 예수님 곁에 있으면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자기 자신을 미워하지 않게 되었고, 하나님이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 곁에 계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들을 경쟁자로 보던 사람이 그들을 형제와 자매로 부르기 시작했고, 자신의 상처만 바라보고 연민하던 사람이 다른 사람의 눈물을 볼 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처지를 즉시 바꾸지 않으실 때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존재 방식을 바꾸셨습니다. 이것이 향기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향기입니다"라고 말할 때 그 뜻은 예수님의 기적을 반복하라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의 존재를 이어가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 곁에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이제 여러분이 그렇게 향기로운 존재가 되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존재입니까? 여러분에게서는 어떤 향기가 납니까?
다시 김재진 님의 <또 한 번의 기도>가 생각납니다. "내가 /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 더 외롭게 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 내가 / 나를 그리워하는 그 누군가에게 / 떠올리기만 해도 다칠 듯한 / 아픔으로 맺히는 대상이 되지 않게 하소서. / 순간을 머물다 세상과 멀어져도 / 눈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미소로 남으며 / 내게 기대는 그 누군가에게 / 그 자리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 고마운 존재가 되게 하소서."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자기 스스로 꽤 괜찮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혹 '나를 사랑하는 누군가를 더 외롭게 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혹 '나를 그리워하는 그 누군가에게 떠올리기만 해도 다칠 듯한 아픔으로 맺히는 대상'은 아닙니까? 여러분은 곁에만 있어도 숨이 막히는 존재입니까, 아니면 여러분 곁에 가면 숨을 쉴 수 있는 존재입니까?
어느 시인의 말입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 나는 한 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 나는 한 방울 눈물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 / 기쁨도 눈물이 없으면 기쁨이 아니다 / 사랑도 눈물 없는 사랑이 어디 있는가 / 나무 그늘에 앉아 / 다른 사람의 눈물을 닦아주는 사람의 모습은 / 그 얼마나 고요한 아름다움인가."(정호승, <내가 사랑하는 사람>)
가까이 있어도 늘 그리운 마음이 사랑입니다. 내가 기쁠 때 찾아가는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내가 슬플 때 찾아오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누군가에게 한 그루 나무의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는 사람입니까? 누군가의 눈물을 닦아주는 따뜻한 사람입니까? 여러분에게서는 어떤 향기가 납니까? 사람에게서 어떤 향기가 나느냐는 질문은 단순히 성격이나 매력을 묻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존재가 무엇으로 기억되고 또 무엇을 남기는지에 관한 질문입니다. 우리는 "순간을 머물다 세상과 멀어져도 / 눈물로 남는 것이 아니라 미소로 남으며 / 내게 기대는 그 누군가에게 /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위안이 되는 / 고마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을까요?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 건물의 크기나 화려함이 아니라 먼저 "여기서는 괜찮다", "여기서는 숨지 않아도 된다", "여기서는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준다"라고 안도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향기를 경험하는 것일 겁니다. 향기는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향기를 기억합니다. 설교 내용은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찬양의 가사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심지어 교회의 이름마저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교회에 갔더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했다", "그 교우를 만나고 나면 이상하게 다시 살아갈 힘이 생겼다", "그 목사님은 내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 주셨다"라는 기억은 오래 남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런 삶을 가리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향기는 사람을 조종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초대합니다. 향기는 사람을 굴복시키지 않습니다. 사람을 가까이 오게 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단지 경건한 분위기나 종교적 아우라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인자(人子, Son of Man)이신 예수님의 사람다움이 오늘 내 삶 속에서 다시 피어나는 사건입니다.그 향기는 어떤 교리보다 오래 남고, 어떤 설교보다 멀리 퍼지며, 어떤 선교보다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강력한 증언이 됩니다.
경애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이렇게 부르십니다. "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 6:8, 새번역/개역개정). 육신을 입고 사람이 되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에게서는 사람의 향기가 났습니다. 사람을 판단하기보다 품어 주는 향기, 군림하기보다 섬기는 향기, 자신을 지키기보다 생명을 내어주는 향기, 바로 십자가의 향기입니다. 이 향기는 예수님과 가까이 있던 사람들만 맡는 향기가 아니라 2천 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 가운데 피어나는 생명의 향기입니다. 오늘 여러분에게서 이 향기가 나기를 바랍니다. "꽃이 아름다운 건 내 안에 꽃이 있을 때"라고 하지요. 오늘 여러분 안에 '샤론의 장미' 예수 그리스도의 꽃이 활짝 피어나기를 바랍니다. 팔레스타인 땅에서 피는 샤론의 장미는 우리 땅의 무궁화이지요. 이 꽃이 지금 이화동산 곳곳에 피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향기 없는 장미'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향기'를 풍기는 샤론의 장미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있는 곳마다,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거기서 참사랑과 생명의 향기가 풍겨 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니다. 능력과 성취만을 좇으며 우리가 정작 사랑과 관계를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게 하옵소서. 우리 안에 메말라 버린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다시 누군가를 기다리고, 환대하고, 품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인자로 오신 예수님처럼 눈물 흘릴 줄 알고, 함께 식탁에 앉을 줄 알며, 누군가의 고통 곁에 머물 줄 아는 사람 되게 하옵소서. 우리의 말이 아니라 우리의 존재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게 하시고, 우리가 가는 곳마다 위로와 회복과 생명의 향기가 퍼지게 하옵소서. 샤론의 장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