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한복음 15:11-17절
설교문
지난 겨울 얼마나 추웠던지 또 그런 추위가 오면 어쩔까하는 생각이 납니다. 그렇게 혹독한 추위는 지하철역 주위가 더 심합니다. 따뜻한 지하철에서 내리면 갑자기 더 춥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아직 여섯 살 정도 밖에 안돼 보이는 아이가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와 함께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여기요, 여길 잡으세요.” “그래, 그래, 알았다.” 계단 손잡이를 잡고 한 발 한발 내려오시는 할아버지와 그 아이를 보는 이들의 마음은 뭉클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도와 드릴까 하다가 날씨가 너무 추워 귀찮아서 다들 집으로 바쁜 발길을 돌렸습니다. 매서운 추위는 이렇게 사람들의 양심까지 얼어붙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그 할아버지를 도와 드리는 꼬마가 할아버지 손자인가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아닌 것 같았습니다. 할아버지는 남루한 옷을 입었는데, 그 아이는 옷을 깨끗하게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이는 뒤따라 내려오시는 할아버지 앞에서 계단 손잡이를 열심히 문지르고 있었습니다. 단순히 노는 줄 알았는데 그 아이의 몸짓이 너무 진지했습니다.
사람들은 그 아이의 행동을 오래 지켜보고서야 그 아이 행동의 깊은 뜻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아이는 장난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잡을 계단 손잡이를 자신의 체온으로 계속 녹이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어찌 저럴수가 있을까!”하고 감탄했습니다.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의 시린 손을 아이의 작은 손으로 지켜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의 순수한 사랑을 보고 거기서 구경하던 수많은 사람들은 추위로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벅찬 감동을 느꼈습니다.
사랑이 메말라 버린 요즈음 세상에 이런 어린아이의 감동어린 사랑이야기는 우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예수 공동체인 교회에서도 이런 진한 감동적인 이야기는 찾기가 어렵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택함을 받은 자들로서 주님의 은혜로 이 땅에서 특별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구별된 자들입니다. 구별된 자들로서 우리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구별되었다고 해서, 구별된 생활을 한다고 해서 그 무슨 큰 부귀 권세를 누리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섬김을 받기 위해서 구별된 것이 아닙니다. 그 무슨 특권을 왕처럼 누리기 위해서 구별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처럼 낮아져 섬기기 위해서 구별되었습니다. 섬김과 봉사와 사랑으로 구별되지 못하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더라도 섬김과 사랑으로 세상 사람들과 구별될 수 없는 사람이라면 무엇인가 잘못됐어도 한참 잘못된 것입니다. 주님께서 왜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구별했는지를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알아 보고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1.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구별하셨습니다.
일본의 도꾸가와 막부는 기독교를 엄청나게 박해했습니다. 일본 관리들이 교회에 들이 닥쳐 교회 문 아래에 예수의 사진을 깔고 신자들에게 그 예수의 사진을 밟고 지나가도록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사진을 밟고 지나갔는데 믿음이 좋은 한 모자(母子)가 구겨진 예수의 사진을 가슴에 앉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떻게 예수님을 밟을 수가 있어요. 비록 사진에 지나지 않지만 예수님을 다시 한번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정말 담대했습니다. 결국 그들은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릴 것을 생각하며 아이가 두려워 떨자 어머니가 아들의 손을 꼭 잡고 말했습니다.“얘야,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의 사랑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이 계시는, 평화가 넘쳐흐르는 천국에 가게 될 거야. 그곳에서 만나자.”
드디어 사형이 집행되어 십자가가 양편에 세워지고 어머니와 아들이 각각 십자가에 묶였습니다. 불이 당겨졌고 어머니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위로를 받던 아이가 연기로 인해 어머니가 보이지 않자 울먹이면서 말했습니다. “어머니, 연기 때문에 어머니가 보이지 않아요.” 그러자 어머니는 힘 있게 말했습니다. “애야, 내 얼굴이 보이지 않더라도 저 하늘 위에 계신 예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도록 하자. 얼굴을 들어 하늘을 보렴.”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마지막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올바른 일을 하는 곳에 그 언제나 기쁨이 있습니다. 항상 세상 문제 때문에 괴로워 침울한 모습으로 살고 있는 사람은 참다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부활로써 이 세상을 이기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승리하신 것처럼 우리 기독교인들도 세상에서 승리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천국을 바라보며 기쁨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현실의 삶이 고통스럽더라도 믿음으로 극복하고 기쁨의 근원되신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중세시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수도원에서 그들은 예수의 고난을 몸소 체험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언제나 고통스러운 모습을 하였습니다. 이런 수도사들의 모습, 바로 두 어깨에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을 짊어져서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모습이 기독교인들의 자화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의 자화상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죄인이지만 주님의 십자가로 인하여 죄를 용서받은 죄인들입니다. 그러므로 죄에서 해방된 우리는 기쁨과 감격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의 참된 자화상은 바로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모습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요15:11)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온전한 기쁨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이 기쁨을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걸어가는 인생은 정말 복되고 기쁜 것입니다. 슬프고 괴로운 것이 아니라 즐겁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울며 씨를 뿌릴 지라도 기쁨으로단을 거두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신앙생활에는 언제나 감격과 기쁨이 있습니다. 우리는 얼굴을 펴고 감격과 기쁨으로 인생을 살아가야 합니다. 결국 승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주님 안에서 승리했으니 고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우리가 택함 받은 것은 사랑의 생활을 하기 위함입니다.
이 세상은 경쟁사회입니다. 유치원에 들어가면서 경쟁이 시작되어 일생 동안 경쟁하며 살아갑니다. 적자생존이라는 원칙이 인간사회에도 적용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그 어디에도 사랑을 볼 수 없습니다. 이런 비정한 세상인데도 주님은 우리에게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15:12)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똑 같은 분이신데 이 땅에 오셔서 영원히 형벌을 받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신 힘으로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고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우리에게 이런 명령을 내릴 수 있는 자격이 충분했습니다. 영 죽게 될 영혼을 구원하셨으니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할 수 있는 자격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받은 우리는 서로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우리의 마음에는 이웃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까?
어느 한 집사님이 한센병자를 돌보았습니다. 어느 날 그 집사가 런던의 창녀촌을 지나가는데 불쌍한 창녀를 발견했습니다. 너무나 불쌍한 마음이 들어 그녀는 침대 시트를 갈아주고 약도 사다주고 음식도 먹여주고 불도 피워주고 방안도 밝게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내가 자매님을 위해서 기도해도 될까요?” “안돼요. 이제 나를 내버려 두세요. 이렇게 해서 당신 천당에 가려고 그러지요?”
그 후 여러 날이 흘렀고 그 집사는 사랑을 베풀었건만 그 여자는 더욱 완고해졌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자매님, 자매님은 이제 다 나았어요. 그러나 저는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하고 떠나려고 해요. 언제 만날지 모르니 마지막으로 당신께 입맞추도록 허락해 주세요.”
그리고는 기도와 경건으로 깨끗한 영혼이 된 그 집사는 더러운 창녀에게 입을 맞추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렇게 완고하던 마음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이런 사랑을 하려고 주님은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주여,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우리는 전심전력으로 주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3. 주님의 친구로 지내기 위해서 택함 받았습니다.
성경은 모세를 ‘여호와의 종’(신34:5)이라고 했습니다. 또 여호수아를 ‘여호와의 종’(수24:29)이라고 했고, 다윗을 ‘내 종’(시89:20)이라고 했습니다. 신약에서도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했고, 야고보도 자신을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약1:1)이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다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경건한 종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종’이라는 것을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라“(요15:14-15)고 하셨습니다.
구약의 위대한 인물들은 자신들을 ‘종’이라고 했는데, 예수께서는 이제 제자들을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곧 우리들에게 당신의 종이나 노예가 아니라 친구라고 하신 것입니다. 친구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우정입니다. 그래서 우리 옛 선조들은 친구 사이의 우정을 중시했습니다. 최원도는 고려말 사람으로 중 신돈이 득세하여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경상북도 영천 땅에 내려가 세상을 등지고 살았습니다.
같은 시기에 벼슬과 학문으로 서로 우의가 돈독하던 이집(李集) 또한 얼마 후 신돈의 전횡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벼슬을 버리고 둔촌동 집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에게는 늙은 아버지가 계셨기 때문에 아버지에게까지 화가 미칠까봐 매우 걱정이 되었습니다.
큰 화가 닥쳐 올 것을 감지한 이집은 어느 날 밤 아버지 이당(李唐)을 등에 업고 경상도 영천 땅의 친구 최원도를 찾아 나섰습니다.
몇 달만에 도착한 최원도의 집에서는 마침 그의 생일날이라 인근 주민들이 모여 잔치가 한참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최원도의 집 문간방에 아버지를 내려놓고 피곤한 몸을 쉬고 있는데 친구 최원도가 소식을 듣고 문간방으로 뛰어나왔습니다.
반가운 마음으로 얼른 최원도의 손을 잡으려는 이집을 향해 뜻밖에도 친구 최원도는 크게 노한 목소리로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망하려면 혼자 망할 것이지 어찌하여 우리 집안까지 망치려 하는가. 친구에게 복을 전해주지는 못할망정 화를 전하려 이곳까지 왔단 말인가?”
사태가 이렇게 되자 이집은 매우 난처해하며 몸을 의탁하러 온 것은 아니니 먹을 것이나 좀 달라고 부탁해 보았으나 최원도의 태도는 더욱 격노하면서 이집(李集) 부자를 동네 밖으로 내몰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최원도는 이집 부자가 잠시 앉았다 떠난 문간방을 역적이 앉았던 곳이라 하여 여러 사람이 보는데서 불태워 버렸습니다. 한편 이집은 최원도에게 쫓겨나 정처 없이 떠나면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최원도의 태도가 조금씩 이해되면서 그의 진심은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한밤 중에 다시 최원도의 집 부근으로 동네 사람들이 모르게 가만히 숨어들어 길옆 짚덤불에 몸을 숨기고 하루 밤을 쉬고 있었습니다.
최원도 또한 이집이 자기를 이해해 줄 것이라 믿고 동네사람들 모르게 꼭 다시 찾아오리라고 생각하면서 날이 어둡자 혼자서 집 주위를 뒤져보다가 두 친구는 반갑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이집은 최원도의 집 다락방에서 이후 4년 동안을 보내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친구들도 이런 믿음이 있는데 우리 주님께서는 얼마만한 믿음으로서 친구가 된 우리를 신뢰하시겠습니까?
친구, 벗이란 특별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쓰는 용어입니다.로마의 황제나 동방의 임금들에게는 ‘임금의 친구,’ ‘황제의 친구’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임금 앞에 출입할 수 있었고, 하루가 시작되기 전에 임금의 침실까지 들어 갈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임금은 장관이나 장군이나 정치가들을 만나기 전에 먼저 친구들과 만났습니다.
임금의 친구는 임금과 가장 친밀하고 가장 친분이 두터운 교제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며, 어느 때나 임금에게 나갈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우리를 당신이 친구로, 하나님의 친구로 불러주셨습니다. 이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는 노예가 더 이상 아닙니다.우리는 임금께 나아가다가 경호원들에게 제지당하거나 쫓겨나는 종들이 이제는 더 이상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친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언제든지 가까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친구 되신 주님을 붙들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셔서 승리하게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과 친구간이 되었습니다. 친구 되신 주님을 간절한 믿음으로 신뢰하여 주님이 주시는 기쁨과 사랑으로 이 땅에서 영적으로 승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