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터교회의 확장
독일에서 루터교회와 로마가톨릭교회 사이의 충돌을 피하기 위한 정책이 1529년의 스파이에르(Speier)회의에서 가톨릭의 대표 수가 우세한 가운데 결정된 것이 있었다. 그것은 각 주의 종교는 군주의 종교에 따라 결정될 것이고, 가톨릭 군주의 주에서는 루터교회의 예배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지만 루터교 군주의 주에서는 가톨릭교회의 예배를 허락한다는 결정이었다. 이것은 지역종교제도(territorialism)이라고 불리는 것인데 이 결정이 불공평하다는 루터파 교인들의 항의는 1530년 아우그스버그 회의에서도 수용되지 않았다.
그러나 루터교회는 덴마크(Denmark)에서 크게 성장하여 국민의 3분의 1이 루터교인이 되었다. 로마 교황의 인사권을 무시하고 덴마크 왕은 감독직을 감독의 자식들에게 넘겨주고 로마 교황청으로 송금되던 납부금을 차단하였다. 그리고 국왕 크리스챤 2세는 덴마크 교회를 프로테스탄트로 개혁하려다가 유배를 받았다. 코펜하겐(Copenhagen) 대학 교수들이 루터교를 전하는 설교를 하였고 덴마크어로 성서가 번역되었다. 국왕 프레데릭(Frederick) 1세(재위 1523~1533)가 덴마크 교회를 루터교회로 개혁하였고 크리스챤 2세 왕은 덴마크 교회를 완전히 루터교회로 만들었다.
노르웨이(Norway)에서는 루터교회의 성장이 순조롭지 못하였으나 덴마크의 크리스챤 3세 왕이 통치하면서 루터교를 지지하여 로마가톨릭교회의 대주교가 축출되었다. 이때 덴마크와 노르웨이는 한 왕의 통치를 받는 연합국가였다. 노르웨이에 루터교 선교사가 2~3명 와서 설교하였으나 그들은 노르웨이 말을 몰랐다. 제 17세기 초에 노르웨이 교회는 루터교회로 개혁되었다.
스웨덴(Sweden)도 덴마크 왕의 통치 아래 있었다. 덴마크의 왕 크리스챤 2세가 스웨덴에서 완전한 권력을 쥐기 위하여 스웨덴의 정치지도자들을 처형하고 자기의 지배에 항거하는 사람들을 처단하였고 핀란드(Finland)에까지 자기 권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획책하였다. 그러나 그는 스웨덴 국민의 미움을 사고 스웨덴 농민들을 동원하여 무장한 군대를 이끌고 나온 구스타프 바사(Gustavus Vassa)에게 패배하여 스웨덴에서 덴마크의 세력이 완전히 물러갔다.
구스타프가 스웨덴의 왕이었을 때 그 나라는 극도로 빈약하였다. 그는 스웨덴을 독립국가로 만들고 종교도 개혁하고 싶어 했다. 독일의 루터에게서 종교개혁운동을 배우고 귀국한 올라브스 페트리(Olavus Petri)를 종교개혁 설교자로 정하여 개혁을 추진하기로 하고 1523년 11월에 로마 교황청과의 관계를 끊었다. 교리적으로는 가톨릭교회로부터 아주 떠나지 않았으나 교회 감독들의 재정 수입과 권리를 크게 약화시켰고 수도사와 수녀의 결혼을 허락하였다. 또한 성서가 스웨덴 말로 번역되었다. 페트리는 성서 번역과 찬송가 작사에 힘썼고 그 밖의 그리스도교 문서를 많이 발행하였다. 그는 수도원 제도와 목사의 독신주의를 반대하였다.
구스타프 왕은 교회가 국가의 군주에 종속되기를 원하여 감독들의 독립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루터주의로 아주 회심하고 죽은 사람을 위한 기도와 신부 앞에서 하는 고백제도를 반대하였고, 임종 때 받는 가톨릭교회의 종유의식을 반대하였다. 그가 사망하기 전 스웨덴 교회는 감독제도에서 벗어나기 시작하였다. 칼빈주의 교회의 도입과 로마가톨릭교회와의 화친을 구스타프 왕의 후계자들이 시도했으나 다 실패하였다. 1593년 웁살라에서 소집된 회의에서 루터교회의 아우그스버그 신앙고백(Augusburg Confession)을 정식으로 채택하였다.
루터교회는 중앙유럽 국가들에 들어가 확장하였다. 보헤미야(Bohemia)와 모라비아(Moravia)는 죤 후스의 종교개혁운동의 영향으로 로마가톨릭교회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루터교회의 선교를 수용하였다. 보헤미야에서 독일로 와서 루터에게 배운 사람들도 있었다. 그들은 후스를 종교개혁자로서뿐만 아니라 민족의 영웅으로 존경했다. 후스는 루터를 앞서간 종교개혁자였다. 보헤미야의 인구 10분의 9가 프로테스탄트였다. 루터교인이 대다수였고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사람도 많았다. 그리하여 1575년에 루터파 교인들과 칼빈주의자들이 공동으로 신앙고백을 만들었다. 로마가톨릭의 수도단 예수회 회원들이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전복시키려고 노력하였다.
헝가리(Hungary)에도 프로테스탄트 신앙이 전파되어 있었다. 후스의 개혁운동의 동조자들이 많았고 인문주의 운동도 소개되어서 성서가 헝가리 말로 번역되었다. 1526년에 터키군이 헝가리를 정복하여 가톨릭 주교들과 대주교들과 왕과 교계의 많은 지도자들을 죽여서 가톨릭교회가 약화되었다. 그리고 터키군이 헝가리의 대부분 지역을 점령하고 가톨릭교회 대신에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후원하였는데 여러 정치적 이유도 있었지만 터키군을 지지한 국민들이 프로테스탄트 신앙을 택하였기 때문이었다.
루터교회가 헝가리에 들어와서 전파되면서 헝가리인들이 비텐베르크로 가서 루터로부터 개혁운동을 배우기도 했고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공부하여 신학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나중에 스위스의 개혁교회 제도를 추종한 사람도 있었다. 헝가리에는 재세례파 교회와 삼위일체 교리를 반대하는 유니타리안(Unitarian) 교파도 들어왔다. 16세기 말경에는 프로테스탄트 인구가 대다수였다. 그리하여 1568년에 헝가리의 군주는 로마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와 개혁파 교회와 유니타리안 교회에 동등하게 신앙의 자유를 주었고 1571년 국회에서 이 정책이 확인되었다.
2. 30년 전쟁
과거 500년 이상 유럽 전체가 신성로마제국의 판도였고 동시에 로마가톨릭교회의 교구였는데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으로 로마가톨릭교회의 많은 영토가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상실되었다. 영국과 스코트랜드가 교황청으로부터 완전히 떨어져나갔고 서유럽 국가들과 중앙유럽 국가들에서도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가톨릭교회를 약화시켜 갔다. 이렇게 하여 생긴 종교적 갈등 외에 국가 간 또는 군주들 사이에 정치적 갈등과 세력 다툼이 있었고,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의 종교적 충돌이 불씨가 되어 국내와 국가 간 전쟁이 유발됐다. 이것이 30년 전쟁이었는데 이 전쟁의 막대한 피해는 그 전쟁으로 얻어진 종교적 관용주의의 소득으로 속량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1618년에 보헤미야에서 가톨릭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다. 보헤미야는 가톨릭 신자인 왕이 통치하는 가톨릭 국가였는데 프로테스탄트 인구가 더 많았다. 국왕 퍼딘난드(Ferdinnand)가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박해하는 데 대하여 항거한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이 1618년에 왕궁을 습격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퍼딘난드는 예수회에서 교육을 받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프로테스탄트 귀족들을 신성로마제국의 한 군주로서 선후왕(Elector)이던 팔라틴(Palatin)을 보헤미야의 왕으로 세우고 프레데릭(Frederick) 5세라고 불렀다. 그는 영국의 왕 제임스 1세의 사위였고 독실한 프로테스탄트 개혁파 교회의 신자였다. 보헤미야의 루터교회도 팔라틴을 지지하였다. 가톨릭 왕 퍼딘난드는 스페인 군대의 원조를 받고 개혁파 군대를 패배시켰고 프레데릭 5세는 보헤미야에서 쫓겨났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모든 재산이 압수당했고 프레데릭 가문의 모든 재산도 압수당했다.
다음 충돌은 서북 독일과 덴마크에서 일어났다. 1530년에 성립된 아우그스버그 회의 합의서는 가톨릭교회와 루터교회 사이의 지역적 평화를 약속한 것인데 이 합의를 깨고 가톨릭 측이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박해하여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많은 감독들이 가톨릭교회로 넘어가고 교회가 약화되었다. 1623년에 양편의 전쟁에서 가톨릭 측이 승리하여 독일 북부의 많은 루터교회가 수난을 겪었다.
1629년 3월에 전쟁에서 승리한 가톨릭 군주는 1552년 이래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넘어간 모든 재산을 탈취하여 가톨릭교회의 재산으로 만드는 법령을 발표하여 루터교회에 속했던 수도원들과 교구의 교회들이 가톨릭교회의 소유가 되었고, 가톨릭 군주의 영토에서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추방되었다.
승리를 거듭하며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약화시키던 가톨릭 진영에서 군주들 사이의 정치적 이해문제로 분열이 생겼다.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Gustavus)가 가톨릭 군대의 맹장 발렌스타인(Wallenstein)을 이기고 보헤미야를 점령하였다(1630년). 그리고 그가 독일의 가톨릭 군대를 정벌하러 갔을 때는 프랑스의 도움을 받았고 독일의 프로테스탄트 군주들이 그를 도왔다. 그리하여 전세는 구스타프에게 유리하게 되어서 가톨릭 군대가 결국 패배하였다. 그러나 그는 전투에서 사망하였다.
30년 가까이 계속된 전쟁에서 얻은 결론은 가톨릭 세력이 북쪽 독일에서 왕성한 프로테스탄트 세력을 완전히 타도할 수 없다는 것과 반면에 프로테스탄트들은 남쪽 독일에서 지배적이 될 수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리하여 1635년 신성로마제국과 독일의 삭소니 주 군주 사이에 평화협상이 체결됐다.
이 협상 후에도 국가들 사이의 정치적 이해가 엇갈려서 스페인과 스웨덴이 계속 싸웠고 프랑스는 종교 문제를 떠나서 루터교파인 스웨덴과 손을 잡기도 하였다. 이러한 복잡한 정치적 충돌로 인한 크고 작은 전쟁이 폐허가 다된 유럽을 초토로 만들 뿐이었다. 그리하여 1648년에 웨스트팔리아(Westphalia)에서 전쟁을 끝내기로 합의하였다. 그러나 평화의 조건들을 위한 합의를 이끌어내기는 쉽지 않아 국가들 사이와 양측 교회 사이에 협상이 오랫동안 진행되다가 최종적으로 합의에 도달했다.
1648년의 웨스트팔리아 평화회의로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유리한 상황이 되었고 가톨릭교회는 다소 불리하게 되었다. 또한 칼빈주의 개혁파교회도 루터교회와 공적으로 꼭 같은 선교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소유가 된 교회재산을 가톨릭교회가 돌려받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1624년 이후의 가톨릭 교회재산이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양도될 수 없게 못박았다. 아무튼 가톨릭교회의 많은 교구와 교회와 수도원이 프로테스탄트의 소유가 되었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독일에서 더욱 왕성해져 갔으나 독일의 서남 지역 대부분은 가톨릭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지역별 종교제도의 원칙에 따라 가톨릭 군주의 영토에서 소수파의 프로테스탄트들이 사적으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고, 프로테스탄트 군주의 영토에서 가톨릭 교인들의 예배가 허락되었다. 그리고 소수파의 교회들이 가톨릭이든 프로테스탄트든 간에 자기들의 자녀들을 자기들이 교육하게 하였다. 어떤 곳에서는 가톨릭 신도들과 프로테스탄트 신도들이 같은 교회당에서 시간만 달리하여 모여서 예배를 드렸다. 지금도 독일 시골에는 이러한 교회당이 있다.
30년 전쟁은 가톨릭 측과 프로테스탄트 측 어느 편의 승리도 아닌 전쟁으로 끝났으며 대체로 1624년 당시의 양편 교회의 판도를 확인하는 것이 되었다. 독일이 이 전쟁의 결전장이 되었는데, 그 결과로 독일 연방제국이 붕괴되고 각 주 정부들의 연맹이 허약해졌고 그 대신 프랑스가 유럽에서 패권을 쥔 나라로 등장하였다. 이 전쟁은 일종의 파괴전쟁으로서 독일이 가장 큰 피해를 입었는데 독일 국민의 60%가 살해되었고 그 수는 1,800만 명에 달하였다. 또한 60% 이상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82% 이상의 가축이 피살되었다.
이러한 인명과 물질적 손실 이상으로 사람들의 도덕이 타락하고 부패하게 되었고, 종교적으로 신앙이 회의적으로 변해서 이제는 어느 종교에 대하여도 흥미와 관심이 없어져서 정신적 침체가 만연하게 되었다. 신학토론과 담론도 기피하였다.
이러한 종교적 및 사상적 저기압이 18세기에 와서는 신학사상과 문화운동의 새 기류를 탈 것이었다. 그리고 여전히 가톨릭의 교세가 우세하였지만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새 시대의 새 문화운동에 동조하면서 해외로 선교사업을 확대하여 점차 가톨릭의 교세를 능가하게 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