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박사 ⓒ베리타스 DB |
예수는 공생활 기간 중에 시시 때때로 저주의 말을 입에 담았는데, 일단 누구라도 그분의 눈에 벗어났다 하면 십자포화 식으로 퍼부어지는 저주를 피해 나갈 수 없었다.
유다인들 중에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불효를 일삼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부모 봉양을 피하려는 목적으로 자신의 재산을 두고 코르반 서원을 했다. 코르반 서원이란 재산을 하느님께 바쳤으니 속인은 사용할 수 없다는 규정인데(미슈나』, 느다림 8,7), 어떤 이들이 종교를 빙자하여 인륜을 짓밟는 짓거리를 했던 것이다. 예수는 그들에게 힐난을 퍼붓는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섬기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이사 29,13) 또한, 예수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기적을 베풀었으나 미동도 않으며 깨우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도시를 두고 꾸짖는 말씀을 한다.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에 오를 것 같으냐? 오히려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누가 10,16)
예수가 그의 생애 마지막에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처음으로 한 일은 성전을 정화시킨 행동이었다(마가 11,15-19). 당시 성전에는 제물로 쓰이는 갖가지 동물들을 파는 상인들과 환전상들이 가득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들은 원래 순례객들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하여 좌판을 벌린 자들이었는데, 고향에서부터 동물을 데리고 와야 하는 엄청난 불편을 덜어주고 외국에서 온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제물을 살 수 있도록 돈을 바꿔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하지만 이렇게 거래가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자연히 상인들은 이문을 남겼을 것이고, 성전 내에서도 좋은 장사 목을 차지하려면 대제관들과 상인들 사이에 은밀한 접촉이 있었으리라는 점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식으로 보면 뒤로 ‘떡값’이 오갔을 것이라는 말이다. 예수는 이런 작태를 두고 좌판과 의자를 뒤엎으며 상인들에게 저주의 말을 퍼부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하리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너희는 이 집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구나!”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예수에게 단골로 공격을 받은 자들로는 율사들과 바리사이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복음서작가 마태는 자신의 복음서에 예수의 언행을 집약문 형식으로 모아놓기를 즐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편집 경향대로 예수가 바리사이와 율사들을 꾸짖는 말씀들만 수집해서 한 자리에 실었는데, 흔히 ‘심판설교’(23장)라 부른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 같은 위선자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 심판설교에 이 말씀은 무려 7 번이나 나온다. 그들은 비록 겉은 깨끗해 보이지만 속에는 착취와 탐욕과 위선과 불법과 “죽은 사람의 뼈와 썩은 것이 가득 차 있는”(27절) 자들에 불과하다. 그들은 지옥으로 떨어지는 형벌을 피할 수 없으며, 아벨로부터 즈가리아에 이르기까지 흘린 모든 무죄한 피 값을 치를 것이다. 마침내 “이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이 이 세대에 내리고야 말 것이다.”(36절) 한 결 같이 심장을 얼어붙게 만드는 저주의 말씀들이다.
‘화가 있어라’, ‘저주를 받아라’, ‘너희는 불행하다’,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모든 무죄한 이들의 피 값이 너희들에게 돌아갈 것이다.’ 도대체 어떤 이유에서 예수는 이렇게 모진 저주의 말씀을 내뱉었을까? 세리, 창녀 등의 소외 계층을 연민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와는 판이하게 다른 입장을 읽을 수 있다. ‘일곱 번에 일흔을 곱한 숫자만큼 용서해 주어라’는 그분의 관대함은 어디로 사라졌을까? 신앙이라는 거름 장치 없이 그분의 말씀을 듣는다면 예수는 영락없이 이중적인 태도를 가진 인물로 간주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