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히브리서 13 : 1∼10)
설교문
기독교회를 상징하는 것은 예배당이요, 신앙을 표현하는 핵심은 예배입니다. 그런데 등잔 밑이 어둡다는 격으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때로 진정한 예배가 무엇인가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4장 23절-24절에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神靈)과 진정(眞情)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예배는 형식보다도 예배하는 이의 마음 자세와 진정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 선생은 로마서 12장 1-2절에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참 예배를 구약시대의 제사법과 대조를 시켜서 마음과 진정뿐만 아니라 몸과 생활도, 아울러 제사 드리는 제물도 바치는 것이 참 예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히브리서에는 예배와 구약의 제사와 그 의미를 일치시키면서 제사의 가장 핵심은 제물을 바치는 데 있음을 말했습니다.
구약 레위기 1장 이하에 보면 여러 가지 제사법이 있습니다. 그 제사의 종류는 대략 화목제가 있고, 곡식으로 드리는 감사제가 있고, 죄를 속하기 위한 속죄제가 있고, 성직에 대하여나 성물에 대한 범죄의 경우 속건제를 드리는 것이 있으며, 제사의 내용은 개인적 제사, 가정적으로 또 이스라엘 온 민족적으로 드리는 제사의 규례가 각각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제사에서는 제물을 바치는데, 이 제물의 종류는 소제의 경우는 밀가루에 기름을 섞어 만든 떡과 찧은 곡식, 첫 이삭 등이며, 화목제나 속죄제, 속건제의 경우 짐승을 잡아 드리는 번제인데 소, 암수 어린 양, 산비둘기 혹은 집비둘기 새끼, 염소, 수송아지 등을 잡아 제물로 드립니다. 속죄제가 이 중에서도 가장 큰 제사인데 대제사장이 양이나 염소, 혹은 수송아지를 제물로 삼아 그 짐승을 성전 제단 앞 단 위에서 잡아 그 피를 제단 모퉁이에 바르고, 그 다음 보통 제사장이나 거기에 봉사하는 성직자들이 나누어 먹는 것인데, 여기서 그 몸뚱이는 문밖에 가지고 나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불살라 완전히 재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불살라 그 제물을 완전히 소각하는 제사를 화제라고 하는데, 레위기 2장에 보면 "이는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 했습니다.
우리가 흔히 향기로운 제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을 하는데 그것은 무슨 향기로운 냄새를 위해 향수를 부어 드린다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끊어 피를 쏟아 바치는 곳에, 그 몸을 영문 밖에 가지고 나가 불살라서 바치는 그 연기가 여호와의 받으실 향기라는 사실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이 속죄제의 제물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며 예수님은 자기를 단번(單番)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 날에 나타나셨고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다고 9장 26-28절에 써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계속하여 이러한 예수님의 제물 되심이 바로 예수님을 믿고 나아가는 우리 신자들의 자세와 일체화되는 것을 말하였으며, 우리가 예수의 제자가 되고, 신자가 되고, 기독교인이 되고, 예배하는 이 일은 바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께 제사 드리는 그 일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예배의 중심은 구약의 제사가 예수님의 죽으심에서 일치하고 또 우리의 예배도 거기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참 예배의 첫 단계로서 상징 지은 어린 양이나 송아지를 제단 앞에 끌어다 단 위에서 그를 잡아 생명을 끊고, 그 피를 제단에 부은 사실을 생각해 봅시다.
어린 양을 죽여서 제단 앞으로 간다는 것은 아마도 순종의 뜻이 큰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제단 앞에 나온 제물은 그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는 표적이 바로 양을 잡아 그 피를 바르는 의식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올바른 예배는 이 예배당에 나와서 하나님의 제단 앞에서 자기 자신을, 자기 생명을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이 예배의 초점이 되는 것입니다. 제물은 말이 없고 이유가 없으며, 제물은 죽어야 제물이 되듯이 자기 자신이 전적으로 하나님 앞에 순종하여 죽어야만 제물이 됩니다. 제물이 살아서 제단 앞에서 펄펄 뛴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이 제단에 예수 그리스도의 목숨이 바쳐져 있는 데, 그 위에 우리의 목숨도 함께 얹어서 "나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께 몸을 바치겠습니다" 하는 고백과 결단을 가져야 할 것을 말합니다. 헌신의 결단이 행하여지지 않는 예배는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되지 못한다는 것이고, 신령과 진정의 예배가 아니면 아버지께서 기뻐 받으시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 성전 중심에, 언제 어디서나 십자가(十字架)를 세워 놓고 예배드리는 그 하나는 우리의 예배는 우리의 생명을 이 시간 다시 한번 하나님께 드리는 고백으로 하는 까닭입니다. 우리는 이 예배에서 진정으로 "우리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완전히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하는 진정한 봉헌이 이루어져야만 오늘 바른 예배 의식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바치는 제물에는 속죄제의 경우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이 제물의 피로 죄를 씻는 의미가 있고, 둘째는 죄 값을 피로써 갚는 의미가 있고, 셋째는 죄 있는 사람을 대신하여 죽어주는 대속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우리가 이 예배에서 헌신을 서약할 때, 우리의 죄가 씻어지고 죄로 말미암아 빚진 우리의 죄 값이 청산 된다 함이며, 내가 내 죄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죄까지도 대신으로 지고 나선다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의미가 더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제단 앞에 내 생명을 부어 바치는 이 예배에서 내 생명의 헌신은 바로 나 아닌 다른 사람들, 그 중에서도 죄 지은 사람들을 대신하여 내 생명을 바치기로 결의하고 나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예배는 자기만의 예배가 아니라 이 세상과 다른 사람들, 특히 죄악 속에서 건짐을 받아야 할 그 사람들과 연결된 자기 헌신이 되어야 올바른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자기 희생, 즉 자기 생명을 버리는 일을 나를 죽인다, 나를 십자가에 못 박는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다, 내 욕심과 정까지도 함께 십자가에 못 박는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희생, 자기의 인간적인 모든 것을 극기하고 바치는 이 예배는 그것으로 끝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생명의 상징인 제물의 피를 제단 모퉁이에 바르고 난 다음, 그 몸뚱이는 문 밖으로 가지고 나아가서 완전히 불사른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사실을 예수님이 성전에서 사형 판결을 받고, 그 처형은 예루살렘 성문 밖 골고다 언덕에서 당하셨던 사실과 연결을 지었습니다. 또 그 사실을 우리 신도들과 연결을 지어서, 우리도 우리의 생명을 이 성전 안에서 하나님의 제물로서 바침과 동시에, 이 몸은 이 성전 안에서가 아니라 저 해골 골짜기와 그 언덕, 죽음의 망령들이 신음하고 있는 이 비극적 현실 속에 들어가서 거기서 그들을 건지기 위해 자기 몸 전부를 재가 되도록 살라 바치는 희생적 생활이 있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인들의 대부분은 예배당 안, 제단 앞에서 드리는 제사만 예배의 전부인 줄 알고 있지만, 저 성문 밖으로 나아가서 이 몸을 불살라 바치는 생활, 그 적극적 예배는 결국 예배와 관계를 지어 생각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옛날 제사법이 어쩌면 이렇게도 현실 생활과 밀접하게 관련된 의식으로 표현되었는지 그저 놀라울 정도입니다. 구약에서 제사 종교의 전통은 늘 의식주의적(儀式主義的)이라 해서 예언자 종교의 비판과 규탄의 대상이 된 때도 있었으나, 그러나 실상 깊이 들어가 보면 예배의 의식이란 이처럼 놀라운 내용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며, 다만 우리는 그것을 잘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레위기에 보면 제물을 영문 밖에서 불사르는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기뻐하시는 향기가 된다 하셨습니다. 이것을 알았기 때문에 바울은 로마서 12장에, "너희 몸으로 산 제사를 드리라.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라고 하였습니다. 향기 나는 예배는 이 자리에서 드리는 예배이기보다도 이 세상 속에서,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을 불살라 바치는 희생과 봉사의 생활, 그것이 될 때에 그것이 향기 나는 예배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홍콩에 있는 모 교회는 강대 뒷면을 그대로 유리를 끼워 예배를 드리는 교인들이 바로 본토에서 자유를 찾아 피난을 와서 판잣집 속에 살아가는 그 모습을 유리창에 그려진 십자가를 통하여 바라보면서 예배를 드리도록 되어 있다고 합니다.
교회는 성스러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드리는 참 예배는 교회 밖에 있는 골고다의 언덕과 직결된 예배가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 참 예배, 참 제사의 근본 뜻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로 나아가자고 했습니다. 영문 밖으로 그에게로 나아가자! 예수님은 지금 영문 밖, 성전 밖에서 이 사회 밑바닥 죄악의 물결 속에서 죽어 가는 심령들을 구원하려고 저들 속에서 그 몸을 불사르고 계시니, 그 문으로 나아가자고 외쳤습니다. 우리는 여기에 영구한 도성이 없고, 즉 이 지상의 교회당이 우리가 영구불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참 예배, 즉 우리의 몸을 영문 밖에서 불사르는 제사는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는 것과, 그 이름을 증거하는 것과,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주는 봉사의 생활인데 이러한 제사만을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했습니다.
희생적 봉사가 동반되지 아니하는 예배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고 하나님도 기뻐 받으시지 아니하십니다. 오늘날 한국과 서울에도 많은 교회가 세워져 있고 교회마다 많은 예배를 드리고 있으나 정말 향기 나고,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참 예배는 몇 교회에서나, 몇 사람이나 드리고 있을까를 생각해 봅니다.
우리는 앞으로 이 교회와 우리 교우들이 참 예배가 무엇임을 보여주고,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의 향기로 이 도시를 시원케 할, 하나님이 정말 기꺼이 받으실 참 예배를 드리는 교회, 참 예배를 드리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