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60)

개혁교회의 확장




제6장 개혁교회의 확장

1. 네덜란드(홀랜드) 개혁교회

네덜란드(Netherland)의 북부에는 땃치(Dutch) 곧 홀랜드 부족이 살고 있었고 남부 사람들은 프랑스 말을 사용하고 있었다. 이 나라는 땅이 해면보다 낮았다. 신성로마제국 황제 칼 5세는 이 두 지역을 하나로 통일하여 강력한 왕국을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네덜란드 국민은 신성로마제국으로부터 독립하려는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고 이러한 때에 종교개혁운동이 이 나라에도 일기 시작하여 정치적 독립과 종교개혁 운동이 병행해 가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중세 말기에 일어난 인문주의 운동의 한 저명한 학자 에라스무스(Erasmus)가 태어난 나라여서 그의 영향으로 인문주의 학문의 새 운동이 일고 있었다. 중세 말에 일어난 「현대경건」(Devotio Moderna) 운동 역시 네덜란드의 어거스틴 수도원의 「공동생활의 형제단」(Brethren of the Common Life) 운동에서 시작되었고, 토마스 아 켐피스(Thomas à Kempis)가 쓴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가 일찍부터 발행되어 새 경건운동이 일어나 루터의 종교개혁운동과 동반자가 되었던 것이다.

1513년에서 1531년 사이에 신구약전서와 신약성서가 땃치어와 프랑스어와 플레밍(Fleming)어로 번역된 것이 7~8종 출판되어 보급되고 있었고 종교개혁 서적들도 많이 번역되어 있었다. 칼 5세는 네덜란드에 전파되어 있던 루터교와 재세례파 교회를 폐쇄하고 로마가톨릭을 국교로 삼으려 했다. 그리하여 그 두 교파가 박해 받아 순교자도 나오게 됐다. 그러나 칼 5세의 대리통치자였던 그의 숙부와 자매들은 프로테스탄트에 대하여 관용적이었다.

제 16세기 말에 네덜란드에 칼빈주의 교회의 교세가 루터교회의 교세를 앞지르게 되었고, 제네바에서 공부한 사람이 귀국하여 칼빈주의 교회를 위하여 신앙고백을 만들어서 홀랜드 개혁교회를 견고케 하고 발전시켜 1571년에 홀랜드 개혁교회의 첫 노회가 소집되었다.

종교개혁운동이 중세적인 정교일체 제도를 폐지하고 군주들의 권력의 독립과 자주를 장려한 것은 로마가톨릭교회의 교권으로부터 독립하여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것이어서, 네덜란드에서도 스페인인 칼 5세와 그의 후계자 필립 2세의 지배를 배척하고 독립을 쟁취하려는 정치투쟁이 전개되었다. 이 투쟁은 종교개혁투쟁이기도 하였다. 네덜란드인들은 스페인의 군대를 네덜란드에서 철군하고 종교재판을 폐기할 것을 요구했다. 개혁파 교세의 확장이 급진하였다. 필립 2세가 스페인 군대력으로 독립운동을 저지하려 했을 때 홀랜드의 왕자 윌리암 오랜지(William of Orange)가 군대를 일으켜서 스페인 군대를 물리쳤다. 그는 프로테스탄트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나 가톨릭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1573년에 개혁교회 교인이 되었다.

이 당시 스페인은 해군력이 강하였고 항해술도 뛰어나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 라틴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개척하여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식민국가가 되었다. 스페인의 해군함대 아르마다(Armada)는 무적함대였다. 그런데 이 무적함대가 1588년 영국과의 해전에서 대패한 후 영국의 해군이 최강해군력이 되었다. 스페인 함대의 패배 후 네덜란드에서의 스페인 군사력을 약화돼 갔다. 그리고 아시아와 아메리카 대륙에서 스페인이 영국과의 식민전쟁에서 패배를 당해 갔다. 그리고 오랜지 공은 종교관용정책을 시행하여 북쪽의 홀랜드 프로테스탄트 교회와 남쪽의 가톨릭교회의 연맹을 실현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1584년에 암살당했다. 그리하여 그는 네덜란드의 완전독립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

네덜란드에서 개혁파교회가 장로교 제도를 만들고 주류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되어 노회를 여러 번 열어 네덜란드 남북 두 지방의 연합을 모색하였다. 그리하여 재세례파 교인과 가톨릭 교인들에게는 거주의 자유와 고용의 길을 주되 공적예배의 자유는 주지 않았다. 정치적 투쟁을 많이 겪고 홀랜드 개혁교회는 교리 논쟁을 종식하기 위하여 노력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칼빈주의의 주요한 교리인 예정설이 주요 논제가 되었다. 이 논쟁은 네덜란드의 개혁교회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고 다른 나라에서도 칼빈주의 신학의 논쟁거리가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네덜란드 개혁교회가 개최한 도르트(Dort) 노회가 1618년 11월 13일에 소집되었을 때 영국, 스위스 및 독일에서도 개혁교회 대표들이 참석하였다.

이때 보수주의를 지지한 정당인 국민당과 관용파인 리몬스트란트(Remonstrant) 사이의 논쟁이 전개되어 승부를 결정할 것이었다. 보수파 국민당 대표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으시기 이전에(만세 이전에)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받을 사람을 각각 구별하여 예정하셨다고 주장하였고, 관용파는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이 구원받을 사람과 버림받을 사람을 예정하셨다고 주장하였다. 전자를 타락 전 예정설이라 하고, 후자를 타락 후 예정설이라고 한다. 이 회의는 이듬해 5월 13일에 폐회되었다. 이 노회에서 논쟁 끝에 보수파가 승리하고 관용파의 유고 그로티우스(Hugo Grotius)는 투옥되었다가 도망쳤고 다른 한 주도적이었던 사람은 이 회의 직후에 사형을 받았다.

이 도르트 노회에서 칼빈주의 신학의 주요 다섯 가지 항목(The Five Points of Calvinism)이 선포되었다. 이것은 극단적인 보수주의 칼빈신학으로 인정받고 있고, 반대편인 관용파에서는 합리주의 칼빈주의 신학자였던 레이덴 대학의 교수 야곱 아르미니우스(Arminius)가 리몬스트란트의 합리주의 신학을 편들어서 리몬스트란트의 칼빈주의가 아르미니우스주의(Arminianism)라고 불리게 되었다. 아르미니우스는 제네바의 칼빈의 후계자 베자(Beza)의 제자였다. 그러므로 그의 합리주의 칼빈주의는 베자의 칼빈주의 신학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칼빈주의 다섯 가지 신조의 보수와 합리 양편의 주장을 비교하면 아래와 같다.

1) 인간의 타락
보수파 : 전적(혹은 완전한) 타락이어서 인간은 자기의 업적으로 구원을 받거나 선행을 할 수 없다.
합리파 : 인간이 타락했지만 자유의지가 살아남았으므로 하나님의 인간구원 사업에 협력할 수 있다.

2) 예정설
보수파 : 인간의 타락 이전에 하나님이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으로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받을 사람을 예정하셨다.
합리파 : 하나님이 미리 예지하시고 인간의 타락을 허용하셨다. 그리고 예정될 사람만을 선택하시고 구원하셨다.

3) 제한된 은혜
보수파 : 하나님이 구원하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사람에게만 은혜를 주신다.
합리파 : 그리스도는 자기를 믿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으셨다.(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

4) 거절할 수 없는 은혜
보수파 :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이 거절할 수 없게 역사한다.
합리파 : 사람이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할 수 있다.

5) 보전설
보수파 : 하나님은 예정하신 사람을 마지막까지 보전하셔서 구원하신다.
합리파 : 사람은 받은 은혜를 상실할 수 있다.

네덜란드 국회는 보수파 칼빈주의 교리를 체계화한 개혁교회를 인정하고 아르미니우스주의를 박해하고 이단자를 처형하는 종교재판을 개설하였다. 홀랜드(땃치) 개혁교회는 하나님이 인간의 타락 이전에 예지와는 상관 없이 구원받을 사람과 멸망받을 사람을 이중으로 예정하셨다는 예정설을 칼빈주의의 대표적인 교리로 삼고 이것을 정치적인 목적으로도 이용하여 남아프리카 식민지에서 흑인을 예정되지 못한 인종으로 치부하고 차별하고 학대하는 정책을 썼다. 칼빈주의 합리파의 아르미니우스주의 신학은 영국성공회와 감리교회의 신학에 반영되어서 개혁교회와 같은 신학논쟁과 정죄와 교파 분열이 없었다.

2. 프랑스 개혁교회

프랑스에서는 종교개혁운동이 극히 힘들었다. 프랑스의 왕 프란시스(Francis) 1세의 여동생 마가레트(Margaret, 1491~1549)가 종교개혁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개혁운동 하는 신부들과 수도사들을 도와주었다. 그녀는 나바레(Navarre) 왕후가 되었고 그의 아들 헨리가 나중에 프랑스에서 프로테스탄트 군주로서 개혁운동 투사로 활동하였다. 왕 프란시스 1세는 처음에는 프로테스탄트를 동정하는 태도를 가졌다가 유럽의 국제관계를 고려해서 가톨릭교회를 계속 지지하였다. 칼빈의 저서 「기독교 강요」의 서문은 프란시스 1세에게 그 책을 증정하는 뜻으로 쓴 편지였다.

프랑스에서 가톨릭교회 신학과 신앙의 본거지는 파리 대학 안에 있던 솔본 대학이었고 따라서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가장 강력한 적진이었다. 솔본 대학의 교수회는 칼빈의 「기독교 강요」에서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위배된다고 생각한 것들을 골라내어 반박하고, 프로테스탄트 서적에 대한 금지목록을 만들어 금지서적을 읽는 사람은 처벌받게 하였다. 루터, 칼빈, 쯔빙글리를 비롯하여 멜랑히톤의 책들이 보급되어 있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순교자들이 많았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제 3장 칼빈의 종교개혁 편에 진술되어 있다. 칼빈은 자기 조국의 교회개혁을 위하여 음으로 양으로 애를 많이 썼다. 박해를 피해 프랑스로부터 온 사람들을 도와주고 그들에게 종교개혁운동을 교육해서 프랑스로 돌아가게 하기도 하였고, 프랑스에 있던 개혁운동원들을 격려하고 지도하였다. 그는 제네바에서 150여명의 프랑스인 개혁운동원을 1555년에서 1556년 1년 사이에 훈련해서 본국으로 돌아가 개혁운동을 하게 하였다.

국왕 프란시스 2세의 통치 초기(1547~1550)에 프랑스 인구 6분의 1이 프로테스탄트 신도였다. 칼빈이 죽기 5년 전(1559)에 파리에서 회의가 소집되었고 칼빈이 작성한 신앙고백이 통과되었다. 그것은 그의 저서 「기독교 강요」의 요약과도 같은 것이었다. 프랑스의 이 개혁교회 조직은 스코트랜드와 홀랜드와 후대에 와서는 미국의 개혁교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프랑스의 칼빈주의 개혁교회는 1560년 이후로 위그노(Huguenot)라는 별명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도시에서 성세를 보였고 상공인들과 농민들 사이에서 그 수가 늘어났으며 귀족들 가운데도 신자가 있었다. 프란시스 2세 왕이 죽고(1559) 10살의 어린 왕 챨스(Charles) 9세가 왕이 된 후 가톨릭 세력과 프로테스탄트 세력 사이의 화해를 위하여 노력했지만 실패하였고, 1562년부터 프랑스는 8차례 종교전쟁이 일어나서 1594년까지 싸웠다.

이 내란 중에 프로테스탄트 군주인 나바레의 왕 헨리의 결혼식이 1572년 8월 성 바돌로매 축제일에 파리에서 열려서 프로테스탄트 귀족들과 교인들 2,000여명이 밤에 모여서 축하연을 즐기고 있었을 때, 가톨릭 군인들이 급습하여 그들을 다 학살하고 여세를 몰아 그 축제 기간에 프로테스탄트 신도를 2만명 가까이 죽였다. 이 대학살 사건은 단순히 신앙문제만이 원인이 아니고 귀족들과 왕족들의 가문들 사이의 적대심과 정치세력의 경쟁심 때문이었다. 이 학살은 프랑스 역사의 한 치욕이 되었고 국제적인 비난거리가 되었다.

이러한 갈등과 내란을 겪고 수년 후 헨리 4세가 왕이 되었다. 그는 국가 종교를 가톨릭으로 결정하고 「낭트칙령」(Edict of Nante)을 1598년에 발표하여 위그노들의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몇 지정된 도시에서 예배의 자유를 갖도록 하되 프랑스 내 행정구역들 중 두 지역에서만 허용되었다. 파리시내에서는 공중예배를 드릴 수 없고 다만 사무실과 같은 제한된 공간에서 사적인 예배만 드릴 수 있도록 했다. 그 대신 위그노 프로테스탄트들이 다른 시민들과 꼭 같은 시민권을 가지고 공무원 활동이나 교육 활동이나 그 밖의 모든 시민적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위그노들은 나중에 프랑스 내 200개 도시에서 자주권을 행사하였다.

낭트칙령으로 평화를 유지해 가는 동안에도 이따금 마찰이 생겼고, 특히 가톨릭의 예수회 수도단이 위그노 자치 지역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하겠다 하여 충돌이 생겼다. 위그노들은 프랑스 인구의 9분의 1 이상이 되어본 적이 없다.

이따금 내란이 일어나면서 위그노 신도들이 새 지역을 점령하기도 했으나 루이(Louis) 14세 왕이 1681년에 위그노의 교회당을 파괴하고 위그노 신도들의 자녀들을 부모로부터 떼어내 가톨릭 신자가 되게 만들고 1685년에 낭트칙령을 완전히 폐지하였다. 그리고 위그노들을 박해하기 시작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홀랜드, 영국, 아일랜드와 아메리카 대륙의 영국 식민지로 피난했다. 위그노들이 국외로 떠남으로써 프랑스는 많은 인재들을 잃었다. 각종 기술인들과 실업인들과 예술인들로 구성된 중산층을 잃게 되어 국가적 손실이 컸다.

박해를 피해 프랑스를 떠난 위그노들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열렬한 프로테스탄트 설교자들이 되어서 선교하였다. 그들의 나그네 생활은 고단하였고 더러는 신앙이 과열한 열광주의자들이 되어 예언도 하고 이상한 현상을 보이기도 했다.

3. 스코트랜드의 종교개혁운동

스코트랜드(Scotland)는 영국과 같은 강력한 군주통치자 없이 지방귀족들이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왕실은 프랑스와 밀접한 정치적 유대를 가지고 로마가톨릭교회를 신봉하였다. 그리고 프랑스 군대가 스코트랜드에 주둔하여 스코트랜드의 국방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가까운 나라 영국과 불화하게 되었다.

스코트랜드는 작고 가난한 나라였고 교육과 문화 수준이 미개하였고 귀족들은 음주와 축첩과 무절제한 생활을 하였고 교회 신부들은 성직매매를 일삼았다. 감독이 없는 교구가 많았고 감독이 있는 교구들은 그 지역의 정치싸움에 휩쓸려 혼란스러웠고, 교회와 관계된 직무에는 귀족들의 자제들이 들어앉아서 돈벌이를 하였다. 국민들은 대대로 원수였던 영국과의 관계를 호전시키기를 바라는 사람들과 프랑스의 관계를 가지고 영국과 대립하기를 바라는 사람들로 나뉘어 있었다.

스코트랜드에 종교개혁 사상이 소개된 것은 영국의 위클리프(Wyclif)의 개혁운동을 추종한 롤라드(Lollard)들을 통해서였다. 이들은 농민과 상공업에 종사한 서민층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루터의 책들과 팜플렛들이 더러 소개되어서 교회 설교자들이 루터의 개혁사상을 보급시켰다. 1528년에 패트릭 하밀톤(Patrick Hamilton) 신부가 화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그는 파리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루터가 개혁운동 하던 독일의 비텐베르크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는데 대주교가 성 안드류(St. Andrew) 대학에서 그의 견해의 발표를 듣고 이단으로 단죄하였다.

수년 후 스코트랜드 정부는 이단척결의 공문을 발표하고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처형하였는데 1546년에는 죠지 위샤트(George Wishart)가 처형되었다. 그를 단죄하여 사형에 처한 책임자였던 추기경 비톤(Beaton)이 암살되었는데, 그는 친불 정치관계의 주도자였다. 그를 죽인 사람들이 해변에서 영국 구조부대가 올 것을 기다렸는데 프랑스 해병대에 체포되고 말았다.

스코트랜드의 종교개혁을 성취한 사람은 죤 낙스(John Knox, 1513~1572)였다. 낙스는 1530년에 신부로 안수 받았고, 죠지 위샤트의 설교를 듣고 그를 뒤따르게 되었다. 위샤트가 처형되고 추기경 비톤이 살해된 후 낙스는 학생들과 함께 성 안드류 시의 성곽에서 종교개혁을 위한 설교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체포되어 프랑스 해군함대에 끌려가 19개월 동안 죄수 생활을 하고 석방된 후 영국으로 도망쳤다(1549). 이때 영국에서는 헨리 8세의 어린 아들 에드워드(Edward) 6세가 왕이 되어 프로테스탄트 섭정들의 도움으로 종교개혁이 추진 중이었다. 낙스는 그곳에서 왕 에드워드의 궁중설교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가 감독으로 임명되자 그것을 거절하고 대륙으로 건너갔다. 그는 칼빈이 있던 제네바로 가서 그의 모범적인 제자가 되었다.

낙스가 제네바에 있는 동안 스코트랜드에서는 종교개혁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때 스코트랜드의 왕 제임스(James) 5세가 죽기 수 일 전에 태어난 딸 매리(Mary)가 왕위를 계승했다. 다섯 살 되었을 때 그녀는 프랑스 왕실에 와서 자랐고 1558년에 프란시스 2세와 결혼했다. 그녀가 어렸을 동안 그의 모친 매리(Mary)가 섭정했다.

스코트랜드 국민은 섭정하는 매리도 프랑스인이고 어린 여아 매리 역시 프랑스 왕의 왕후가 되었으므로 이들이 스코트랜드를 프랑스와 합병할까 염려하였다. 어린 여왕 매리와 영국의 어린 왕 에드워드를 결혼시키려는 계획은 실패하였다. 에드워드는 9살 때 왕위에 올랐다가 병약하여 16살 때 죽었다.

낙스가 제네바에서 스코트랜드로 돌아온 1555년에서 1556년 1년 사이에 종교개혁운동이 급진하여졌고 1560년에 스코트랜드 의회는 낙스의 개혁운동을 정식으로 지지하고 그를 지도인물로 삼았다. 섭정하던 매리는 1559년에 종교개혁운동을 위한 설교를 못하게 하는 칙서를 발표하여 이때부터 스코트랜드의 종교내란이 시작되었다.

영국의 엘리자베스(Elizabeth) 여왕은 스코트랜드의 종교개혁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함대를 파견하여 프랑스 군대가 스코트랜드에 투입되지 못하게 하고 경제원조도 하였다.

결국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처럼 사태가 진전되자 1560년에 양국이 영국 에딘버러에서 회의를 열고 조약을 맺었다. 그것은 프랑스인이 스코트랜드에서 국가공무원 직업을 갖지 못할 것과, 어린 여왕 매리의 남편 프란시스 2세가 영국과의 전쟁을 일으키지 말 것과, 스코트랜드에 프랑스 군인은 120명만 주둔시킬 것 등이었다. 이 조약으로써 프랑스의 스코트랜드 지배가 사실상 끝나게 되었고, 스코트랜드의 종교개혁운동이 용이하게 되었다. 낙스와 그의 동료들의 개혁운동이 더 활기를 띄게 되어 친불 세력이 점점 꺾이고 친영 세력이 승세를 보였다.

1560년에 스코트랜드 국회는 낙스와 그 밖의 다섯 사람이 초안하여 제출한 신앙고백을 채택하였는데 그 내용은 칼빈의 신학을 따른 것이었다. 국회는 로마의 교황이 이제 스코트랜드 교회에 상관하지 말 것을 선포하고 미사를 폐기하는 결의를 통과시켰다. 그리고 낙스는 「교회지침 제 1권」(First Book of Discipline)을 만들어서 십일조 헌금의 계속과 목회자의 생활 보장과 교육과 빈민구제를 포함한 교회 재정 관리에 대한 규정을 만들었다. 그리고 교구 목사는 교인들이 선출하면 학식이 있는 사람들이 검토해서 직책을 맡기도록 하였다. 그리고 전날의 감독과 같은 직책을 두었으나 목사와 동등한 취급을 받게 하였고 순전히 교구의 사무만을 보게 하여 교회 설립과 교역자 배치를 다루게 하였다. 그리고 학교를 세워 교육을 발전시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스코트랜드의 교회는 국가로부터 완전히 독립되지 못하고 절반 의존 상태가 되었다.

1564년에 낙스가 작성한 「공동예배서」(The Book of Common Order)가 국회에서 통과되었는데 이것은 공중예배 지침서였다. 이 예배지침서가 1645년까지 사용되었다. 국회는 정식으로 가톨릭 식의 미사를 폐지하고 개혁교회 신앙고백을 채택했다.

프랑스의 왕 프란시스 2세가 1561년에 죽고 그의 왕비인 스코트랜드의 어린 매리는 과부가 되어 스코트랜드로 돌아왔다. 그녀는 가톨릭 신자로서 낙스의 강력한 적수가 될 것이었다. 그녀는 자기 궁전 예배실에서 미사를 드리면서 낙스에게 양해를 구했으나 낙스는 허락하지 않았다. 낙스의 지지자는 한동안 줄어들어 갔다. 매리는 가톨릭 신자인 자기 사촌오빠와 재혼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 비서관과의 불륜 관계에서 아들을 낳았고 그녀의 남편이 비서관을 죽였다. 매리는 다른 한 귀족 남성과 다시 결혼한 후 본래의 남편이 암살되도록 획책했다는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녀는 영국으로 도피하여 엘리자베스 여왕의 보호 아래 유폐되어 있었다. 그러나 매리가 엘리자베스 여왕을 암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의심을 받게 되어 엘리자베스 여왕이 매리를 사형했다.

스코트랜드에서는 매리와 그의 비서관 사이에 태어난 제임스를 국왕으로 세웠는데 그가 장차 엘리자베스 여왕을 이을 영국 왕 제임스 1세가 될 것이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독신이었다. 스코트랜드의 여왕 매리가 영국에서 처형된 후 그의 어린 아들이 스코트랜드의 왕 제임스 6세가 되었을 때 낙스는 그의 대관식에서 설교하였다. 제임스 6세는 종교개혁을 받아들였다.

낙스는 1572년 11월에 자기의 후계자 앤드류 멜빌(Andrew Melville, 1545~1622)을 취임시킨 후 그 달 24일에 사망하였다. 멜빌은 훌륭한 신학자였고 제네바의 베자의 친구이며 글라스코 대학의 교수였다. 멜빌은 스코트랜드 교회를 철저하게 장로교제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1577년에 국회가 채택한 「제2 지침서」는 목사(pastors)와 감독(bishops)과 교역자(ministers)를 평등한 교역자로 규정하고 노회가 과거의 감독이 수행하던 것과 같은 직책을 수행하는 교회법정이 되게 하였다. 그리고 시편을 가사로 하는 찬송가를 많이 지어 부르게 하였다.

제임스 1세 영국 왕은 스코트랜드의 왕이기도 하였다. 그는 스코트랜드도 영국 교회와 같이 감독제도가 되게 하려고 멜빌과 충돌하게 되었고 그 결과 멜빌이 유배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제임스는 스코트랜드의 노회의 기능이 유지되게 하였다. 그는 네덜란드의 도르트 노회에 대표를 보내면서 스코트랜드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하지 말게 하였다. 제임스 1세의 아들 촬스(Charles) 1세도 스코트랜드 교회를 영국 교회처럼 감독제도가 되게 하고 영국교회의 예배지침서를 채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스코트랜드 국회는 촬스 1세에게 거세게 저항하였다. 이때 영국에서는 청교도혁명이 일어나서 촬스 1세의 관군이 패배하고 영국이 40년 동안 청교도의 통치 아래 있게 되고, 영국성공회의 국교 제도가 폐기되고 촬스 1세는 청교도에 의해 처형됐다. 이때 청교도들이 만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스코트랜드 국회가 수용하여 장로교 제도를 확립했다.

그런데 촬스 2세가 영국의 왕조를 재건하고 영국성공회 제도도 부활시키고 그것을 스코트랜드 교회에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스코트랜드에서는 다시 종교전쟁이 일어났다. 이때 스코트랜드의 강력한 장로교제도 지지 단체였던 「계약론자」(Covenanters)들이 촬스의 군대와 대결하여 싸웠다. 촬스는 영국에서 로마가톨릭교회를 관용하는 정책을 쓰려다 영국 국민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혔고 스코트랜드와 영국이 합세하여 촬스를 추방하였다. 그리고 네덜란드(홀랜드)의 왕 윌리엄과 왕후 매리를 영국의 왕으로 옹립하였는데 이것이 1689년의 소위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이다. 1690년에 스코트랜드 교회가 장로교제도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회복되고 1653년에 장로교 총회가 오랜만에 소집되었다.

스코트랜드 장로교회가 스코트랜드의 국교가 되었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보존하여 스코트랜드와 미국의 장로교회가 세계의 많은 나라로 확산되어 갔다. 영국은 성공회를 국교로서 확립하였고 장로교회는 소교파로 남게 되었고, 웨일즈와 북아일랜드에서 장로교회가 번성해 갔다. 이 지역 교회 대표들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만드는 작업에 동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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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 사람에게 소외 받은 욥은 멜랑콜리커였다"

욥이 슬픔과 우울을 포괄하는 개념인 멜랑콜리아의 덫에 걸렸고 욥기는 멜랑콜리아를 극복하는 과정을 담고 있는 지혜서라는 주장이 제기됐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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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성장 이끌었던 번영신학, 이제 힘을 잃었다"

이원규 감신대 은퇴교수가 '기독교사상' 1월호에 기고한 '빨간불이 켜진 한국교회'란 제목의 글에서 한국교회의 미래가 어둡다고 전망하며 그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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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적 통찰이 없는 신념은 맹신이 될 수 있지만..."

장공 김재준의 예레미야 해석을 중심으로 예언자의 시심(詩心) 발현과 명징(明徵)한 현실 인식에 대한 연구한 논문이 발표됐습니다. 김윤식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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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현존, '경계의 신학'을 '경계 너머의 신학'으로 끌어올려"

폴 틸리히의 성령론에 대한 연구논문이 발표됐습니다. 한국조직신학논총 제73집(2023년 12월)에 발표된 '폴 틸리히의 성령론: 경계의 신학에서의 "영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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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희성은 예수쟁이...그의 학문적 정체성은 종교신학"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가 고 길희성 박사를 추모하는 글을 '기독교사상' 최신호에 기고했습니다. '길희성 종교신학의 공헌과 과제'라는 제목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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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 왕은 약자들이나 쓰는 속임수를 왜 썼을까?"

아이의 진짜 어머니와 가짜 어머니를 가려낸 솔로몬의 재판은 그의 지혜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발간된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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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라는 개념이 인간에 의해 왜곡되고 짓밟혀왔다"

한신대 전철 교수가 「신학사상」 203집(2023 겨울호)에 '지구의 신학과 자연의 신학'이란 제목의 연구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논문에서 전 교수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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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노동자 환대의 윤리적 전략 "데리다의 환대"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하 기윤실)이 12일 오후 안암로 소재 기윤실 2층에서 '이주노동자의 삶과 교회의 역할'이란 주제로 '좋은사회포럼'을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