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한복음 16:12-14절
어느 마트가 5천 원짜리 치킨에 ‘통큰 치킨’이라고 이름을 붙이고 홍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영세 자영업자의 생존권을 위협하고 골목 상권을 죽인다는 이유로 일주일 만에 판매를 중단하기로 했지만 ‘통큰 갈비,’ ‘통큰 두부’ 등으로 불리는 상품들이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마케팅은 마트에 일단 발을 들여 놓게 만드는 미끼 상품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며 적지 않은 비난도 받고 있지만 ‘통큰’ 상품들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통큰’ 효과를 톡톡히 본 그 마트는 ‘통큰’이라는 브랜드를 독점하기 위해 상표 출원을 신청했고, ‘통큰’에 이어 ‘손큰’과 ‘꽉찬’에 대해서도 특허청에 상표를 출원한 상태라고 합니다. 크게 베푼다는 뜻을 가진 ‘통큰’이라는 단어가 주는 어감은 참 좋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이 이익을 위한 마케팅이고, 경쟁을 하다 보면 다른 누군가는 손해를 보게 되기 때문에 그렇게 좋은 것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한도 끝도 없이 베풀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없이, 값없이 사랑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까지 값없이 우리에게 내어 주시고, 지금도 한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베풀어 주시고, 앞으로도 영원히 하나님의 축복을 내려 주실 통큰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통큰’ 존재는 이 우주에 하나님 외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를 내려주십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진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이 성자 하나님은 옳은 것의 완전한 척도로서 진리의 근원이시고 또 진리 자체이십니다.
이 진리이신 주님께서는 모든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기기만으로부터, 사탄의 속임수로부터 우리를 능히 해방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1-32)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자유를 주십니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자유 곧 방종의 자유를 주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길을 올바르게 걸을 수 있는 자유를 주십니다.
주님은 진리를 우리에게 주십니다. 이 진리가 바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진리를 아브라함과 같은 신앙의 위인들이나 출애굽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계시 중에서도 하나님의 최고의 계시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입니다. 이 계시를 능가할 계시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거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런 최고의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진리를 계시해 주시는 데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그 원칙이 무엇인가를 알고 신앙의 삶에 적용하는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1. 하나님은 우리가 이해할 만큼만 계시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알고 있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많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모든 것을 한꺼번에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이 가르쳐 주신다고 제자들이 다 알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계시를 이해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그 일부분만 깨닫고 압니다. 구약 시대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 왕에게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해 주었습니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로 내가 그들을 벌하노니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삼상15:2-3)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에게 아말렉 사람들을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다 죽이고, 심지어는 짐승까지 다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이 말씀대로 하지 않았습니다. 사울 왕은 아말렉의 아각 왕을 죽이지 않았고, 양과 소 중에서 가장 좋은 것들은 남기고 가치없고 하찮은 것만 죽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울 왕을 버리시게 되었습니다. 우리들은 생각할 수 있습니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 이방 민족이라고 해도 잔인하게 다 죽이라고 하셨을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이것은 구약 시대의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그 당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그 어떤 이교의 저속한 종교에 감염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이 아말렉 종교에 빠지는 것을 미연에 막기 위해 이런 계시를 내린 것입니다.
구약 시대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여호와 하나님만을 믿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러나 신약 시대 예수께서 오셔서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시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는 이방 종교를 진멸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이방 종교인들을 사랑하면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살아계심을 보여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우리를 사랑이 풍성한 하나님의 사람으로 보도록 행동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물과 사건을 통해서 계시를 해 주시기도 하지만 성경을 통해서 계시해 주시기도 합니다. 이렇게 성경을 통해 알려주시는 계시가 가장 올바른 계시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떠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서 당신이 누구시라는 것을 가장 확실하게 알려 주십니다.
그렇다면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 후에는 하나님의 계시가 종결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계속하여 진리를 계시하시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계속하여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계시해 주십니다. 그러나 그 계시의 원칙은 예수의 말씀 속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묵상해야 합니다. 기도하며 성경을 묵상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운 뜻을 알 수 있습니다.
2. 하나님은 신앙적인 것만 계시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인간은 본래 모두가 다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처음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깨달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죄로 인해 타락하여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지는 못할망정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20)고 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천지만물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롬1:19)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죄로 인해 우리의 마음은 어두워졌고, 우상까지 만들어 섬기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신앙을 가진 사람은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인해 만물 가운데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를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인은 별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존재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를 칼빈은 신성한 감각(sensus divinitatis)이라고 하였습니다. 색을 느끼는 감각 기관이 시각이듯이 우리 신자에게는 하나님을 느끼고 알 수 있는 신성한 감각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계시를 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앙이 없는 사람에게도 당신을 알 수 있도록, 성경의 말씀대로 하자면 그들이 핑계하지 못하도록 당신을 계시하십니다.
그러나 신앙인은 그 계시를 확실하게 하나님의 계시라고 인정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만 비신앙인은 그것을 하나님의 계시라고 확연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또 하나님은 신앙적인 것만을 계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음악적인 영감, 과학적인 영감 등 세상에 꼭 필요한 영감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헨델은 ‘메시야’를 작곡했습니다. ‘메시야’ 중에 있는 ‘할렐루야’라는 찬양은 아주 유명합니다. 할렐루야를 작곡하면서 헨델은 “하늘이 열리고 최고로 장엄하신 하나님께서 그 보좌에 앉아 계시는 것을 보았다”고 고백했습니다.
그 놀라운 장면을 보면서 헨델은 할렐루야를 작곡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 곡은 불멸의 곡이 되었고 그 곡이 연주될 때 수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고 열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할렐루야는 헨델이 자신의 실력으로 작곡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작곡하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영감 속에서 나온 찬양입니다.
또 과학자나 의사는 하나님이 주신 영감으로 획기적인 치료제를 개발하기도 합니다. 우리 인간은 최선을 다해서 연구하고 탐구합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자원의 한계가 있고, 능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한계 상황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영감을 주셔서 그 문제를 획기적으로 해결하게 하십니다.
그 획기적인 해결책은 인간이 생각해 낸 것이 아닙니다. 인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인간의 사고가 한계점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께서 인간의 두뇌 속에 섬광 같이 번쩍이는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는 신앙적인 것에만 머물 수 없습니다. 창조적인 영감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고, 인간의 슬기로운 지혜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이 땅의 과학과 의술과 학문은 인간의 두뇌로만 만들어 진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하나님의 계시의 결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그 크신 계시를 인정하고 과학과 의술과 학문이 발전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계시는 예수께서 무한한 분임을 알게 합니다.
예수의 말씀을 다 아는 자는 이 땅에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 분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은 측량 할 수 없습니다. 예수의 가르침의 참 뜻을 완전히 이해하고 통달한 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의 계시는 너무 위대해서 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분의 뜻과 말씀을 계속하여 묵상하고 연구하여 그분이 알려주신 진리에 더 접근해 나가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입니다. 우리가 기도와 말씀을 통해서 예수께 가까이 가면 갈수록 그만큼 우리들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인 예수를 알게 됩니다.
우리가 예수를 더 많이 닮으면 닮을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를 더 알게 됩니다. 예수를 닮으려면 무엇보다 먼저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받아드려야 합니다. 예수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가 없습니다. 예수 당시 유대교의 최고 지도자들은 예수를 주님으로 받아드리지 않아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하나님의 계시를 완전하게 알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먼저 예수를 주님으로 믿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시를 오직 하나님의 사람에게만 완전하게 알리십니다. 지난 3월 3일에 열린 국가조찬기도회의 통성기도시간에 이 대통령 내외분이 인도자가 참석자 전체에게 무릎을 꿇고 기도하자고 했을 때 믿는 자로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누구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는 신자인 대통령도 해야만 하는 일인 데 언론들은 대통령이 무슨 큰 잘못이나 한 것처럼 야단을 떨었습니다. 물론 무릎 꿇고 통성기도를 하자고 즉흥적으로 요청한 인도자가 잘못한 점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대통령일지라도 믿는 신자인 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만 하나님의 온전한 계시가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사람에게만 최고의 계시가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인 만큼 신자는 절대적으로 그분께만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능가할 계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계시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 합당한 경배와 찬양을 돌려 드려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사는 것으로 그분께 영광 돌려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