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
우선 창 4:1-16의 내용을 개관해 보면(개역개정판의 4:1-15를 한 단위로 한 節 구분은 히브리 본문의 절 구분에 따라 4:1-16으로 고치는 것이 바람직함),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것처럼, 아담과 하와의 첫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은, 성서설화문학의 일반적 성격에서 흔히 볼 수 있듯이, 그의 성장과정에 관한 자세한 언급이 없이 ‘이미’ 제 각기 한 문화 창조의 조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즉 가인은 농경문화의 조상이 되어 있었고 아벨은 목축[유목]문화의 조상이 되어 있었습니다(그러므로 이 이야기에서 가인 가족을 아담, 하와, 가인, 아벨로만 구성된 ‘4인 가족’으로 보면, 창 4:14, 16-17과 모순/충돌하는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가인은 아벨을 죽인 후 그 곳을 떠나 ‘놋’ 땅에 살았지만[16절] 어느 사이에 아내와 동침하여 에녹을 낳고 또 즉각 ‘한 도시를 세우는 자’[17절]로 등장한다는 점도 함께 고려하여야 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가인은 ‘땅을 경작하는’(창 4:2=창 2:15!) 어엿한 직업인이었고 아벨도 또한 양떼를 거느리고 있는 역시 어엿한 직업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이미 이삭-이스마엘(창 21:8-21), ‘에서[에돔]-야곱[이스라엘](창 25:23), 므낫세-에브라임(창 48:15-22) 등등의 서로 경쟁관계에 있는 형제 사이 또는 이웃 사이의 긴장관계 속에서 인간은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인간은 하나님과는 어떤 관계를 가져야 하느냐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운명과 자유‘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참 예배의 문제는 비로 이런 문맥 속에서 판단되어야 한다고 하겠습니다.
가인은 농사짓는 사람이므로 농사지어 얻은 소출로 감사예배를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자이었으므로 양을 잡아 감사예배를 드렸습니다. 물론 아벨은 양 중에서도 맏배의 기름기를 예물로 드렸다고는 하나, 맏배의 기름을 바치는 그 정성이 더 뛰어나다는 것이 이유가 되어 하나님께서는 아벨의 예물만 받으시고 가인의 예물은 받지 않으신 것이라고 설명하려는 유형의 모든 성서해석적인 시도(cf. U. Cassuto, A Commentary on the Book of Genesis, Jerusalem:: Magnes Press, 1978, 205)는 마치 하나님께서도 예물의 좋고 나쁨, 또는 예물에 담긴 정성의 정도에 따라 그 반기심의 여부를 결정하신다고 하는 매우 괴이한 해석학적인 오류를 남긴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제물을 두고 예배 자를 탓하시는 분은 결단코 아니시기!” 때문입니다(시 50:7-15는 인간의 예물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입장이 매우 분명하게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이스라엘의 고유한 민속전통이 ‘농경생활’(husbandry)보다 ‘유목생활’(nomadism)을 더 우선시하기 때문에 양을 바치는 제물이 곡식을 바치는 제물보다 야훼를 더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이스라엘적인 편견(cf. J. Skinner, A Critical and Exegetical Commentary on Genesis, ICC, Edinburgh: T. & T. Clark, 1976, 106)도 또한 우리 본문의 의도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신정통주의적 신학성향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바, 예배를 받고 안 받고는(election or rejection) 전적으로 예배를 받으시는 분의 ‘자유의지’(God's free will)에 달려 있는 것이라는 견해(cf. G. von Rad, Genesis, London: SCM Press, 1970, 101)도 또한 역시 우리 본문의 의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본문의 의도가 ‘참 예배(올바른 제사)란 무엇인가?’에 있었다고 할 경우,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예배를 받으시는 분(하나님)의 ‘자유’만을 강조하는 것은 그 행위가 ‘신의 횡포’로 폄훼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의 본문은 ‘참 예배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고 동시에, 비록 대부분의 현대 주석가들이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제시하는 것이란 ‘주제넘게 나서는 일’(modern intrusion)이라고 하여 해석 없이 제쳐놓을 만큼 ‘난제’라고는 하더라도, 이 물음에 대한 분명한 대답을 우리의 본문은 그 본문 자체(4b-5a절) 안에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참 예배(섬김=service)가 하나님으로부터 거절 받았을 때(destiny) 예배에 실패한 그 인간이 이에 대하여 취하여야 할 자유의 결단행위(freedom)는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서까지도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으며, 더욱이, 인간의 그 자유결단이 바르게 이루어지지 못하였을 때는 과연 하나님은 어떤 태도를 취하실까 하는 문제까지도 극명하고도 자세하게 우리의 본문은 대답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우리는 창 4:4b-5a(“야훼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예배]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예배]은 받지 아니하신지라.”)의 히브리 본문(MT)이 ①“~과 그의 제물(예배)”이라는 어순 구성을 통하여 “과”(and)라는 접속사에 의하여 제물을 드리는 그 인격(아벨 그리고 가인)과 그리고 그의 제물 사이를 엄격히 그 차서(次序)를 구별(區別), 서열(序列) 시키고 있음을, 즉 제물보다 제물 드리는 자의 인격을 그의 제물 ‘앞에’! 위치시키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와 동시에 ②‘아벨’의 예배행위가, <비록 ‘아벨’은 아우이고 이 본문의 주인공은 전적으로 ‘가인’임에도 불구하고>, ‘가인’의 예배행위보다 아벨의 제물 드리는 행위가 먼저! 언급되고 있다는 사실도 또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을 보게 됩니다. 이 두 요소(①과 ②)는 분명, 본문이 말하려는 바를 분명하게 알려주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많은 현대 주석가들도 지적하고 있듯이, <야훼께서 왜 아벨의 예물은 반기시고 가인의 예물은 반기시지 않으셨는가?>라는 물음에 직접적인 증거를 제시하며 설명하기란 고대의 성서기자에게는 매우 어려웠을 것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더욱 더, 이 본문의 서술 순서가 이와 같이 구성된 데에는 그러한 성서기자(聖書記者, J)의 천재적인 신학적-문학적 의도가 작용하였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즉 가인(=이 설화의 주인공)의 제물이 기쁘게 받아들여지지 못한 것은, 분명, 그의 제물(예물, 감사 찬양의 예배형식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그의 제물 앞에(!) 언급된 그의 인격이, 즉 ‘가인과 그리고 그 제물이’라고 할 때의 그 선행(先行)하는 것인 ‘가인’이라는 그 인격이 하나님께서 기뻐할 수 없는 인격이었기 때문에 그의 제물도 또한 기쁘게 수락될 수 없었던 것 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제물 때문에 그 제물 드리는 자를 책망하시는 분은 결코 아니시기 때문입니다(cf. 시 50:8a)!!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적시하신 바가 있습니다.(마 5:23-24) 그러므로 참 예배는 예배드리는 자의 예물이 어떤 것이냐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예배드리는 자의 인격이 하나님께서 반기실 인격으로(겸손히 회개하고 화해하는 인격으로/형제와의 사이에 ‘질투의 분노’가 없는 인격으로) 준비되어 있어야 그 드리는 예물과 예배가 ‘참 예배’가 된다는 것이 우리의 본문이 우리에게 말하려는 기본 메시지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창 4:4b-5a의 그 신학적 의도는 <야훼 하나님은 제물(=예물=예배형식)보다 우선 먼저! 제물(예배) 드리는 자의 그 인격을 먼저(!) 굽어보신 후, 그가 드리는 그 제물(=예물=예배)도 반기실지 아닐지를 결정하신다는 것을 알리려는 데 있었음을 우리는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문맥상의 의미가 분명히 밝혀지고 보니, 자연히, 우리는 그 다음 단계로서, 불가피하게, 하나님 앞에 선 인간의 <운명과 자유>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논의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즉 인간은 그의 실존적 상황 속에서 자신의 행위가, 그것이 종교적 행위이든 비종교적 행위이든, 불가예측(不可豫測)으로(마치 운명적인 것처럼) 성공 또는 실패로 결과지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누군가의 제사(예배, 찬양, 기도)는 반기시지만, 그러나, 누군가의 제사(예배, 찬양, 기도)는 반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즉 예배자 자신의 실존적 삶 속에서는 그 원인규명이 확실하지 않은 ‘인생의 성공 또는 실패’를 인간은 누구나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무수히 경험하게 된다는 그것입니다. 일종, ‘운명과 자유’라는 것을 인간은 불가피하게 그의 삶 속에서 부단히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우리의 본문인 <가인 이야기>는 소박하면서도 명백한 신학적 동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가인은, 즉 자신의 예배행위가 하나님으로부터 기꺼이 반김을 받지 못한 것(실패한 것, 또는 복을 받지 못하였거나 재앙을 경험하였거나 하였음)을 안 그는 곧 그의 형제(이웃) ‘아벨’의 성공을 자신의 실패와 비교하면서 ‘질투의 분노’(=죄를 유발하는 요소, 창 4:7a,b)를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실낙원 이후의 인간이-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경험하는 실존적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질투의 분노’는 무색투명한 인간의 실존적 현실(운명적인 모습)이기는 하겠지만, 인간은 그것을 ‘다스릴’(‘먀샬’ 창 4:7 cf.창 1:26,28의 ‘radah’ )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야훼께서 인간(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에게 창조 초기부터 내내 요구하신 것이었습니다. 이 ‘다스림’(죄의 욕망을 다스리는 것)의 요구는 타락하기 이전(以前)의 첫 인간 아담에게도 처음으로(!) 던지신 요구이지만(창 2:17) 여기 실낙원의 첫 살인자인 가인에게도 또한 처음으로(!) 던지신 요구(창 4:7)이기도 한 것입니다.(John Steinbeck은 ‘너는 다스릴지니라’[히브리어 ‘팀쉘’]라는 구절을 소재로 하여 「에덴의 동쪽 East of Eden, 1952」이라는 작품을 구성해내었습니다만.) ‘다스림’의 ‘자유’(freedom)의지를 가지고 죄를 유발하는 요소인 ‘질투의 분노’라는 그 ‘운명적인 것’(destiny)을 극복해내어야 한다는 것이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근본요구였던 것입니다. ‘자유’와 ‘운명’은 그러므로 인간 창조 때부터 ‘대극의 긴장관계’(polarity)로서 인간 안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창 2:17과 4:7은 그것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성서의 내적증거(內的證據:internal evidence)입니다.
가인은 이 운명적 상황(질투의 분노)을 자신의 자유의지로서 ‘다스리지’(‘마샬’) 못하였던 것입니다. 가인은 ‘질투의 분노’(운명)를 다스리지 못하여 끝내는 아우를 ‘인적이 드문 들판으로 회유하여 내어’(고대의 다른 역본에서는 창 4:8의 서두가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우리가 들로 나가자’]라고 말하였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들로 나가자”라는 어구가 우리나라 성서 개역/개역 개정판에서는 나오지 않고 새 번역판에는 나옴.) 쳐 죽이고 말았습니다. 인간의 자유 의지의 잘못된 선택(=실수, 이탈)이 ‘죄’로 발전하였던 것입니다.(놀랍게도 히브리어로 ‘죄’를 표시하는 모든 단어들, 예컨대 ‘하타아’ ‘레샤아’ ‘페샤아’ 등이 모두 단순하게 ‘실수, 이탈, 탈선’ 등의 의미를 갖고 있음은 이를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는 운명적인 것 또는 생물학적 유전성을 가진 것이 아니라!! 인간이 그의 ‘자유’로 다스려야 할 ‘다스림’의 대상인 것이며 아담의 ‘타락’도 이 ‘다스림’의 실패의 예라고 할 수 있으며 그러므로 그 죄는 생물학적 유전성을 가진 것은 결코 아니라고 하겠습니다. ‘죄’는 다스리지 못하면 더욱 발전적으로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점점 대담하여져서 마침내는 하나님을 향하여서도 저항하도록 하는 데까지 충동적인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 속의 가인(우리 모두는 가인의 후손이다!)을 향하여 즉각 심판을 내리지는 않으셨습니다. 단지, 인간의 ‘자유의지의 결단’을 종용하시면서 그에게 “네 아우[이웃]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 cf. 창 3:9)라고 심문(판결 유예!)하셨던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심문’은, 창 3장의 경우에서와 꼭 마찬가지로(창 3:9,11,13), 판결이 아니라 판결유예(判決猶豫)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며 이것은 창조주(아버지/어머니) 하나님의 ‘긍휼’(불쌍히 여김, ‘라훔’) 속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성격의 ‘하나님의 심문과 징벌’은 우리의 본문 창 4:9-16에서도 창 3장(창 3:9,11,13)에서처럼 매우 극적으로 나타납니다. 왜냐하면 가인의 계속되는 반역(창 4:9b)과 항변(창 4:13-14)에도 불구하고 야훼 하나님은 최종판결의 심판을 내리시지는 않으시기 때문입니다.(특히 창 3:19의 “너는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때까지 너는 얼굴에 땀을 흘려야 낟알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는 히브리어 구문 상으로 볼 때, 인간 타락에 대한 징벌이 곧 ‘흙으로 돌아가는 것’[죽음] 그 자체라는 해석은 전혀 옳지 않습니다. 현대 구약 주석가들 어느 누구도 또한 결코 그렇게 이해/해석하지 않습니다. 타락의 징벌은 위의 밑 줄 친 부분에만! 해당된다는 것이 히브리 본문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롬 5:12의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또 그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들어온 것과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습니다.”라는 아담-예수 동형론적 논리를 마치 본래의 인간은 불멸의 영혼을 가진 신적 존재[immortal being]로 창조되었으나 죄로 말미암아 인간은 비로소 사멸의 존재[mortal being]가 되었다는 논리/이론으로 해석하는 것은 치명적인 ‘해석의 오류’라고 보아야 할 것이며 그것은 또한 헬라적, 영지주의적 이교[이단]논리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인간은, 히브리적 신앙에 의하면, 결코 불멸의 영혼으로[불멸적/신적 존재로] 창조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가도록 창조된 피조물이며 창조주 하나님의 은혜의 재창조에 의하여서만!![겔 37:11-14] ‘재창조[새롭게 창조]’되는 몸[신령스러운 몸]의 부활[갈 6:15]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의 결실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구원 받는 길은 없습니다. 인간이 구원받는 길(부활의 새 창조)은 하나님의 긍휼의 은총으로부터만 가능한 길인 것입니다. 이 사실은 이미 창 3:20-24에서도 역설(力說)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부활’ 사실에서 분명하게 확인된 것으로서, 특히 우리의 본문 창 4:15-16에서는 더욱 극적이고도 역설적(逆說的)인 방식으로 증언되었습니다. 죄가 만천하에 밝혀졌음에도 끝내 회개하지 않는(창 4:13-14는 결단코 가인의 회개문구가 아닙니다!!)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이라고 할지라도(J는 분명 ‘가인’을 ‘인류 최초의’ 살인자임을 강조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야훼 하나님은 일벌백계(一罰百戒)의 전략이 지닌 교육효능을 이용하지는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은!!회개의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 인류 최초의 살인자 가인을 일벌백계로서 극형으로 처벌하시어 죄에 대한 심판의 지엄하심을 시위(示威)하시지는 결코 않으시고! ‘만나는 사람마다’(살인자 가인에게 살해보복하려는 사람은, 문자적으로만 따지면, 아담과 하와만일 텐데, 즉 4-1-1=2일 텐데, 왜 가인은 ‘사람마다’[히브리어 kol=all, every라는 말]라는 말을 사용하느냐? 라고 묻는 물음은 성서문학의 현실을 이해하게 되면 자연히 해결될 것입니다.) 즉 만나는 자마다 자신을 죽이려(同態復讐法: lex talionis에 따라 죽이려)하면 어떻게 하느냐고 적반하장 격으로 항변하는 가인에게는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가인을 죽이는 자는 일곱 배의 벌을 받을 것이다.”(창 4:15)라고 보호 약속을 해주시면서 보복을 방지할 수 있는 특별한 ‘표’('oth=a mark)까지 부여해주셔서 그의 생명을 지켜 주시겠다고 약속하심으로 가인은 아무런 해함을 받지 않고 에덴의 동쪽, ‘놋’ 땅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고 해피엔딩으로 전체 이야기를 마감하고 있습니다.
<가인 이야기>는 이렇게 하여 ‘참 예배’란 무엇인가? 라는 것과 그리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길이란 또한 무엇인지를 밝혀주는 메시지로서 우리 앞에 우뚝 서게 합니다. 우선, 참 예배는 예배드리는 자의 인격이 하나님이 기뻐하실 인격이 되도록 그 인격을 그 어떤 것보다 먼저 합당한 제물이 되도록(몸이 산 제물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제물(예배)보다 제물(예배) 드리는 자의 인격이 형제(이웃)에 대한 ‘질투의 분노’(창 4:6; 마 5:24)를 정리한 인격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참 예배의 선결요건은 ‘회개’라고 하겠습니다. 회개가 선행되지 않는 예배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예배가 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시 51:16-17[18-19]).
비록 우리가 가인의 후예일지라도, 즉 우리가 형제살인의 피가 마르지도 않은 채 내 손에 묻어 있는 그런 자라고 할지라도 ‘회개하는 심령으로’(=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으로, 시 51:17[19]) 주 앞에 나아가면 하나님은 분명코 우리의 예배를 반기신다는 것을 우리의 본문은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인자의 생명도 귀하게 여기시어(창 4:1, 야훼의 뜻에 의하여 태어난 생명이므로!) 그 생명을 노리는 자에게는 일곱 배로 벌을 주시면서 까지 그의 생명을 지켜주실 ‘표’(가인의 표, 창 4:15)를 은총의 선물로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엘 라훔, 긍휼의 신, 출 34:6)이 바로 우리의 하나님이시므로 우리 같은 형제 살인의 피가 흐르는 가인의 후예라 할지라도 그 하나님은 우리의 예배를 참 예배로 받아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인’과 같은 형제 살인자도 <야훼로 말미암아>(창 4:1)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우리의 예배가 만일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시 51:17[19])으로 드리는 회개의 예배이기만 하면 그것은 반드시 <참 예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2011년 4월 25일자 조선일보의 제1면 오른 편 상단에 큰 글자로 쓴 “교회가 세상에 걱정을 끼치고 있다”라는 어느 개신교 목사님의 자성(自省)의 소리와 그리고 동일 신문의 사설(社說) 최 하단의 <세상이 종교[교회]를 걱정하는 시대의 부활절>이라는 제하의 글은 부활절의 달인 4월을 진실로 슬프게 합니다. 기독교[교회]의 현실이 이 정도까지 되었는데도(!) 오늘 교회가 <회개>하지 않고 여전히 <대형교회>만을 간절히 추구하며 끝내! 기업화만 되어간다면 그런 교회의 예배에도 구원이 있겠습니까?! 아모스 예언자의 외침(암 5:4-6)과 이사야 예언자의 부르짖음(사 1:11-17) 그리고 예레미야 예언자의 피를 토하듯 부르짖는 울부짖음(렘 7:3-11; 성전설교)을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어야 할 것입니다. 교회가(성전이) <도둑들이 숨는 피난처=도둑의 소굴=도적의 굴혈>(렘 7:11; 마 21:13; 막 11:17; 눅 19:46)이 되어서야 어떻게 교회(성전)가 구원의 간성(干城)이 될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예배가 끝내 <가인의 예배>로 남아 있어서는 안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네 한국 교회가! 우리네 한국 교회가! 우리네 한국 교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