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시편 128:1-6절
설교문
TV와 신문에 등장하는 끔찍한 기사들을 보면 우리의 마음은 우울해지기 일쑤입니다. 좋은 소식을 접하면 마음이 밝아지고 그만큼 삶을 힘차게 살아갈 용기를 얻습니다.
그러나 나쁜 소식을 접하게 되면 “저런 끔찍한 일이 이 땅에서 버젓이 일어나다니 .... 저런 꼴을 안 보려면 내가 얼른 죽어야지, 내가 인생을 너무 오래 살았다!”고 한탄하며 살아갈 의미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좋은 기억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얼마나 이로운 것인지, 나쁜 기억이 얼마나 독이 되는지를 알기에 우리 선조들은 '은혜는 바위에 새기고 원한은 냇물에 새기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사회가 불행한 공동체가 되는 것은 좋은 기억을 사람들이 분실하며 살기 때문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저 아프리카 오지의 카라라는 지방에는 은혜에 보답하는 좋은 풍습이 있습니다. 마을에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받아 고마움을 느끼면 그날 밤 그 집 마당에서 무릎을 꿇고 조용히 머리 숙여 밤새 앉아 있는 것입니다. 혹시 비가 온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은 움직이지 않고 꼬박 비를 맞으며 은혜 베푼 사람의 고마움을 가슴에 새긴다고 합니다. 만일 이렇게 하지 않고 그냥 지내면 그 사람은 마을에서 집단으로 매를 맞거나 쫓겨나고 맙니다.
우리 사회도 이렇게까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한번쯤 고마운 사람에 대한 좋은 기억을 가지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부관계에서도 좋은 기억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배우자의 장점은 나팔로 불고 단점은 가슴에 소리 없이 묻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부가 살다보면 기쁜 일도 있고 슬픈 일도 있을 텐데 그 와중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기 위해서는 즐거운 일만을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철학자 몽테뉴는 “좋은 남편은 귀머거리가 되고 좋은 아내는 장님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배우자의 단점에 대해서는 질끈 눈을 감아 주어야 행복해 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어떤 기억을 품느냐에 따라 생활 자세가 달라지기 마련입니다. 행복하길 원한다면, 아름다운 삶을 살기 원한다면 좋은 것을 보고, 겪고, 기억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러시아의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좋은 기억, 특별히 어렸을 때 가정생활을 하면서 얻은 좋은 기억처럼 장래에 깊은 감화를 주는 것은 없다. 귀하고 아름다운 기억은 최대의 교육이다. 그런 기억이 많은 사람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최후까지 아름답게 자신의 인생길을 걸을 수 있다.
그런 기억이 단 하나만 있어도 사람은 영원한 행복을 찾을 수 있다. 그 한 가지 기억이 사람을 많은 죄악에서 건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녀들이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살 수 있도록 좋은 기억을 그들에게 만들어 주고 있습니까? 아니면 나쁜 기억을 남겨주어 자녀들이 자신의 삶을 비관하면서 살아가도록 만들고 있습니까? 우리는 자녀들에게 좋은 기억을 남겨 주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좋은 기억을 가능한 한 많이 남겨주어 그들이 긍정적으로 삶을 살아가게 할 책임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잡지에서 소매치기를 하다가 자수한 사람이 쓴 수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 소매치기는 어느 부잣집의 첩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세 살 때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신을 놓고 당신의 아들이다, 그렇지 않다, 내 아들이 아니다 하면서 티격태격 싸우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싸움에서 아버지는 ‘이 아이는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그를 어머니 등에 업혀 집에서 쫒아냈습니다. 그 후 화병으로 어머니는 그가 다섯 살 때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을 내쫒고 어머니는 화병으로 죽은 기억 밖에 없는 이 다섯 살 된 고아가 보통의 행복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처럼 올바른 길을 갈 수 있었겠습니까?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과, 가정과, 이웃에 대한 관계가 회복되어 좋은 기억을 많이 경험함으로써 삶을 주님 안에서 아름답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이라는 무인도에 유배되어 기도하다가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한에게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리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계2:2-3)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내면의 생각과 숨겨진 비밀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당신의 독생자인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어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 모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사랑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지켜 주십니다. 또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이 하나님과 올바로 관계하기 위해서는 예배에 성공해야 합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양하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에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예배에 참석하여 우리는 왕이신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높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려야 합니다. 신자는 예배를 심심풀이로 드려서는 안 됩니다. 건성으로 드려서도 안됩니다. 헌신하는 마음이 없이 그저 시간 때우기 식으로 드려서도 안 됩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지 않는 예배는, 헌신과 감사와 결단의 마음이 없는 예배는 하나님이 증오하는 외식하는 예배일 뿐입니다. 우리는 모두가 다 예배에 참석하여 찬양하고, 기도하고, 설교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따라 결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것들을 마음이 없이, 건성건성으로, 대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신자는 신자의 외양만을 갖추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예배에 간신히 참석은 했지만,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집중되어야 합니다. 개인적인 필요를 만족시키는 것이 예배가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또한 예배에서 들은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사무엘이 ‘주여, 말씀하옵소서.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합니다.
설교 말씀을 듣는 것으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설교 말씀이 삶의 현장과 연결되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서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2:26)고 했습니다. 말 뿐인 믿음은 공허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행동으로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은 우리는 마땅히 성화된 삶을 살아 그리스도의 향기를 온 몸으로 증거해야 할 것입니다.
2. 가정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공동체는 두 개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정과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여 가정을 이루게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함께 사는 것을 보고 심히 기뻐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예수께서 부활승천하신 다음 보혜사 성령을 보내셔서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공동체 가운데 가장 중요한 두 기둥은 바로 가정과 교회입니다. 지난 2천년 동안 하나님의 선교활동은 가정과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져 왔습니다. 가정과 교회는 상보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가정이 유지되고 행복해야 교회가 바로 설 수 있습니다. 역으로, 교회가 바로 서야 가정이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가정이 행복해지려면 바울의 권면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엡5:22-25절). 남편은 아내를 쉽게 변하는 인간적인 사랑으로 사랑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가 교회를 사랑하는 것과 같이 철저한 희생과 헌신의 자세로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남편이 아내의 머리하고 해서 힘으로 아내를 누르고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종이 아니기 때문에 자기의 몸처럼 사랑하라고 사도 바울은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정은 부부가 서로 섬기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사랑하는 아름다운 가정이 되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아내를 두고 “내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시128: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결실하다’는 것은 식물이 열매를 맺거나 맺은 열매가 여문 것을 말합니다.
포도나무가 자라 풍성하게 포도열매를 맺었으니 농부의 눈에 그 포도나무가 얼마나 귀하고 아름답겠습니까? 이처럼 남편들은 아내를 결실한 포도나무처럼 생각하고 가정의 여왕처럼 살도록 배려하고 도와주어야 합니다. 또 자녀들과의 관계도 좋아야 합니다.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시128:3).
고대 중동에서는 자녀들을 통해 부모의 노후를 보장을 받을 수 있고, 가문의 영광을 계속 이어나가도록 했기 때문에 자식은 부모의 자랑이었습니다. 오늘날은 사회가 급변하여 자식이 부모를 모신다는 것이 매우 힘이 들어 거의 그것을 기대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부모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십계명을 따라 신자는 모든 힘을 다하여 부모를 공경하고, 그 부모 공경을 후손에게도 물려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가정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가정이 올바르게 될 리가 없습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도 먼저 가정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부모와 자녀가 아침저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기도하기 위해 모이는 것 자체가 복입니다. 예배를 통해 자녀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는 것이 큰 복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위해 매일 기도하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가정예배를 통해서 자녀는 부모의 기도를 받고 함께 예배드림으로 하나님의 복이 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부모님의 기도를 받고 보고 자란 자녀가 어떻게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길을 갈수 있겠습니까? 가정예배는 자녀가 기도를 배우게 하고 경건하도록 격려합니다.
낙숫물이 바위를 패이게 하는 것처럼 꾸준한 가정예배가 자녀들에게 경건한 습관을 만들어 주고 조금씩 조금씩 변화시켜 가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예배가 가정의 분위기를 은혜스럽게 만들기 때문에 이런 분위기에서 자녀들은 경건하게 자라납니다.
3. 이웃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때부터인가 돈 버는 일이 삶의 유일한 목적인 것처럼 생각하고 모든 것을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한 상품으로 보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이렇게 상품화 하는 동안 부끄럽게도 이 사회는 중년층에서 가장 높은 자살율과 세계 최고의 이혼율이라는 일그러진 슬픈 자아상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심령의 샘은 말라가고 인생의 소중한 가치들은 힘을 잃은 채 오직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적 삶의 방식들이 우리를 더욱 외로운 고슴도치로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홀로 있다’고 느껴지는 고독이 아니라,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어도 진실한 정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 극한의 외로움입니다.
이상하게도 물질이 풍요로워지면 질수록 그 극한의 외로움은 그와 정비례하여 점점 커져만 갑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외로움을 달래 줄 대안물로 애완동물이나 인터넷 등을 본능적으로 찾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애완동물은 대화를 할 수 없기 때문에 극한의 외로움을 채워주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습니다. 또 인터넷을 통해 가상공간 속에서 많은 사람과 상대할 수 있으나 그 때가 지나면 또 홀로 있어야 하기 때문에 외로움을 달래 주기에 한계가 또한 있습니다.
그럼에도 고독한 현대인들을 위한 서비스업종은 불황임에도 불구하고 계속 성장하고 있는 추세며 훨씬 다양해질 전망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단들로는 본질적으로 외로움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본질적인 대안이 있어야만 외로움과 공허함을 극복하고 보람 있는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영화 'AI'는 자식을 잃은 부모가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로봇 아이를 입양한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로봇이 사람의 외로움을 어찌 달래겠습니까? 80대 노인이 자식들에게 짐이 되기 싫어 죽었고, 혼자 사는 60대 노인이 자실한지 사흘 만에 발견된 사건도 있었습니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입니다. 인간은 혼자만으로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입니다. 인간은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마틴 부버라는 신학자는 자신의 저서 [나와 너]에서 인간이 맺을 수 있는 관계를 ‘나와 너’라는 인격적인 관계와 ‘나와 그것’이라는 물질적인 관계로 나누었습니다. 그는 인간이 남과 더불어 살아갈 때만 참다운 존재가 됨을 역설하였습니다. 인간은 남을 나와 동등한 ‘너’로 대하고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할 때 참다운 삶을 누리게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물질문명의 조류가 심화되고 자본주의가 천박화 되는 경향을 보이면서 남을 물질적인 ‘그것’이라고 보는 세계관이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남을 인격체로 대하지 못하고 오로지 나의 돈벌이를 위한 도구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현대 사회는 ‘나와 그것’이라는 비인격적인 도구적 관계가 더욱 팽창하여 외로움은 더욱 깊어만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은 이제 이웃으로 확장되어야만 합니다. 관계 회복이란 모든 것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보여주셨던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내 가족과 더불어 사회적인 약자(弱者)인 소외된 이웃을 돌아보며 보살피는 일은 너무나 소중하고 귀한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또한 보통의 이웃을 나의 돈벌이를 위한 수단, 즉 ‘그것’으로 대하지 말고 나와 동등한 인격으로 대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 더불어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살인마 유영철은 외로움이 살인의 동기였다고 했습니다. 개그맨 김형곤 씨는 운동 중 돌연사 했습니다. 남에게 웃음을 주었던 그는 정작 부인과 이혼하고 아들은 유학 보낸 후 혼자 많이 외로워했었다고 동료들이 전했습니다.
외로움은 주님의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이웃 관계가 회복될 때만 극복될 수 있습니다. 신자는 내 이웃이 이렇게 외로움이 병이 되어 살인이나 죽음으로 이르기 전에 주님의 사랑으로 돌보아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사회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면 자연스럽게 가정의 관계, 이웃의 관계도 회복됩니다. 주님의 복음으로 가정과 이웃의 관계가 회복되어 보다 행복한 삶을 누리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