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세기 종교개혁운동은 중세 말기 문예부흥운동의 인문주의가 중세의 문화와 문명을 개혁하는 시대에 있었던 한 운동이었으므로, 종교개혁운동과 인문주의운동은 많은 점에 있어서 상호 영향을 준 것이었다. 즉 양자가 공통된 개혁의 타깃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 말에 정치사상가들은 국가가 가톨릭의 교권으로부터 독립하여 자주적 군주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종교개혁자들도 같은 생각이었는데 루터는 국가권력을 교회로부터 독립시킨 사람이었다. 사상변혁과 문서출판의 문화적 개혁도 루터를 비롯한 개혁자들의 자유로운 신앙운동과 그들의 서적 출판이 실질적으로 로마 교황청의 사상 통제와 출판물 검역권을 무력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가능하게 되었다. 인간의 좋은 자연적 본능과 생득적 권리를 회복시키려던 인문주의자들의 이상 역시, 종교개혁자들이 신부와 수녀들의 결혼을 허락하고 고행을 격려하던 수도원 제도를 철폐하고 지나친 금욕생활을 반대함으로써 실현되어 갈 수 있었다.
이렇듯 종교개혁을 수용한 교회와 프로테스탄트들은 문예부흥운동이 지향한 인문주의적 계몽운동과 동반자가 되어 있었고, 로마가톨릭교회는 이 두 동반자에 대항하였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루터교회나 개혁파 교회나 다 마찬가지로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교회와 국가를 지배하던 로마가톨릭교회 및 그 교회를 지지한 국가들과 싸워서 이길 만한 힘이 없었다. 또한 30년 전쟁의 평화협정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교세는 열세였고, 전쟁에 시달려 피로해 있었다. 그리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안으로 신학과 교리의 차이 문제로 서로 싸우기도 하고 갈라지기도 하였다. 영국 성공회가 다 프로테스탄트 진영에 속하였지만 영국에서 프로테스탄트들이 서로 비참하게 싸웠다. 루터와 쯔빙글리의 분열도 프로테스탄트 교계의 분열이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종교개혁이 시작된 후 약 100년 동안 유럽의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이 유럽사회의 학문과 예술과 문화일반의 급속한 변화와 발전에서 멀어져 있었다.
지적 발전
종교개혁운동이 인문주의의 계몽운동과 공통되는 개혁의 과제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실험실은 달랐다.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인문주의운동에 간섭하거나 발전을 저지할 권리가 없기도 했지만, 종교개혁이 시작된 때부터 약 100년 동안 앞에서 진술한 바와 같이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가톨릭교회와의 싸움에서 살아남기 위하여 전력을 쏟았다. 그동안 일반 사회에서는 자연과학과 철학과 사회사상에서 새로운 발견들과 이론들이 나왔다. 갈릴레오(Galileo, 1564~1642)가 지동설을 주장하여 교황청이 정죄하였다. 성서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동설을 부인하는 것은 자연과학적 진리였지만 모든 학문적 이론의 결론은 교황의 판정을 거쳐야만 했다. 이때 루터를 비롯한 종교개혁자들은 갈릴레오의 지동설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이때쯤 해서 천문학과 수학을 비롯한 여러 자연과학사상이 발달하고 있었다. 갈릴레오는 여전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신자였지만 과학적 자기 신념을 고집했다.
인문주의는 과거의 전통을 비판하여 취사선택 했다. 갈릴레오와 연배였던 데까르트(Descartes, 1596~1650)는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나는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철학적 원리를 발설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지만 이 원리는 과거의 전통이나 외적인 권위에 무조건 복종하지 말 것을 권장하는 것이었다. 그에게 가장 확실한 것은 생각하는 자아(自我)였다. 그것은 자기의 사유만이 확실하고 자기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것이라는 말이다. 옛날 성 어거스틴이 “나는 생각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말한 것은 자기 존재가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하게 한다는 말이었다. 전자는 나를 생각하는 존재이고 후자는 하나님을 생각하는 존재이다. 데까르트의 사상에 영향 받은 사람들이 과거의 종교적 전통에서 자유하고자 하였다.
이 당시의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많이 알려져 있다. 독일의 스피노자(Spinoza, 1632~1677)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는 했지만, 자연을 신적인 존재로 믿는 소위 ‘범신론’을 펴고 하나님의 특별한 뜻이나 기적과 같은 것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를 전하는 위대한 예언자로 믿었다.
영국의 철학자 죤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인간오성론(人間悟性論)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면서 신앙보다는 이성을 통한 하나님 존재의 확실성을 강조하였다. 그는 이성을 ‘하나님의 촛불(candle)’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성으로 하나님을 알 수 없는 것은 신앙에 맡겨야 하되 하나님의 계시는 인간의 이성으로 그 진위를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리스도교는 합리적 종교라고 말하였다. 로크의 제자인 샤프테스버리(Shaftesbury, 1671~1713)는 하나님을 믿었지만 인간은 생래적으로 도덕성을 가지고 태어난 것을 강조함으로써 종교적 교훈 없이도 자연도덕률을 지키면 선하게 살 수 있다고 말했다.
영국의 죤 톨랜드(John Toland, 1670~1722)는 「그리스도교는 신비하지 않다」라는 책을 썼다. 이상에서 소개한 이러한 학자들은 자연신교론자(自然神敎論者)라고 부른다. 이들은 그리스도교의 성서의 특수계시사상을 부인하고 성서의 계시도 자연적인 이성으로 다 이해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교의 계시가 신앙으로만 이해될 것이 아니고 이성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는 이론을 가지고 결국 계시는 이성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 하였다. 그런데 데이비드 흄(David Hume, 1711~1776)은 종교를 이성으로 이해하기보다는 감정(emotion)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옳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신앙을 감정으로 이해하거나 감정을 신앙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조지 버클리(George Berkeley, 1685~1753)는 하나님을 마음(mind)으로 이해하고 마음과 이념(ideas)으로 하나님을 이해하려 하였다.
이 시기에 자연과학이 크게 발전했는데 신실한 그리스도인 과학자도 있었지만 불신자 과학자들도 있어서 우주의 기원에 대한 설명이 다르기도 하였다. 루터교인이었던 천문학자 케플러(Kepler)는 우주의 기원을 하나님의 창조에 두고 창조신앙이 외부적인 입증을 통하여 견고하게 되어 창조주의 생각이 자연 안에서 인식되며 그의 무궁한 지혜가 날마다 더 밝게 비치게 되기를 바랐다. 지구 중심은 인간 중심이고 태양 중심은 하나님 중심 사상이었다. 루터의 종교는 하나님 중심 운동이었고 따라서 그것은 코페르니쿠스적이었다. 케플러의 천문학도 태양 중심이어서 하나님이 이 우주의 중심이 되어 모든 존재의 운동을 지시하시며 인도하신다고 믿었다. 그는 과학적 형이상학을 가지고 태양을 성부로, 군성들을 성자로, 그리고 그 두 분 사이에 성령의 역할을 에테(ether)에 비유하였다. 그는 루터교회의 예수 그리도의 편재성(遍在性)을 비롯하여 루터교회의 일치신조를 그대로 다 수용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교수직에서 파면되었다. 갈릴레오와 코페르니쿠스의 태양 중심 학설이 많은 이론을 제시하였고 그것에 옹호한 과학자들이 많이 생겼다. 그들은 성서의 권위 부정을 목적으로 했다기보다 종교와 과학을 분리하여 다루려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가톨릭교회는 물론이고 프로테스탄트 종파들 가운데서도 용납되지 않았다. 천문학의 발달은 이 우주의 크기와 복잡성을 발견했고 프랑스의 과학자 퐁트넬(Fontenelle)은 「우주의 복수성(複數性)」이란 책을 써내고 지구는 우주의 무수한 별의 하나라고 지적하고 이 우주가 이 지구 위에 사는 사람들만을 위하여 지음받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더 큰 우주를 발견한 과학자들은 광대한 자연계를 수학적 단일 방법으로 측량하고 실험했고 동시에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 공통적인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과학자들 중에는 이러한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더 완전한 지혜를 찬양하고 경건하게 된 사람도 있었다.
이 큰 우주가 수학의 법칙으로 설명되는 만큼 이 우주가 또한 단순한 세계라고도 생각하였다. 그리고 이 단순하면서도 조화로운 자연법칙을 「수학의 원리」라는 책을 써서 설명한 아이작 뉴턴(Isaac Newton, 1642~1727)은 중력이론을 발견하여 선배 과학자들의 모든 학설을 완성해주는 것이 되었다. 그리하여 영국의 시인 알렉산더 폽(Alexander Pope)이 읊기를 “자연과 자연의 법칙이 어둠에 잠겨있더니 하나님께서 뉴턴이 있어라 하시니 모든 것이 밝아졌다.”
그러나 많은 자연과학자들은 성서에서 아주 자유롭게 되어 과학연구를 추진하였고 중세적인 종교의 간섭으로부터 아예 벗어났다. 프로테스탄트 교파들 가운데는 이러한 자연과학과 대항하려는 교파도 있었지만 자연과학의 자유를 시인한 교파도 있었다.
인문주의의 계몽운동은 데까르트의 인간존엄성 강조에서부터 비롯하여 인간의 이성과 자연도덕을 강조하는 데로 나아갔고, 자연이 곧 하나님인 것처럼 말한 자연신교론자들의 범신론 사상을 거쳐, 자연계가 질서정연하게 단일 수학적 법칙으로 운동하고 지탱되는 것을 발견한 자연과학자들의 무신론 사상을 부추겼다. 그리하여 제18세기 유럽의 슬로건은 “자연으로 돌아가자”였고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떠나서 서양의 그리스도교적 세계가 세속화되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