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가 불행의 기억에 사로잡혀 있을 때
그대의 삶이 타인에 대한 불평과 원망으로 가득할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그대의 존재가 이루지 못한 욕망의 진흙탕일때
불면으로 잠 못 이루는 그대의 밤이 사랑의 그믐일 때
아직 길을 떠나지 말라
쓰디쓴 기억에서 벗어나 까닭 없는 기쁨이 속에서 샘솟을 때
불평과 원망이 마른 풀처럼 잠들었을 때
신발끈을 매고 길 떠날 준비를 하라
생에 대한 온갖 바람이 바람인 듯 사라지고
욕망을 여읜 순결한 사랑이
아침노을처럼 곱게 피어오를 때
단 한 벌의 신발과 지팡이만 지니고도
새처럼 몸이 가벼울 때
맑은 하늘이 내리시는 상쾌한 기운이
그대의 온몸을 감쌀 때
그대의 길을 떠나라
* 고진하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나 감리교신학대학 및 대학원을 졸업했다. <세계의 문학>을 통해 시인으로 데뷔했고, 지은 책으로는 시집 <프란체스코의 새들>, <얼음수도원>, <수탉> 등이 있고, 산문집 <나무신부님과 누에성자>, <목사 고진하의 몸 이야기> 등이 있다. 김달진 문학상과 강원작가상을 수상했으며, 현재 숭실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와 한살림교회 목사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