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성 칼럼] 내 안의 벌레

▲예수원교회 김성 목사
시골에서 목회할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차를 몰고 가면서 라디오를 듣는데 재미있는 사연이 소개되었습니다. 시골에 사는 어떤 처녀가 자기도 서울에 가서 연예인이 되겠다는데 아버지가 하도 반대하니까 하루는 농약병을 들고 와서 한다는 말이, “아버지가 계속 이렇게 반대하면 차라리 이걸 먹고 콱 죽어버릴테야” 그랬답니다. 보통 아버지 같으면 놀라 자빠질 상황이 벌어진 셈인데 그 처녀 아버지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딸에게 이렇게 대꾸했답니다. “니가 왜 농약을 먹냐? 니가 벼멸구냐?”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이 이야기를 듣고 저는 혼자서 얼마나 웃었는지 모릅니다. 그 처녀가 아버지의 고집을 꺾고 연예인이 되기 위해 서울로 갔는지 어쩐지 그 후일담은 알 수 없습니다만 참 대단한 부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고집을 꺾기 위해 농약병을 들고 시위한 딸이나 그 상황에 놀라지도 화내지도 않으면서 우스갯소리로 딸의 결기를 뿌리친 아버지나 둘 다 보통이 넘는 사람들임에 틀림없습니다. 제게 한바탕 큰 웃음을 안겨준 그 이야기는 그 후로 한동안 제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당시 시골에서 목회하고 있던 제게 그 농부와 딸의 이야기는 마치 제가 살던 마을에서 늘 만나는 어느 농부의 이야기처럼 친근하게 느껴졌습니다. 마치 교인들 가운데 어느 집의 이야기처럼 느껴졌습니다. 제가 시골교회에서 목회하며 가까이서 바라 본 농부들의 삶은 정말 고단해보였습니다. 하루 종일 뜨거운 햇볕아래 논과 들녘에서 일하는 것 자체가 고역입니다. 그렇게 소금땀 흘려가며 일하는 농부들을 가장 골치 아프게 만드는 녀석들이 바로 벼멸구와 같은 해충들입니다. 해충들도 어차피 다 제 입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겠지만 도무지 이놈들을 잡지 않고서는 농부들이 실컷 땀 흘려 농사지어도 결국 이놈들만 좋은 일 하는 셈입니다. 때문에 해충을 잡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농약을 뿌리지 않을 수 없어 보였습니다. 열매를 벌레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선 도리가 없었습니다. 
 
성서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네가 많은 종자를 들에 뿌릴지라도 메뚜기가 먹으므로 거둘 것이 적을 것이며 네가 포도원을 심고 가꿀지라도 벌레가 먹으므로 포도를 따지 못하고 포도주를 마시지 못할 것이며;신28:38~39> 농부가 아무리 들에 종자를 뿌리고 포도원에 포도를 심고 열심히 가꾸어도 메뚜기가 먹고 벌레가 먹어버리므로 거둘 것도 마실 것도 없을 것이란 말씀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생의 허무와 수고의 헛됨을 경계하는 말씀입니다. 농부가 좋은 열매를 얻기 위해 아무리 작물에 물과 거름, 좋은 비료를 주며 많은 수고를 해도 열매를 갉아먹는 벌레를 잡지 못하면 결국엔 모든 수고가 허사가 되고 맙니다. 농부들은 자신들의 삶을 통해서 누구보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신앙도 매 한가지입니다. 열매를 맺는 좋은 신앙인이 되려면 벌레를 잡아야 합니다. 안으로부터 벌레가 열매를 갉아먹고 속이 해충으로 썩어 가는데 밖으로부터 제 아무리 생명수를 붓고 좋은 거름을 준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다 벌레 좋은 일 할 뿐입니다. 아이들 뱃속에 회충이 우글거리던 모두가 가난하게 살던 옛 시절, 아이들은 먹어도 먹어도 배가 고프고 아무리 좋은 것을 먹어도 몸은 깡마르기 일쑤였습니다. 뱃속에 사람이 먹은 것의 영양분을 모조리 갉아먹는 벌레가 들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고, 그토록 성경말씀을 많이 듣고, 입만 열면 성령타령을 해도 정작 성령의 열매는 찾아볼 길 없이 영적으로 깡마른 말라깽이 신앙인으로 사는 이유는 자신 안에 똬리를 틀고 있는 벌레를 잡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밖으로부터 주어진 영적인 자양분을 안에서 모조리 다 빼앗기고 잃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갉아먹는 벌레는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어떤 모습으로 있을까요? 바로 ‘나’의 모습으로 있습니다. 암세포가 치명적인 이유는 그것이 외부에서 침입한 것이 아니라 본래 ‘나’를 이루고 있는 체세포가 변이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를 이루고 있던 세포가 돌변하여 나의 생명을 갉아먹는데도 그것이 ‘나’였기 때문에 치명적이 될 때까지 미처 알아채지 못합니다. 암이 무서운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자신 안에 굳건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나’라는 벌레를 미처 알지 못하고 또 잡지 못해서 열매 없는 영적인 기근에 빠져 살아갑니다.

메이지시대 덕망 높은 선사였던 난인선사에게 하루는 학식이 높은 어떤 대학교수가 선(禪)을 배우겠다고 찾아 왔습니다. 교수를 맞이한 선사는 우선 교수에게 차를 한 잔 대접했습니다. 선사가 찻잔에 차를 따랐습니다. 차가 잔에 차서 흘러넘치려고 하는데도 선사는 계속 차를 따랐습니다. 마침내 잔에서 차가 흘러넘치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한 교수가 입을 열었습니다. “차가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 따르시지요.” 그러자 선사가 교수를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은 꼭 이 잔을 닮았구려. 당신은 이미 당신의 생각과 견해로 속이 가득 차 있소. 그러니 그 속을 비우기 전에는 내가 무슨 말을 한들 어디에 먹혀들 틈이 있겠소?” 선사는 교수에게 선의 지혜를 알려들기 전에 먼저 자신 안에 굳건하게 자리 잡고 있는 자신의 견해와 생각부터 비울 것을 차를 넘치도록 따르는 행위를 통해서 가르쳤던 것입니다.
 
김교신 선생은 일찍이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모든 교회 법규를 다 지키고 외양의 행동을 선하게 하여도 ‘나’를 하나님께 바치지 않는 이상 신앙은 아니다. 내 영혼이 구원 얻기 위해, 내 인격이 높아지기 위해, 내가 영생하기 위해, 내 가족, 내 민족이 살기 위하여 하나님을 부르는 것은 아무리 열심이 있고 경건이 있어도 신앙이 아니다. 그는 내 재산, 내 세력을 모으려는 것보다 정도는 높을는지 몰라도 ‘나’표준, ‘인간’중심인데서 변함이 없다. 그리고 이것처럼 하나님이 미워하는 것이 없다. 죄란 살인강도를 가리킴이 아니요,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이 ‘자기’중심이 되는 것이다> 1935년 12월 성서조선 권두언에 실린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돌아오라>는 글의 한 대목입니다.

모든 것을 ‘나’를 기준으로 판단하고 해석하고 행동하는 데 모든 고통과 죄의 원인이 있습니다. 내 안의 벌레가 나를 갉아먹는 것을 모르고 깡마른 체 살아갑니다. 신앙인이 생명의 활기가 넘치고 풍성하게 열매 맺는 삶을 살려면 내 안의 ‘나’라는 벌레부터 잡아야 합니다. 영적인 벼멸구는 바로 내 안에 있습니다. 내 신앙의 열매를 놓고 누구를 탓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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