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원교회 김성 목사 |
지난주에 주목할 만한 책이 한 권 출간되었습니다. 재일교포 역사학자 김문자 선생이 지은 <명성황후 시해와 일본인>이란 책입니다. 김문자 선생은 명성황후시해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당시 조선주재 일본외교관들이 본국과 긴밀하게 주고받은 기밀외교문서와 군부관련문서들, 주한일본공사관기록, 국내외 언론보도자료는 물론 사건 관련자들의 개인회고록과 사적인 편지, 일기에 이르기까지 사건의 진실을 담고 있는 사료를 샅샅이 뒤졌습니다. 퍼즐조각처럼 낱낱이 흩어져 있던 그 자료들을 하나 둘 꼼꼼하게 짝을 맞추어본 결과 그동안 감추어지고 왜곡되었던 사건의 거대한 전모가 비로소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김문자 선생의 연구에 따르면 명성황후시해사건은 일본육군참모본부 내 대본영이 기획하고 육군중장 출신의 조선공사 미우라 고로의 책임아래 일본군대와 ‘장사(壯士)’라 불린 민간인들이 함께 저지른 조선왕비 살해사건입니다. 이것은 명성황후시해사건이 일본 정부와 군부가 직접 기획, 조종하고 실행에 옮긴 명백한 국가범죄라는 사실을 뜻합니다. 그동안 일본정부와 관변사학계는 왕비시해사건에 일본군부가 직접 관련되었다는 혐의를 극구 부인해왔습니다. 대신 조선에 거주하던 일본낭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민간인 범죄일 뿐이라고 주장해왔습니다. 김문자 선생의 연구에 의하면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명성황후시해사건은 사건의 발생부터 뒷수습까지 철저하게 일본정부와 군부의 의도에 따라 벌어진 일입니다. 대체 당시의 일본정부와 군부는 무엇 때문에 감히 일국의 왕비를 살해하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를 생각을 하게 되었을까요? 왕비시해사건을 전후해서 긴박하게 돌아간 다시의 정황을 살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왕비시해사건이 일어나기 한 해 전인 1894년 7월 23일, 8,000여명의 일본군이 서울도성을 에워싸고 1개 대대병력이 경복궁에 난입했습니다. 이들은 전신시설의 총괄권한을 가진 국왕을 포로로 잡은 체 경복궁 바로 앞에 위치한 조선전보총국을 장악했습니다. 당시 조선에는 경성-의주간의 서로전선, 경성-부산간의 남로전선, 경성-원산간의 북로전선이 가설되어 있었습니다. 일본은 이 날의 경복궁 난입으로 세 전신선을 총괄하는 조선전보총국을 장악했습니다. 그리고 이틀 뒤, 청일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철도와 전신(電信)은 근대전쟁을 치루기 위한 2대 인프라입니다.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키기에 앞서 일본 본토와 전쟁지역인 조선과 중국동북부까지 연결되는 전신선과 전신국을 확보하는 것이 시급했습니다.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일본본토에서 전쟁지역까지 정부와 군부의 명령이 확실하게 전달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쟁 개시 이틀 전 경복궁에 난입하여 조선전보총국을 강탈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입니다.
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돌아간 후, 당시 조선공사 이노우에는 청일전쟁을 위해 강탈한 전신선을 조선에 반환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경성-원산, 경성-의주간의 전신선은 본래 조선의 것이기 때문이고, 경성-부산간의 전신선과 경성-인천간의 군용전신선은 비록 일본의 자본으로 가설한 것이기는 하지만 관리에 어려움이 있으므로 조선에 반환하여 관리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의견이었습니다. 이노우에는 또한 청일전쟁으로 조선이 쑥대밭이 되었으므로 청으로부터 받은 전쟁배상금 2억엔 중에서 5백만~6백만엔을 조선왕실에 보상금으로 지급해 줄 것을 본국에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정부와 군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그들은 청일전쟁 후에도 조선의 전신선을 계속 일본의 관리아래 두기를 원했습니다. 그러기 위해선 두 가지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습니다. 첫째, 전신선을 관리하기 위해 조선에 상비군을 주둔시켜야 했습니다. 둘째, 조선왕실과 내각내의 반일세력을 제거해야 했습니다. 특히 러시아와 손을 잡고 일본에 저항하려드는 왕비를 제거하고 친일정권을 세우는 것이 필요했습니다.
전신선을 조선에 반환할 것과 조선왕실에 전쟁보상금을 지급할 것을 주장하던 조선공사 이노우에가 마침내 해임되었습니다. 이것은 이토 히로부미 총리 밑의 대본영 육군수뇌부의 결정이었습니다. 후임으로 육군중장 출신의 미우라 고로가 1895년 7월 19일자로 조선국특명전권공사로 임명되었습니다. 신임 미우라 공사는 부임하자마자 조선에 주둔하는 일본군대의 지휘권을 자신에게 달라고 대본영의 수뇌부에게 거듭 요청했습니다. 대본영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10월 5일자로 미우라 공사에게 경복궁 앞의 경성수비대를 움직일 수 있는 지휘권을 허락해주었습니다. 시해사건이 일어나기 바로 3일전이었습니다. 미우라 공사는 대원군을 옹립하려는 쿠데타를 가장하여 왕비를 시해한 다음 친일내각을 구성해 일본 정부와 군부의 바람대로 조선의 전신선을 계속 확보하고 이를 지키는 구실로 상비군을 불러들여 조선에 주둔시키고자 했습니다. 미우라는 경성수비대장 바야하라 쓰토모토와 조선공사관 무관 겸 군부고문인 구스노세 유키히코를 포함한 군인 8명과, 일본외무성의 비밀첩보기관이었던 한성신문사 사장 아다치 겐조가 동원한 민간인, 이른바 장사(壯士) 48명으로 시해단을 꾸리고 드디어 1895년 10월 8일 새벽, 경복궁의 담을 넘었습니다. 그 중엔 조선국 법부고문이었던 호시 도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왕비가 거처하는 경복궁 깊숙한 곳에 자리한 건청궁까지 진입한 그들은 왕비의 사진을 들고 왕비를 찾아낸 다음 칼로 왕비의 머리 부분을 쳐서 살해하였습니다. 왕비를 칼로 내리친 인물은 후일 가담 군인들에 대한 조사과정에서 미야모토 다케타로 육군소위로 밝혀졌습니다. 당시 조선국 일등영사였던 우치다 사다쓰치는 일본 외무성 차관 하라 다카시에게 왕비의 비참한 최후를 담은 보고서를 비밀문서(기밀 제51호)로 보냈는데 이 문서는 외무대신의 열람을 거쳐 일본천황에게 보고되었습니다. 이 비밀문서에 따르면 왕비는 살해당한 후 소각되었으며 잔해는 주변 어딘가에 묻혔습니다. 훗날(1938년), 일본 외무성의 조사에 응한 우치다는 당시 왕비의 유해처리과정에 대해 이렇게 답하고 있습니다. <그 유해는 왕궁 안의 우물에 던져졌는데, 그렇게 하면 즉시 범죄의 흔적이 발견될 것으로 염려가 되어 다시 유해를 꺼내 왕궁 안의 소나무 숲에서 석유를 붓고 태웠다. 그러나 여전히 걱정이 돼서 이번에는 연못 속에 던졌지만 가라앉지 않아서 다시 그 다음날엔가 연못에서 건져내어 소나무 숲에 묻었다.>
일본영사에 의해 ‘역사상 고금을 통틀어 전례 없는 흉악’이라고 일컬어진 이 사건의 가담자들은 몇 달 뒤 모두 무죄 방면되었습니다. 1896년 1월 14일, 구스노세 유키히코 중좌를 포함한 8명의 군인들은 군법회의에서 고작 1인당 10분 남짓한 심문을 받은 후 전원 무죄 방면되었고, 일주일이 지난 1월 20일, 48명의 장사(壯士)들 또한 히로시마재판소에서 전원 무죄 방면되었습니다. 미우라 고로의 회고록에 따르면 무죄 방면되어 도쿄로 돌아온 미우라에게 일본천왕이 요네다 시종장을 보내왔다고 합니다. 요네다의 말에 따르면 왕비시해사건을 처음 전해들은 천왕의 첫마디는 “할 때는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명성황후시해사건은 일본군부와 정부의 최고수뇌부가 직간접으로 관련된 명백한 국가범죄입니다. 아무리 백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어도 이것은 감출 수 없는 진실입니다. 역사의 법정에 공소시효란 없습니다. 일본정부는 조선의 왕비를 살해한 국가범죄에 대해 지금이라도 사죄해야합니다. 한국인은 이 비운의 역사를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한국정부와 한국인은 지금이라도 명성황후를 시해한 범죄에 대해 일본정부에게 사과를 요구해야 합니다. 피해를 당하고도 사과를 요구할 줄도, 받을 줄도 모르기 때문에 일본이 우리를 가해(加害)하는 역사가 여태껏 되풀이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