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본문
예레미야 28:5-9 시편 89:1-4, 15-18 / 로마서 6:12-23 /마태복음 10:40-42
장마와 태풍 메아리의 북상으로 비바람이 불고 날씨가 고르지 않은데도 오늘 이렇게 주님의 전에 나오신 여러분 모두를 환영하고 주님의 은총을 기원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손님을 맞이하는 일은 즐거운 일이면서 대단히 부담스러운 일입니다. 손님과의 관계나 격에 따라서 준비해야 할 일들이 정해집니다. 친한 친구라도 친구를 대하는 예나 그에 맞는 격식은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시댁 어른이나 존경하는 선생님 혹은 귀한 손님을 모신다면 더욱 더 집안 청소, 음식 그리고 장식에 이르기까지 마음을 써야 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입니다.
저는 교구에서 교무국장으로 일할 때 교구장 서품식이나 승좌식과 같은 큰 행사를 치루면서 국내외 손님을 맞이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 경험했습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일 가운데 제일 힘든 것은 역시 자리 배치입니다. 그리고 어떤 절차로 행사를 진행할 것인지...그 절차에서 누가에게 알맞은 순서를 맡길 것인지...세심한 배려와 주위를 기울이지 않으면 서로 힘들고 많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합니다.
손님을 판단하는 기준이나 대하는 자세를 보면 사람됨이나 기관의 정신을 알 수 있습니다. 고급 호텔이나 백화점이 손님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돈 즉 지갑일 것입니다. 정치적인 모임이나 행사에서 사람을 판단 기준은 정치적인 영향력이나 사회적인 지위일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어떻게 맞이하고 환영하고 있는지요?
교우 여러분들이 생각하기에 우리 교회가 사람을 맞이하는 판단기준이나 정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여러분이 생각하기에 우리 교회는 친절하고 정성을 다하여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지요? 우리 스스로는 친절하다고 생각하는데 혹시 처음 이 자리에 오신 분들은 너무 냉랭하다고 느끼지는 않을까요?
우리 교회에는 개방 안내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봉사자들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정성스럽게 맞이하고 있습니다. 매 달에 800명에서 1000여명에 이르는 방문객들에게 성당을 안내하고 설명하는 일을 합니다. 주일에는 새신자 안내 도우미들이 처음 온 신자들에게 정성을 다하여 섬기고 있습니다. 얼마나 귀한 봉사를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이런 개방안내 봉사자들이나 새신자 도우미들의 얼굴만 보는 것은 아닙니다.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자세, 성가를 부르는 태도 그리고 사람들을 향한 미소와 표정 하나하나가 무언의 메시지로 다가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처음 온 사람들을 문전박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회적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차별대우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대 대부분의 교인들은 ‘누가 왔는지... 처음 온 사람인지...아니면 3년 만에 온 사람인지...’ 신경도 관심도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평소처럼 우리가 하던 방식대로 앉아 있고, 우리가 드리던 방식대로 예배드리는 일에 집중합니다. 우리가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사람들이나 오랜 만에 온 사람들은 그런 우리의 모습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우리의 도움 없이 드리는 예배가 얼마나 힘이 드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무언가 벽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때로는 이 교회가 무척 차갑다고 느껴지기도 합니다.
처음 우리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아마도 5분 이내에 우리 교회에서 사람을 어떻게 환영하고 있는지... 처음 온 사람을 어떻게 배려하고 대하고 있는지를 금방 알아차리거나 느낄 것입니다. 그리고 5분 이내에 마음속으로 다음 주에 한 번 더 올 것인지 아니면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를 생각하며 예배를 드릴 것입니다. 만약 다음 주에는 오지 말자는 생각을 하면서 이 성찬례를 끝까지 다 드렸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시간일까요? 여러분의 주위를 한 번 둘러보시지요. 그리고 환한 미소로 눈인사를 해 보십시오.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있나요? 그러면 오늘 평화의 인사를 할 때는 통성명도 하시고, 혹시 명함이 있다면 명함이라도 주고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본래 제자 파송 이야기 가운데 마지막 결론의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10장은 예수님이 열 두 사도를 세우시고 그들을 둘 씩 짝지어 선교 파송을 하시면서 이런저런 주의 사항을 주시는 이야기와 제자들이 선교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그 결과를 보고하는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 상황의 말미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40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오늘 복음 말씀은 아주 짧은 말씀이지만 “맞아들인다. 환영한다”는 말이 여섯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이며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사람이다.” 이라고 말씀하시면서 “예언자를 예언자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을 것이며,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맞아들이는 사람은 옳은 사람이 받을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언자를 예언자로 인정하고 맞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요? 옳은 사람을 옳은 사람으로 인정하고 맞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 예수님의 제자를 제자로 인정하고 맞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사람은 다름 아닌 예언자의 가치, 옳은 사람의 가치, 예수님 제자의 가치를 알고 인정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 가치를 알고 인정한다는 것은 그 사람 마음 안에 예언자의 선포에 귀를 기울일 마음이 있고, 옳은 사람의 삶의 모습을 존중할 줄 알며, 예수님의 복음 선포에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요. 주님은 그런 가치를 알고 인정하며 환영하는 사람들에게 그에 걸 맞는 상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은 지나가던 나그네를 맞이하여 정성으로 대접했는데 그 사람들은 하느님의 천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천사들로부터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축복을 받습니다. 롯은 지나가는 나그네를 맞이하여 소돔과 고모라가 하느님의 진노로 심판받을 때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여기 있는 형제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준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서의 이런 가르침은 사람을 외모로만 판단하여 대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주님 대하듯 그렇게 귀하게 여기면 너도 주님처럼 귀한 존재가 된다는 것이지요.
오늘의 서신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통해서 자신의 죄와 어두운 과거 그리고 허물도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경험을 합니다. 우리가 직접 죽지는 않았지만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서 나의 과거, 나의 죄, 내 육체의 나약함은 죽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나는 경험을 합니다. 이것이 세례 성사의 은총입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모두 이런 은총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또한 세례는 그리스도의 몸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를 세례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가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면 교회는 세례 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신앙생활은 개인적인 신앙생활의 차원을 넘어 섭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나 혼자 믿고, 내가 교회에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오기 싫으면 오지 않는 그런 개인적 선택의 차원이 아닙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여러분이 오고 싶으면 오고, 오기 싫으면 빠져도 되는 그런 예배가 아닙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고 있는 세례 받은 사람들 모두가 죄와 죽음 그리고 어둠의 세력을 이기신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시간이고,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며 부활의 은총과 축복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의 예배는 세례를 받은 사람들 모두가 참석해야 온전한 예배가 됩니다. 여러분의 몸 가운데 일부만 이 교회에 와 있고 한 부분은 집에 있다면 그것은 온전한 몸이 온 것이 아니지요. 많은 가정에서 가족들 가운데 일부 대표만 이 성찬례에 나오시는데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는 대표선수만 출전하는 운동경기가 아닙니다. 우리의 성찬례는 세례 받은 사람들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즉 신령과 진정을 다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최고의 영광을 드릴 때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임하고, 그 은총의 힘으로 세상에 나가 다시 하느님의 자녀답게 세상을 이기며 살 수 있습니다.
오늘 서신에서 사도 바울로는 세례를 받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요구합니다. 사도 바울로에게서 죄로부터의 자유나, 죽음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다 같은 의미입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죄와 죽음과 율법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가 되었지만, 죄와 죽음과 율법의 세력은 여전히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육체적 삶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바울로가 염려하는 것은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참된 자유를 누리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 여전히 죄와 죽음과 율법의 지배는 받고, 죄와 죽음과 율법의 노예처럼 사는 모습을 책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로는 아주 간곡하게 권면합니다. "13 또 여러분의 지체를 죄에 내맡기어 악의 도구가 되게 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오히려 여러분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으로서 여러분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고 여러분의 지체가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로 쓰이게 하십시오. 17 여러분이 전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진실한 가르침을 전해 받고 그것에 성심껏 복종하게 되었으니 하느님께 감사할 일입니다. 18 그리고 여러분은 죄의 권세를 벗어나서 이제는 정의의 종이 되었습니다. ... 그러니 이제는 온몸을 정의의 종으로 바쳐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
바울로는 우리에게 하느님을 위한 정의의 도구가 되라고 합니다. 우리의 온 몸을 정의의 종으로 바쳐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라 합니다. 작년에 하버드대 교수 마이클 샌덜이 지은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사람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습니다. 철학과 인문학 서적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리나라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현상이지요. 그런데 이 책이 100만부 이상 팔린 것은 단순히 저자가 하버드 대학의 교수이거나 이 책의 내용이 좋아서만은 아닐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정의롭지 못하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다는 것이지요.
우리들이 학교에서 배운 것은 정직하고 성실하게 살라고 배웠지만 요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정직하고 성실한 사람이 바보취급당하는 세상입니다. 정부는 공정사회와 친 서민 정책을 편다고 말하지만 요즘 우리가 접하는 소식들은 공정사회와는 거리가 멉니다. 온갖 불법, 탈법, 편법, 특혜와 불공정 사례들이 우리의 마음을 불편하게 합니다.
하느님은 이런 세상에서 우리를 하느님의 자녀로 부르셨고, 하느님의 정의를 세우라 하십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을 드러내라 하십니다. 한 주일 동안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에서 여러분이 만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정의와 거룩함을 드러내라 하십니다. 그런 삶을 살라고 오늘 이 자리에 부르셨고, 세상 속으로 나가라 하십니다. 오늘 우리가 드리는 성찬례는 바로 그런 믿음의 삶을 살아가겠노라고 다짐하는 시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