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성 칼럼] 묵빈대처와 만장회도

▲예수원교회 김성 목사.
붓다의 출가제자 가운데 찬다카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붓다가 출가하기 전 왕자의 신분으로 살던 당시, 붓다의 마부노릇을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붓다와는 오랜 친분을 쌓아온 사이였습니다. 붓다가 출가하여 수행 끝에 도를 깨닫게 되자 찬다카도 붓다의 뒤를 따라 출가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찬다카는 성질이 매우 괴팍하고 입이 거친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붓다와의 오랜 인연을 내세워 제자들 사이에서 짐짓 위세를 부리고 거들먹거리기 일쑤였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찬다카의 그런 꼴사나운 모습을 보기 싫어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붓다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임종 직전에 제자 아난이 붓다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스승께서 돌아가신 뒤에 찬다카는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그러자 붓다가 이렇게 답했습니다. “가만 두어라. 성품이 인색하고 악한 수행자는 침묵으로 대처하는 것이 가장 지혜로운 대처이니라.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껴 저절로 뉘우치게 해야 하느니라” 붓다는 아난에게 찬다카가 무슨 말썽을 피우든 제자들이 일일이 대응하지 말고 일절 침묵으로 대응하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러면 찬다카가 어떤 말썽을 피우든 스스로 사라질 때가 온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붓다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어떤 문제이든 항상 지속되지 않고 모두 다 한 때일 뿐이라고 가르쳤습니다. 무상(無常)하다는 말은 좋은 일이든 궂은 일이든 항상 계속되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모두가 한 때라는 말입니다. 때문에 어떤 문제이든 세월이 가면 다 풀리기 마련이니 문제가 생길 때마다 일일이 대응하기 보다는 침묵으로 대처하는 것이 상책이라고 붓다는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말(言)로 전하는 목사는 역설적이게도 입을 다물고 침묵해야 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문제를 만났을 때 많은 말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침묵하는 게 결과적으로 문제해결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서 목사는 교회 안에서 별별 시답지 않은 소리들, 사실과 다른 엉뚱한 소리들, 비방하고 음해하는 소리들을 들어도 그저 참고 침묵하는 게 상책이라는 생각에 말 못하는 바보처럼 애써 침묵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목사의 침묵이 곧 무언(無言)은 아닙니다. 침묵은 또 다른 말(言)입니다. 침묵은 때로 사실이 그렇지 않다는 부인(否認)의 말(言)이기도 하고, 때론 세월이 진실을 말해주리라는 기대가 담긴 인내(忍耐)의 말(言)이기도 합니다. 때론 마지못한 양보(讓步)이기도 하고 때론 포기(抛棄)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목사의 바램과 달리 침묵이 도리어 병통(病痛)을 깊게 만드는 경우도 있습니다.

목회자세미나에서 어느 정신과 의사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종이만 보면 손에 잡히는 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리는 이상한 습관을 가진 꼬마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종이만 보면 신문이든 책이든 달력이든 가리지 않고 손에 잡히는 족족이 찢어버리는 이상한 버릇을 가진 아이였습니다. 아무리 버릇을 고치려고 해도 고쳐지지 않자 아이의 부모는 결국 아이를 데리고 정신과를 찾았습니다. 몇 군데 병원을 다녀 보아도 의사들은 하나같이 그저 주의산만, 정서불안을 이유로 들 뿐 뾰족한 치료방법을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는 부모의 손에 이끌려 또다시 어떤 병원의 정신과를 찾았습니다.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에도 아이는 신문과 잡지를 찢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아이의 진료순서가 되었습니다. 아이는 의사 앞에 앉아서도 책상위의 종이를 집어 찢기 시작했습니다. 아이의 부모가 아이의 상태를 의사에게 대신 설명해주자 한참을 듣고 있던 의사가 마침내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너, 종이만 보면 죄다 찢고 싶지? 여기 방안에 있는 종이들도 다 찢어 버리고 싶지? 여기 선생님 차트도 찢고 싶지?” 아이가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러자 의사는 갑자기 진료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깜짝 놀라자빠질 만큼 큰 소리로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너, 이놈! 앞으로 다신 종이 찢지 마!” 방금 전까지 온화한 얼굴에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조근조근 작은 목소리로 말하던 의사의 갑작스런 벼락같은 호통에 아이는 물론 아이의 부모들까지 일순간 얼이 나간 듯 했습니다. 그리고 의사는 화가 난 목소리로 다시 아이에게 호통을 치며 다그치듯 물었습니다. “앞으로 또다시 종이를 찢을 건지 아닌지 여기서 말해. 빨리 말해!” 그러자 갑작스런 의사의 호통과 위세에 놀란 아이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다시는 종이 안 찢겠습니다.…”

그동안 만났던 의사 가운데는 종이를 찢는 아이의 이상한 버릇을 두고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종이를 찢는 것은 종이에 대한 분노 때문입니다. 아이가 종이로 인해 받은 어떤 트라우마(상처)가 있을 겁니다. 무엇 때문에 그런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는지 그걸 밝혀내서 치료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종이에 대한 아이의 분노는 사라지지 않을 겁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아이와 상담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그 의사는 결국 아이의 못된 버릇을 고치지 못했습니다. 의사가 종이 때문에 아이가 입은 상처 어쩌고 하는 동안에도 아이는 의사 책상위의 종이를 가져다 찢고 앉아 있었습니다.

아이의 버릇을 고친 것은 ‘앞으로 다시는 종이를 찢지 말라’는 벼락같은 호통이었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밝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현재의 병통을 고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과거의 원인을 캐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지금의 병통을 고치기 위해서입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지금의 병통을 고칠 생각은 뒤로 미룬 체 과거로부터 원인이나 찾는데 시간을 허비하고 있기가 일쑤입니다. 이 아이의 병통은 손에 잡히는 족족이 종이를 찢어대는 행위가 나쁜 행위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려주고 지금 당장 그 버릇을 그만둘 것을 벼락같이 호통 친 의사에 의해 고쳐졌습니다.

만장회도(慢藏誨盜)란 말이 있습니다. 주역 계사편에 나오는 말입니다. 집단속을 잘 하지 않는 것은 도둑에게 도둑질하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는 뜻입니다. 만(慢)은 게으르다는 뜻과 함께 허술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집단속을 허술하게 하는 것은 곧 도둑을 불러들이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옳지 않은 것을 보고도 옳지 않다고 말하지 않고 침묵하기 때문에 때로는 허위가 진실로 둔갑하기도 하고 침묵을 틈타 병통이 활개를 치며 깊어지기도 합니다. 결국 침묵할 때 바랐던 바와 달리 도리어 침묵이 병통을 방치하고 키우는 꼴이 되는 셈입니다. 묵빈대처(黙擯對處)와 만장회도(慢藏誨盜), 침묵할 때와 그 침묵을 깨고 말할 때, 그 때를 가늠하는 것, 목사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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