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이곤 칼럼] 6.25와 진실논쟁

▲한신대 김이곤 명예교수
6.25가 일어난 지 벌써 61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지나가고 있지만, 한반도에 6.25의 상흔은 여전히 남아서 한민족의 심혼을 괴롭히고 있음을 봅니다. 세월 탓으로 돌리기엔 너무나 불행스러운 현실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음을 봅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나는 우리 백성 사이에 내재하는 ‘좌·우’의 이념 분쟁이 점점 심화, 극대화되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읽습니다. 즉 극좌(極左)는 6.25 동족상잔의 반(反)민족적 살육전쟁을 ‘북침’이라고 우기거나 아니면 ‘미 제국주의로부터의 조선민족의 해방전쟁’이라고 하면서 역사의 ‘진실’을 왜곡하고 있고, 또 ‘극우’(極右)는 북한을 영원히 지상에서부터 지워내야 할 ‘아말렉’으로 정죄하고 ‘야훼닛시’(여호와닛시)의 깃발을 핏발 돋우며 높이 세우고 있습니다(출 17:14,16). 접점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통일 희구’는 좌파든 우파든 위선의 탈바가지 안으로 숨고 맙니다.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리하여 6.25의 진정한 교훈은 우리 후손들의 기억에서부터는 점점 사라져 갑니다.

문득! 구약 사사기 3:1-2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가나안 전쟁을 전혀 겪어 본 일이 없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을 시험하시려고 야훼께서 그 땅에 남겨 두신 민족들이 있다. (이는) 전에 전쟁을 겪어 본 일이 없는 이스라엘 자손의 세대들에게 전쟁이 무엇인지 가르쳐 알게 하여 주려고 그들(이방민족)을 남겨 두신 것이다.”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가슴에 박힌 불치의 ‘십자가 가시’가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대목입니다.

그러므로 작금의 한국의 민족 현실이 안고 있는 가장 심각한 문제는, 냉엄하게 살피면 기실은, 미국도 중국도 아니고 오히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좌·우 이념대결의 ‘교조주의’라고 생각됩니다. 역설적이게도 나는 이러한 현상을 통해서 기독교와 교회를 둘러싼 ‘참과 거짓에 관한 진실논쟁’이 문제되고 있음을 느낍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기독교를 가리켜 개독교라고 손가락질 하는 소리도 듣고 또 오늘의 지상교회를 향하여 “예수 없는 예수교회들이여, 너희들의 교회 안에도 도대체 ‘구원’이란 있는가?”라며 힐책하는 예언자적 소리도 듣게 됩니다. 마침내는 “한기총(한국기독교총연맹)은 없어져야 한다!”는 부르짖음도 들려왔고 또 “오늘 개신교의 대교회주의의 작태는 중세의 교황교권시대의 모습 그대로다!”라는 날카로운 비탄의 소리도 듣기에 이릅니다. 그런데도 더욱 불행스러운 것은 지상교회들은 이러한 예언자적 소리에 결코 귀 기울이지 않고 ‘멸망의 자기 길’을 망설임도 없이 자신만만 고집스럽게 내달리기만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겔 18:29-32, 눅 23:34)

나는 이러한 교회의 ‘자폐증적 질환’의 그 근본원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결코 모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근본원인은, 분명, 오늘 교회가 ‘말씀’을 가르치지도 않고! 또 ‘말씀’을 들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삼상 3:1)

오늘 교회들이 비록 예배의전만은 참으로 열심히 잘 지키고는 있으나 그러나 단지 그들은 성전마당만 밟을 뿐이기 때문입니다.(사 1:12; 마 7:21-23) 그리하여 성전에 가서는 오히려 죄만 더욱 짓기 때문입니다.(암 4:4-5; 5:4-6; 마 21:13; 렘 7:4-7)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을 헤아려 알려고 하지는 않고! 오직 단지 부적처럼 성서문자만을 외우려고만 하기 때문에(마 7:21; 고후 3:6), 그리고 이러한 문자주의(근본주의) 신앙의 허상에 매여 한사코 ‘교회교리’만을 붙들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과 그 ‘뜻’에는 전혀 관심도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한다!”(호 4:6)라는 예언자 호세아의 말의 의미를 ‘지식주의’로만 오해, 곡해하고 하나님의 뜻(하나님의 구원의 뜻!)에는 전혀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황무오신앙, 성서문자무오신앙, 교리무오신앙이라는 덫에 걸려서 오늘 교회가(성직자나 평신도나) 전혀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는 바로 그 점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노력을 ‘지식주의’로 매도하고 스스로 ‘교회주의의 올가미(trap)’에 자진해서 걸려듭니다. 예수 오신 이후, 지금까지의 2000여년 기독교·교회 역사의 비극은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즉 기독교가 경전종교이기를 거부한 거기에 문제의 근본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무도 성서를 바로 가르치려 하지도 않고 아무도 성서의 ‘바른’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교회마다 앞다투어 성경공부 프로그램을 개설하고 열심히 독려는 하지만, 말씀의 진의(眞意)를 알려고 하지는 않고 성서문자를 마술적인 언어로 또는 부적처럼 신봉하기만을 요구하기 때문에 오늘 교회와 오늘 기독교가 부패의 덫에 걸려 헤어나지를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가 사회를 염려하지 않고 도리어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는 주객전도의 모순’이 생겨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실로 마치 유대교 전통과 힘겹게 싸우던 예수님의 모습을 방불케 하는 상황이기도 합니다. 오죽하면, 예수님께서 선민(選民) 유대인들에게 “이 성전이 너희 눈에는 도적의 굴혈로 보이느냐?”(렘 7:11; 미 21:13; 막 11:17; 눅 19:46)라고 말씀하시며 분노를 발하셨겠습니까?

오늘의 기독교를 가리켜 개독교라고 하고 오늘의 교회를 예수 없는 예수교회 또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회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6.25를 남침이 아니라 북침이라고 우기는 우매함과 마찬가지라고 하겠습니다. 즉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을 ‘어버이’라고 신격화하는 무지와 맞먹는 무지라고 하겠습니다. 좌파는 사실(fact)을 부인하고 우파는 사실을 과장합니다. 이러한 극단의 이념대결 구도의 몽매함 속에서부터 감히 나는 오늘 기독교와 교회의 몽매함과 무지를 봅니다. 기독교인들의 십자가군 전쟁(Crusade)과 아랍계 이슬람들의 ‘지하드’(Jihad)가 모두 무신론적 미친 짓이요 저주받을 사탄의 행각임을 왜 기독교와 교회는 모르는지 정말 알다가도 모를 기이한 현상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왜 기독교와 기독교 교회가 ‘지식주의 배척!’이라는 얄궂은 교리를 만들어 놓고, ‘믿음으로만!’(sola fide) 또는 ‘은총으로만!'(sola gratia)이라는 교리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무지(無知)라는 오류(誤謬)에 스스로 기꺼이 빠져서 성서를 결사적으로 가르치지도 공부하지도 않으려고만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의중(意中)에 대해서는 전혀 무지하기를 좋아하고(!) 단지 교회출석만을 독려하고 교회확장만 도모하여 대형교회만을 꿈꾸는 우리들!! 우리가 회개할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진실을 왜곡한 죄가 이토록 큰 것입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 추방하고 안방차지를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거짓과 뻔뻔함, 괜찮지 않는데도 ’괜찮다‘ ’괜찮다‘라고 말하는(렘 6:14 cf. 렘 7:4) 이 거짓행각을 우리는 청산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아직도 여전히 거듭거듭 죄만을 짓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죄인 줄도 전혀 모르고 있는 것(눅 23:34)을 봅니다. 슬프기가 그지없습니다. 한국교회는 그러므로 하루 속히 회개부터 먼저!! 하여야 할 것입니다.

한국인 네 명 중 하나는 기독교 교인(교회인)이라서 매일같이 거리를 오가며 옷깃을 스쳐가는 저 이웃이 목사고 장로고 권사고 집사고 하다는데 왜 이 사회는 더욱 더 갈수록 악해져만 가는 것일까요? 엘리 제사장의 가문이 몰락하던 위기의 때처럼, “야훼의 말씀이 희귀하여 비젼(이상, vision)이 흔히 보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삼상 3:1).

최근 나는 90세 노병, 백선엽 장군(1920년생)의 6.25전쟁 이야기인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서울: 중앙일보, 2010, 2011)라는 책을 접할 수 있었습니다. 총 3권으로 된 이 책의 제 1권의 pp 231-339 중 pp. 305-306은 다부동(多富洞)이라는 곳에서 국군 제1사단이 마지막 방어선을 치고 생사의 결전을 하였던 당시의 전황을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전 국토가 북한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대구와 부산만이 간신히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을 무렵, 그것도 대구에서 겨우 20킬로미터 밖에 떨어지지 않은 ‘상주와 대구를 잇는’ 대구 북방근교의 한 비탈진 산악(다부동 산골)에 마지막 배수진을 친 상태에 있었던 제1군 사단장 백선엽 장군은 후퇴하는 아군들을 그 산 중턱에서 홀로 서서 가로막아 놓고, 사격술이 전혀 평균 이하인 지휘관 주제이면서도, 단지 권총 한 자루만 들고서 단신(單身)으로 산정(山頂)의 적진을 향해 오르기로 결심을 하고, 출발 직전 휘하 장병들에게 비장하게 남긴 다음의 말은 우리의 ‘진실논쟁’을 감격 속에 종결짓게 합니다.

“정말 잘 싸웠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물러설 곳이 없다. 여기서 밀리면 우리는 바다에 빠져야 한다. 저 아래에 미군들이 있다. 우리가 밀리면 저들도 철수한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끝이다. 내가 앞장서겠다. 내가 두려움에 밀려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라. 나를 믿고 앞으로 나가서 싸우자.” “… 300미터쯤 올랐을까. 누군가 내 어깨를 부여잡았다. 억센 손길이었다. 또 누군가 내 허리를 잡았다. 역시 힘센 손이었다. 나는 더 이상 달려 나갈 수가 없었다. 뒤에서 소리가 들렸다. ‘사단장님, 이제 그만 나오세요. 우리가 앞장서겠습니다.’ 내 부하들이 나를 잡아당겼다. 그리고 그들은 포탄이 넘나드는 그 곳을 향해 쏜살같이 앞으로 나갔다.”(『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라』pp.305-306)

이 언어는 사실(fact)의 문학화 이상(以上)이었습니다. 꺼져가는 등불인 대한민국을 구사일생 꺼지지 않게 그 ‘불씨’ 살려놓아서 마침내 오늘의 선진대한민국에 이르게 한 ‘구국(救國)의 순국언어(殉國言語)’였습니다. 진실논쟁은 이렇게 결론이 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무엇인지는 너무도 분명한데, 그런데도 오늘 교회는 결사적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지시하신 교회의 본래적 사명으로부터 멀어져 가려고만 애쓰고 있습니다. 문제는!! 지도자도 피(被)지도자도 모두가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다는데 있습니다. 지도자도 피 지도자도 모두가 신(神)의 뜻과는 무관하게 자기 편리한대로 기독교와 교회에 대한 정의(定義)를 정해 놓고는 누가 뭐래도, 설령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 하여도, 자기가 잘못 정의한 그 기독교만을 신봉하고 자기가 잘못 정의한 교회 관만을 고집한다는 데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자를 향하여 ‘사탄’이라고 규정하셨고 그를 향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는도다.”(마 16:23; 막 8:33)라고 질책하셨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는 ‘다부동’ 전선에서 백선엽 장군이 조국을 위해 자기 한 몸 던지듯, 그리고 적들이 몰려 내려오는 산정을 향해 자기를 던져 내달아 오르며 부하들을 향해 ‘나를 믿고 나가서 적과 싸우자’ 라고 외쳤듯이 교회도 또한 세상을 향하여 이러한 구원의 언어를 창출해내어야 하고 이러한 구국결단 행위를 도출해 내야 할 것입니다. 놀랍게도, ‘교회’라는 언어는 공관복음서 중 오직 마태복음 한 곳, 즉 마태 16:18에만(!!) 나옵니다. 공관복음서 어디에도 이곳 이외에서는 ‘교회’라는 말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리고 또한 평행본문인 마가 8:29와 8:30사이에도, 그리고 누가 9:20과 9:21 사이에도 “교회를 세우겠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빠져 있습니다. 그 대신 단지!! 아, 오직 단지!! 세 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모두가! 이 말씀 다음에 올 말씀으로서는 오직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 죽임을 당하신 후, 제 삼일에 (사망권세를 격파하고) 부활하실 것을 예고하시고 동시에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막 8:34; 눅 9:23)라는 요구만을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교회와 오늘 기독교가 다들 ‘경전(성서) 이탈의 중범죄’를 짓고 있으면서도 그 죄를 죄로서 인식치도 못하고, 아모스 예언자가 비난하였듯이(암 4:4-5), 부지런히 성전으로 달려가서는 더욱 힘써 죄를 더하기만 하고 있으니 이 어찌 염려스럽지 않겠습니까? 교회가 짓는 죄가 어디 한 두 가지라야 예언자가 참고 기다려 보지요. 교회가 사회를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교회를 염려하는 본말전도(本末顚倒)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데도 교회는 자기의 잘못이 무엇이지 조차 모르고 있으니 예언자들이 어찌 탄식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성서를 통하여 하시는 이 말씀을 들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젠 진실논쟁을 정리해 봅시다.

(1)‘믿음으로만’ 그리고 ‘은총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가르침은 결코 그 무슨, 하나님의 뜻은 몰라도 ‘교회 안에만 들어서면’(성전 마당을 열심히 밟기만 하면) 그리고 교회교리를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자동으로 구원받는다는 의미의 말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그렇게 믿는 것은 단지 죄악일 뿐입니다.

(2)‘하나님의 말씀’인 성서는 깊이 연구를 해서는 안 되고 무조건 믿어야 하며 그 글자들 하나하나가 마술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부적(符籍)과 같은 것이라고 믿는 그 믿음은 우리를 오도(誤導)하여 오히려 우리를 멸망에로 이르게 합니다. 호세아 예언자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도다”(호 4:6)라고 한 말은 세상 지식이나 성경지식이나 신학적 지식이나 또는 신령스러운 지식(靈知; 그노시스, gnosis)을 두고서 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대한 바른 이해’를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지(救援意志)를 자연, 역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연구를 통해서 깨닫는 것, 그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은 “어려운 것도 아니고 먼 것도 아니며 …(우리에게) 매우 가까워서 우리 입에 있고 우리 마음에 있는 것이므로 우리가 (남녀노소, 지식 정도의 차이를 가릴 것 없이 누구든) 이를 능히 실천할 수 있는 것”(신 30:14)일뿐입니다.

진실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이 무언지 아는 것만이 중요하다는 것, 그것입니다. 구약 미가 6:6-8과 신약 마태 7:21이 우리의 진실논쟁에 대한 가장 확실한 대답을 제시하고 있으며 ‘구원의 길’도 바로 거기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나더러 입으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바로 알아 그 뜻대로 사는 자라야만 구원받을 수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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