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63)

경건주의 운동과 선교활동



제9장 경건주의 운동과 선교활동

1. 독일 경건주의 운동

30년전쟁 기간에 영적 각성과 부흥을 일으키려는 사람들이 보헤미아와 영국과 독일과 네덜란드 지역에서 개별적으로 나타나서 영성 회복을 위한 책을 저술하거나 찬송가를 작사해서 부르게 하거나 심지어 신비주의적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중에서도 그리스도인들을 영적으로 부흥시키고 도덕적으로 쇄신시켜 경건을 사모하게 한 사람은 독일 스트라스부르크의 목사 필립 슈페너(Philipp Jakob Spener, 1635~1705)였다. 그는 전쟁의 피해로 영적으로 피폐해져 있던 교인들이 재생할 수 있도록 그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하려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주일날 예배 후에 교인들을 자택에 불러모아 그날 자기가 설교한 것을 가지고 서로 토론하고 같이 기도하고 성경공부 하였다. 이 운동이 점점 확산되어서 이러한 모임이 「경건회」(collegia pietatis)라고 불렸다.

그의 이러한 경건운동은 몇 가지 중요한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교회에서 공적으로 성서 읽기와 성서 해석을 집단적으로 가질 것과, 가정에서 가족끼리 또 개인적으로 성서를 읽고 말씀을 이해하도록 노력할 것과, 이러한 모임에서 절대로 논쟁하지 말 것과, 교인 각자가 목사처럼 되어서 이웃을 위하여 기도하고 구제하고 그들의 영혼을 치유하여 줄 것과, 이웃의 허물은 사랑으로 덮어주며, 지식보다는 행함에 역점을 둘 것 등이었다. 또 목사 교육을 새롭게 하기 위하여 신학생이 신학논쟁을 다루는 서적보다는 신앙교양을 위한 책을 많이 읽을 것과, 특히 토마스 아 켐피스의 책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열독할 것과, 설교는 신학적 지식을 과시하지 말고 단순하게 그리고 신앙을 일깨우고 교화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을 강조했다.

슈페너가 처음에 조직한 작은 성경공부 모임을 「교회 안의 작은 교회」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는 1675년에 「경건의 동경」(Pia Desideria)이란 책을 썼다. 그는 의식주를 간소하게 하여 살 것을 이 책에서 강조하였고, 교인들의 카드(card) 놀이와 춤추는 것과 극장구경을 금하였다. 그는 루터교인이었는데 그의 목회 방법이 루터교회의 교리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루터교회로부터 반대를 받았다. 그는 사람이 올바로 회심하고 올바른 마음을 가지면 교리의 차이는 상대적으로 문제가 안 된다고 생각했다. 프랑크푸르트에서는 시청 당국자의 반대도 있었는데, 슈페너의 교인들 중 공중예배에 참석하지 않고 성만찬을 거절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라이프치히(Leipzig)대학과 비텐베르크 대학 교수들도 그를 공격하였고 삭소니 주 군주의 공격도 받았다. 그가 한때 그 군주를 술꾼이라고 질책한 일이 있었다. 그는 이 책에서 정부관리들의 타락과 무신론적인 생활과 정치인들의 부도덕성과 부유층 사람들의 불경을 질타하였다. 그러나 그는 후에 프러시아(Prussia)의 왕이 된 브란덴부르크의 군주의 초대를 받고 베를린(Berlin)에 와서 노년을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으면서 보냈고 그의 경건운동은 독일에서 널리 전파되어 갔다. 그의 영향으로 독일에 할레(Halle)대학이 설립되어 경건운동의 고장이 되었다.

슈페너의 후계자가 된 사람은 라이프치히 대학의 한 젊은 교수 어거스트 프랑케(August Francke, 1663~1727)였다. 그는 그 대학에서 성서애독 모임을 조직하여 「성서사랑모임」(collegium philobiblicum)이라고 불렀다. 그는 20대 청년기에 거듭남을 경험하고 경건운동을 실천하였다. 그러나 그는 반대를 받고 그 대학에서 쫓겨나 할레로 왔다. 그는 슈페너와 몇 주 동안 같이 지내다가 그의 제자가 되었고, 브란덴부르크의 선제후가 세운 이 할레대학에서 슈페너의 추천을 받아 교수로 임명되었다.

프랑케는 이 대학의 신학교 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경건운동을 독려하여 젊은 학생들이 목사가 되게 만들었고 새 교육법을 가지고 경건운동을 발전시켰다. 또 고아원을 세워서 교회의 자선사업을 격려하였다. 그는 동양의 언어를 가르치는 과목을 만들어서 학생들이 장차 해외로 선교사로 나갈 수 있게 준비시켰다. 그의 학생 두 사람이 1705년 인도 선교사로 파송되었는데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최초의 외국 선교사였다. 그리고 아메리카의 독일 식민지에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 무렌베르흐(Muhlenberg)도 이 할레대학 졸업생이었다. 유대인들에게 파송된 졸업생도 있었다. 이렇게 프랑케의 지도 아래서 할레대학은 선교사 양성기관이 되었다.

슈페너의 경건주의 운동은 독일 국내에 반대자들도 있었지만, 스칸디나비아(Scandinavia) 지역의 노르웨이와 중앙유럽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등지로 번져 갔다. 특별히 모라비아의 한 공작 친젠돌프(Zinzendorf, 1700~1760)가 경건운동의 감화를 받고 할레대학에 와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젊고 감수성이 강하고 열정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이어서 경건운동의 부흥적인 특성을 살렸다. 그는 자기의 소유지에 교회를 세우고 그 지방민들과 일체가 되었고 스스로 그 교회의 목사가 되었고, 나아가서는 감독교구를 세우고 정식 감독들을 두었다. 그가 세운 교회는 독특한 예배의식으로 독특한 찬송가를 부르는 열정적인 한 교단이 되었다. 사도시대의 교회로 되돌아가려는 생각으로 제비뽑기와 발을 씻어주는 세족례를 실시하고, 교인들을 분류하여 작은 단체들을 만들어서 활동도 다르게 했다. 그리고 공동으로 노동하고, 예배 때는 악기와 성악가를 동원하여 노래를 부르고, 그리스도의 상처를 경배하는 의식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고난과 피와 땀을 가사로 한 찬송을 많이 부르고, 신비한 감상을 즐겼다.

이 교회를 모라비아 교회(Moravian Church) 또는 모라비아 형제단(Moravian Brethren)이라고 불렀다. 열광주의에 가까운 성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박해를 많이 받았다. 종교적 감정이 강하여 전통적 교리에서 벗어나기도 하였고 얀 후스의 정열의 후계자들이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그 지방의 로마가톨릭교회의 박해를 받고 3,600 가정이 그 지역에서 떠날 수밖에 없었다. 1620년에서 1727년 사이에 이 교회는 지하교회처럼 잠재해 있기도 했다. 그러다가 1727년에 친젠돌프가 모라비아 교회를 재건하였고 오랜만에 루터교인들과 모라비아 교인들이 함께 성만찬 예식에서 성찬을 받았다. 1739년 친젠돌프가 그 교회의 감독이 되었고 루터교회로부터 독립하였다. 그리고 그는 아메리카 펜실베니아 주를 개척하여 거기서 모라비아 교회를 이어갔다. 모라비아 교인들은 열렬한 선교열을 가지고 원주민들에게 선교하였다. 모라비아 교회의 선교운동은 유럽의 다른 교파들의 선교활동을 진작시켰다.

2. 미국 신대륙 선교운동

콜럼버스(Columbus, 1456~1506)가 아메리카 대륙을 1492년에 발견한 후 로마가톨릭교회는 일찍부터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로 선교사들을 파송하기 시작했고,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북아메리카에 있던 영국 식민지 13개 주에 선교사를 보내 교회 개척을 시작했는데, 이 교회들이 성장하여 18세기 중엽 대각성운동을 일으켜 교회가 크게 부흥하였다. 이곳 식민개척기에 교회를 세우고 힘든 선교를 한 사람들은 영국, 독일, 네덜란드에서 건너간 목사들이었다.

버지니아의 영국성공회 선교

영국이 아메리카의 버지니아(Virginia) 주에서 최초로 식민지를 개척한 것은 1607년 1월 21일이었다. 1611년 이 식민지 최초의 총독 토마스 데일(Thomas Dale)을 따라 105인 이민단과 함께 알렉산더 휘태이커(Alexander Whittaker) 목사가 왔다. 그는 일찍이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를 찾아 홀랜드로 이주한 청교도였다. 아메리카에서 1612년에서 1617년까지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하였다. 그리고 영국 교회가 정식으로 파송한 식민지 교회 목사는 로버트 헌트(Robert Hunt)였고 제임스타운이 중심지가 되어 영국의 식민지 개척 회사와 무역회사들이 속속 들어왔다.

1609년에 버지니아 식민 회사는 처음으로 지사를 두고 헌장을 만들었고 런던의 무역회사들의 투자가 늘어났고, 식민지 개척이 영국의 경제적 이익을 위하는 것이 주목적이 되어갔다. 식민인구가 점점 늘어감에 따라 교회 목사들도 많이 들어와서 영국의 국익과 경제적 이익만을 위하는 식민정책을 비판하는 설교를 했다. 목사들은 만민이 회개하고 복음을 받게 하는 선교의 사명을 위해서 때로는 식민개척자들을 비판하였다. 최초의 식민지 총독 데일은 독실한 신자여서 ‘버지니아의 사도’라고 불렸다. 그가 만든 소책자에서 자신의 식민개척 정신을 밝히면서 선교는 식민지 개척의 중요한 목적이라고 말하고 식민 회사와 함께 교회를 세우는 일을 도왔다.

휘태이커 목사는 열렬한 이방선교 사도가 되어 제임스타운에서 70마일 떨어져 있던 인디안 마을에 가서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영국 교회에 호소하길 이곳 식민지에 백색법의를 입은 법관과 기부금보다는 젊고 착한 사람들을 많이 보내달라고 말하고, 이곳에는 소수의 청교도 목사들이 활약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때 이곳에 온 청교도 목사들은 영국성공회에 속해 있었고 비국교도 청교도들이 생기기 전의 사람들이었다.

원주민 인디안 선교는 쉽지 않았다. 왜냐하면 식민지 개척 초기에 영국에서 온 사람들이 대개 교육수준이 낮고 본국에서 행악자로 감옥에 갇혔다가 개척 노동자들로 모집되어 온 경우가 많아, 성격이 거칠고 음주와 도박과 음탕을 즐기고 원주민들을 학대하거나 괴롭힌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식민 정부의 법은 매우 엄격하여 처벌이 무거웠다. 원주민 선교가 쉽지 않았으나 소수의 청교도 목사들이 원주민 마을에 들어와서 선교하고 학교와 교회를 세웠고, 원주민 추장의 가족의 한 사람인 포카혼타스(Pocahontas)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영국에 와서 교육을 받고 원주민 선교에 협력하였다. 그가 중심이 되어 인디안 마을에 학교와 교회 설립을 위하여 모금한 돈 1,500 파운드를 가지고 헨리코(Henrico)대학을 설립하였고 영국 교회 목사들이 증파되었다. 1624년 6월부터 버지니아의 식민 개척 회사의 지배는 끝나고 영국의 왕이 이 식민지를 통치하게 되었다. 영국 본토의 청교도혁명 시대에는 버지니아 교회도 분열의 진통을 겪었다. 1671년의 경위보고서에는 버지니아에 교구가 48개였으나 교역자들이 정신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해이해 있었고 사회의 문화적 수준은 아직 저급하였다. 영국성공회 선교는 버지니아 주와 메릴랜드(Maryland) 주 밖으로는 확장되지 못하였다.

플리머스 청교도 선교

1620년 11월에 영국의 청교도 102명이 신앙의 자유를 찾기 위하여 미국 동북 보스턴(Boston) 지역의 플리머스(Plymouth)에 상륙하여 정착하였다. 홀랜드에 이주해 살던 영국 청교도들도 합류하였다. 이때 들어온 청교도들은 대부분 케임브리지대학 출신의 지식인들과 그들의 가족들이어서 농사지을 줄도 몰랐고, 장사하는 상인들도 아니었으므로 정착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곳 원주민 인디안들의 호의와 도움으로 농사해서 첫 해에 수확한 농작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예배 드린 것을 미국의 추수감사절의 기원으로 삼고 있다.

이때 이들과 같이 온 목사는 존 로빈슨(John Robinson)이었고 이들은 영국의 국교에서 분리된 신도들이었고 대부분이 회중교도(Congregationalists)였다. 이들에게는 교회공동체가 그들의 시민단체였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즉 교회와 시민사회가 같은 조약(compact)을 헌법으로 삼았고 1691년 근처의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주와 연합하면서 이 조약이 교회와 정부의 헌장이 되었다. 즉 교회제도가 정치제도가 된 신정정치 체제였다.

로빈슨 목사가 죽은 후 수년 동안 플리머스 순례자(청교도)들은 목사 없이 지내다가 1629년에 랄파 스미스(Ralpha Smith) 목사가 부임해 왔다. 청교도 이민자 수가 날로 불어가, 1628년 9월에는 300여명 그 이듬해에는 900여명의 이민자가 들어왔다. 1640년 영국에서 청교도혁명이 일어났을 때는 2,000여 명이 들어왔다. 그중에는 유식한 신사가 많았는데 그들은 이곳 식민 회사를 영국 정부의 간섭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으로 조직하였다. 이민자 중에는 비기독교인들도 상당히 많았는데 이 무렵 약 5분의 1이 기독교인이라고 고백하였다.

이곳의 교회 제도와 시민사회의 제도는 영국의 회중교회 제도와 같은 것이었다. 그것은 교회가 평신도 중심으로 운영되고, 자의에 따라 교회 회원이 되거나 교회에서 탈퇴할 자유가 있는 계약(covenant) 관계의 제도였다. 즉 교회는 자의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단체이며 그 회원들이 교회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즉 교회는 신도 중인(衆人)들의 합동체로서 이 모델이 매사추세츠 주의 교회와 정부의 정치제도였고, 이것이 나중에 각 주가 자의적으로 연합하여 미합중국이라는 나라를 만드는 모델이 된 것이다.

미국 동북 지역에 영국 이민자들이 개척한 주가 4개 있었는데 이 지역을 묶어서 뉴잉글랜드(New England)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영국의 유능한 정치사상가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모여들었고, 그 결과 정치적 문화적으로 앞서게 되어 미국 국가 창설에 지도적인 역할을 하여 ‘청교도 미국 건국’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뉴잉글랜드 주의 초대 총독은 존 윈드롭(John Winthrop)이었다.

뉴잉글랜드의 청교도 교회 제도는 회중교회 제도였고 청교도의 신앙에 따라 지은 교회의 목조건물은 평범한 조립식 사각형 교회당이었다. 남녀 좌석은 구별되었고, 청소년들은 뒷자리나 복도에 앉았고, 장로와 집사는 회중을 마주보고 앉았고, 설교단은 회중을 마주보고 높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서의 설교자의 권위를 높이는 것이 되었다. 헌금을 나라의 조세처럼 엄수하였고, 찬송은 시편을 많이 불렀고, 예배시간에 공중기도 할 때는 모두 서서 기도드렸고, 설교는 한 시간 동안이었다. 그리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했다. 1636년 9월에 존 하버드(John Harvard) 목사가 병석에서 임종을 앞두고 779 파운드의 헌금을 대학 설립을 위해 낸 것이 하버드대학 설립기금이 되었다.

홀랜드 개혁파교회 선교

1621년에 뉴욕(New York) 지역에 홀랜드의 식민 회사가 설립되었고 홀랜드 칼뱅주의 교파가 이곳에서 선교를 시작했다. 이후 1664년에 영국이 뉴욕 지역을 점령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 지역에는 14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이민자들이 살고 있었고, 그로부터 10년이 지나서는 18개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살게 되었다. 그중 가장 유력한 사람들은 홀랜드의 개혁파교회에 속해 있었고 개혁파교회가 뉴욕 주의 주립 교회가 되었다.

뉴욕 주에는 개혁파교회 이외에 다른 프로테스탄트 교파 교인들이 이민 와서 살고 있었는데 개혁파교회의 박해를 받았다. 영국의 퀘이커(Quakers) 교도들이 박해를 받고 뉴저지(New Jersey)에 이주하여 정착하였다. 그 후 영국의 한 귀족의 아들 윌리엄 펜(William Pen)의 지도 아래 퀘이커 교도들이 펜실베니아(Pennsylvania)로 이동하여 정주하였다. 퀘이커 교파의 창시자 조지 폭스(George Fox)도 이 지역을 방문하고 설교하였다. 퀘이커 교도는 펜실베니아 주를 자기들의 본거지로 삼고 성장해 가서 1760년경에 퀘이커 교도는 3만 명이 되었다. 이들은 미국 원주민 선교에 힘썼고 그들에게 술을 주지 않게 하여 음주 습관을 고쳐 주었다.

모라비아 형제단 교회 선교

이들은 1730년대부터 해외선교를 시작하였고, 친젠돌프가 필라델피아를 방문하고 선교하였다. 그는 아메리카 원주민 선교에 열심이었고 인디안의 추장 6명이 사는 촌락에 들어가 모라비아 교인들과 같이 살았다. 모라비아 교인들은 모두 열정적인 설교자들이어서 예배를 부흥집회처럼 인도하였다.

장로교회의 선교

매사추세츠 주의 청교도들 중 장로교인들이 있어서 그곳 교회를 장로교 제도로 만들려 했으나 실패하고 회중교회 제도가 되어서 장로교 선교사가 그곳에 와서 선교하거나 목회할 수 없었다. 뉴욕 주에서 홀랜드 개혁파교회 제도 아래서도 장로교 목사가 박해를 받았다.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의 장로교 계파의 목사 프란시스 매케미(Francis Makemie)가 1707년에 뉴욕에 가서 허가 없이 설교하다가 체포되어서 뉴욕 주지사에게서 벌금형을 받고 추방되었다. 매케미 목사는 다른 장로교 목사들과 필라델피아에서 장로교를 조직하였다. 1717년에 장로교 노회를 조직하였는데, 17인의 목사 회원 대부분이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온 사람들이었다. 1729년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채택하였고 1758년에 총회를 조직하였을 때 16개 노회가 4개 지방회(synod)로 나눠져 있었다.

루터교 선교

1734년에 필라델피아에 루터교인 이민자들이 들어왔고 수년 후 그들의 수는 급증하여 1,200명이 되었는데 독일 외 다른 유럽 국가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다. 할레대학이 루터교회의 미주 선교를 계속 지원하였다. 미국 루터교회는 독일 본국 정부가 미국에 온 루터교회 목사들의 봉급을 지불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나 할레대학의 프랑케 교수가 이 요청을 거절하고 미국 루터교회의 자립을 권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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