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한복음 19:1~6절
설교문
몇 년 전 프랑스의 어느 지방에서 한 트럭이 고갯길에서 미끄러져 백화점을 들이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9명이 죽고 40명 가까운 부상자가 생겼습니다. 사고 직후의 경찰조사로는 브레이크 고장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러나 경상을 입고 병원에 입원하고 있던 운전사는 사고 다음날 라디오방송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책임은 전적으로 내게 있습니다”고 대답했습니다.
브레이크가 고장이 난 것은 사실이지만 직업적인 운전사로서 사람들이 붐비는 백화점을 들이받지 않도록 할 수는 있었다는 것입니다. 타임지는 이 사실을 크게 보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습니다.
“그 운전사는 사고의 충격에서 미처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에겐 변호사와 상의할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또 그가 자기잘못을 뉘우친다 해서 유가족들의 슬픔을 달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적어도 ‘내 잘못이 아니다’라고 책임을 회피하지 않은 그가 얼마나 신선하게 보이는지 모른다.”
이 기사 제목은 ‘나는 아니다의 세대’였습니다. 우리는 남이 잘못을 저질렀을 때 ‘나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을 때도 그건 내 탓이 아니라고 변명합니다. 그리고 책임을 사회 환경에 돌리고, 가족상황 탓으로 돌리는데 익숙합니다. 우리는 한마디로 책임을 질줄 모르는 세대에 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책임을 회피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대학교수는 “우리 대학교에 저런 형편없는 녀석이 들어온 것은 수치야. 우리나라 중, 고등학교 교육이 문제야. 그 책임을 져야 해”라고 말하며 중, 고등학교에 책임을 돌립니다. 중,고등학교 교사는 “나는 저런 말썽꾸러기 학생을 맡지 않았어야 했어. 초등학교에서 아무런 준비 없이 그냥 중, 고등학교에 보낸단 말이야”라며 초등학교에 책임을 돌립니다.
초등학교 교사는 “저런 멍청이, 왜 저따위 애를 학교에 보낸단 말인가? 유치원에서는 뭘 가르친 거야?”라며 유치원에 책임을 돌립니다. 유치원 보모는 “저렇게 말 안 듣는 애는 처음 봤어. 도대체 저 애의 어머니는 어떤 사람일까?”라며 부모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어머니는 “불쌍한 내 자식. 그러나 알고 보면 그 애 잘못도 아니지. 그 애의 친가 조상들이 모두 그 모양이었다니까”라며 남편 조상에게 책임을 돌립니다.
우리 자신의 죄와 실패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은 매우 쉬운 일입니다. 아담도 자신의 죄를 하와에게 덮어 씌웠습니다. 사울왕도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고 나서 그 책임을 백성들에게 전가하였습니다. 본문의 빌라도 역시 자신의 책임을 유대 백성들에게 전가했습니다. 유대인의 고발을 받아 재판을 했는데, 그는 예수에게 죄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를 정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예수를 십자가에 사형시키고 말았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주님 앞에서 책임을 지고 결단하는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말씀의 은혜를 받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책임을 전가하지 마십시오.
유대인들이 빌라도에게 예수를 고발하니 빌라도가 “너희가 그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요18:31)고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무죄한 예수를 재판하기가 민망했습니다. 죄가 없다고 하면 식민지 백성들인 유대인들의 미움을 사서 소요가 발생해 자신이 책임을 질수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과거에 빌라도의 잘못을 지적해서 로마 황제에게 상소한 바가 있었는데 또 하면 분명 총독 자리에서 물러 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빌라도에게 예수를 죽이라고 협박했습니다. 사형 판결을 하라는 압력이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에게는 아무 죄가 없는 사람을 무고히 처벌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믿지는 않았습니다. 그의 아내는 꿈을 꾸었다며 예수를 해치지 말라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것보다 죄 없는 사람을 죽여 벌이나 받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를 이렇게도 할 수 없고 저렇게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예수를 어떻게 처리할지 진퇴양난에 빠졌습니다.
그는 할 수 있다면 자기가 처리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떻게든 책임을 회피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에 대해서는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 스스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이 결단하여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받아 들여야 합니다.
철학자인 임마누엘 칸트는 무엇이든지 깊이 생각하고 결정하는 매우 냉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평소 친하게 지내던 여인으로부터 계속 청혼을 받았으나 쉽게 답변을 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답답했던 여인이 드디어 칸트에게 다가와 결혼 여부를 분명히 말하라고 다그쳤습니다. 칸트는 “생각해 보겠습니다”라고 간단하게 말한 뒤 바로 도서관에 가서 결혼에 관한 책들을 찾아 결혼에 대해 찬성하는 의견과 반대하는 의견을 모아 연구하며 결혼을 해야 좋을지 안해야 좋을지를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집에 찾아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당신의 따님과 결혼하기로 결정했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여보게 너무 늦었네 내 딸은 벌써 결혼해서 두 아이의 어머니가 됐다네”라고 대답했습니다. 사랑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철학자이든 과학자이든 사랑은 철학적 이론이나 과학적 논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인격을 믿고 그 사람을 사랑하겠다는 결단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은 머리로, 이성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이성도 필요하지만, 본질적으로 신앙은 이성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해요”라는 고백에 나와 있는 것처럼 이성적으로 믿기지 않아도 믿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성을 초월한 신앙은 주님을 신뢰하고, 그 주님을 따르겠다는 결단에서 시작됩니다. 결단하지 않고서는 신앙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각자 스스로 예수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그 분을 내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그 분을 찬양하며 살아야 합니다. 빌라도도 그 자리에서 책임을 회피하지 않고 예수에게 무죄 판결을 내리고 예수를 주님으로 모셨더라면 인류 역사에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존경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사형시킨 재판관이었기 때문에 악명 높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계 교회가 수천 년을 고백하는 신앙고백에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라는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살아도 예수를 모시지 않고 사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에 대해 올바른 처리를 하지 못한 빌라도처럼 사는 것입니다. 이 시간 지금 이 자리에서 각자 스스로 예수에 대한 결단을 해야 합니다.
2. 합리적으로 책임을 모면하려고 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큰 명절인 유월절에는 죄수 한 명을 사면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이것을 이용해서 죄 없는 예수에게 특별 사면을 하고 싶었습니다. 빌라도는 어떻게 해서든지 예수를 자신의 판결로 사형시키는 것을 피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을 보고 그가 착한 행동을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진심으로 착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진심으로 아꼈다기 보다는 죄 없는 예수를 죽여 자기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유월절 날 그를 석방시키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른 죄수 가운데 바라바라는 강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로마에 반항하는 민란의 주모자였고 살인과 강도를 일삼는 자로서(눅23:19) 흉악범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공분을 살만한 자였습니다.
그러기에 빌라도는 사람들이 예수와 바라바 중 바라바는 사형시키고 무죄한 예수를 석방시키라고 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군중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죽이고 바라바를 석방하라고 했습니다. 빌라도의 합리적인 대안도 군중들은 거부했습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채찍으로 때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기까지 하였습니다.
빌라도는 유대인들의 분풀이를 해서 그를 놓아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분풀이 가지고는 달랠 수가 없었습니다. 빌라도는 “보라 이 사람을 데리고 너희에게 나오나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함이로다,”(요19:4) “너희가 친히 데려다가 십자가에 못 박으라 나는 그에게서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요19:6)고 하면서 계속 석방시키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군중에게 항복하여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내어 주었습니다.
여기서 빌라도는 결단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책임을 회피했고, 군중들에게 그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빌라도가 자신의 책임을 져야 하듯이 우리들도 예수에게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내가 결단하고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예수에게 유리한 판단을 해야 합니다. 주님의 교회에 유리한 증언을 해야 합니다. 그것을 주님은 지금도 지켜 보고 있습니다.
3. 우리는 불의와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빌라도는 유대 군중들의 압력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지도자들이 가끔 백성들의 여론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 살려 보려고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여론에 무릎을 꿇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여론에 타협하고 마는 사람은 결코 믿을 수 없습니다.
빌라도는 예수가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으면 결단해서 석방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책임을 지면 됩니다. 그러나 그는 그 책임을 회피하고 유대인들에게 돌렸습니다.
아무리 약속을 했더라도, 또 그 약속이 아무리 올바르다 하더라도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다면 그만 그 약속을 져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면 안 됩니다. 한 번 약속했으면 그대로 해야 합니다. 그 약속을 할 때 깊이 생각하고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인가를 잘 생각하고 해야 합니다.
빌라도는 사람을 멸시하는 태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18:33)고 물었습니다. 그는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생각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유대인의 왕이라고 생각하는 이는 신앙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그는 그 질문으로 주님을 멸시한 것입니다.
또 빌라도는 예수께 “진리가 무엇이냐”고 물었는데 이것은 진실로 진리가 무엇인지 궁금하여 물은 것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조소하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빌라도에게는 카이로스였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진리에 대해서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그의 인생에 있어서 최고의 기회가 찾아왔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그 시간 예수를 진실로 영접했어야 합니다. 그 놀라운 축복의 시간에 주님을 영접했더라면 그는 인류 역사의 미래를 여는 위대한 선구자가 되었을 것입니다.
사단과 그의 졸개들이 성도들의 신앙생활을 방해하기 위한 공작 회의를 열었습니다. 젊은 엘리트 출신의 사단이 크리스챤을 죽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늙은 사단이 순교는 교회의 씨가 된다고 경고했습니다. 때리면 매 한 대에 예수가 열도 더 생긴다고 경고를 했습니다.
감옥에 가두자는 제안도 있었습니다. 가두면 열심히 기도하여 성령의 역사를 크게 일으키므로 손해라고 했습니다. 그 보다 더 좋은 전략이 없을까 하고 고심하고 있을 때에 늙고 지혜로운 마귀가 지혜를 짜내었습니다. “열심히 전도도 하고 사랑도 하자. 그러나 내일부터 하자”고 속삭이자는 전략이었습니다. 이 전략이 마귀의 최대 성공전략이었습니다.
히말라야 산 속을 가면 야맹조라고 하는 새가 있다고 합니다. 이 새는 낮이면 신나게 즐기다가 밤이 되면 잘 둥지가 없어서 다른 새의 둥지에 가서 거하며 밤새 구박을 받는 답니다. 그는 서러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내일이면 집 지으리,” “내일이면 집 지으리”하고 구슬프게 노래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야맹조는 자기의 일생이 다가도록 집을 짓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단은 다음에 하지, 내일하지 하고 우리를 무기력하게 유혹합니다. 그러나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바로 오늘, 지금 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오늘 이 자리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그를 찬양하고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모든 일은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결단해야 합니다. 내가 확실한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나의 결단으로 예수를 영접하고 주님의 축복을 받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