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한복음 19:25-27절
설교문
우리나라 축구가 별 볼일 없을 때 2002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이룬 히딩크 감독은 많은 사람들의 인정과 찬사를 받았고 그 후 세계에서 감독으로서 명성이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용병술은 후반전에 강합니다. 전반에 선제골을 내주고 맥을 못추던 팀도 하프타임 이후에는 전혀 다른 팀처럼 움직였습니다. 히딩크는 하프 타임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후반전을 시작하면 전반전에 별 볼일 없던 선수들이 갑자기 뛰어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전반전에 골을 먹고 패색이 짙었던 분위기가 뒤집어져 고 승리를 하기도 합니다. 이 때 무슨 마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프타임 때 후반전에서 고쳐야 할 전반전의 실수를 설명한 것입니다. 그는 선수들에게 할 수 있다는 투지, 정신력, 자신감을 불어 넣었습니다.
본래 선수들은 전반전에 선제골을 허용하면 위축되어 적극적인 플레이를 펼치기 힘들고 패배하게 됩니다. 그러나 전반전에 골을 넣은 선수들은 너무 뛰었기 때문에 체력이 소진되어 있어 역공당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때문에 자신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경기를 하면 충분히 승산이 있습니다.
히딩크는 이점을 중요하게 여겼고 선수들의 특징을 파악하여 그에 맞게 대응하도록 했고 자신감을 불어 넣었습니다. 2002년에 우리나라가 4강의 신화를 이룩한 것도 이런 히딩크의 마법 때문입니다. 무명의 선수로 축구 인생을 마감할 뻔한 히딩크가 세계적인 명장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꿈을 가지고 최선을 다한 결과였습니다. 인생이란 운동경기와도 같습니다. 청소년기를 전반전이라고 한다면 중년의 때는 하프타임이고 장년의 때는 후반전이라고 생각할 수있습니다. 인생의 전반전에 누구든지 실패할 수 있고 좌절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후반이며 미래입니다.
전반전이 끝나고 후반전이 시작되기 전 선수들은 하프타임을 갖습니다. 이 시간에 적당히 휴식만을 취하고자 한다면 후반전을 성공적으로 치룰 수가 없습니다. 하프타임은 전반전을 돌아보고 후반전을 준비하는 휴식시간이요, 작전타임시간입니다. 하프타임을 잘 가지면 역전할 수도 있고 하프타임을 쉬기만 한다면 역전패 당하기도 합니다.
인생은 운동경기와도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닙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하프타임을 산술적으로 정하는 것이 힘들 때가 많습니다. 우리는 어느 때가 하프타임인지를 알 수가 없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밑바닥이라고 생각했던 순간이나 예상치 못했던 만남 그리고 우연한 사건들이 훗날 돌이켜 보면 인생의 하프타임이었던 것을 알게 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을 때 네 여자가 주위에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였습니다. 네 사람은 정말 대단한 각오를 했던 여자들이었습니다.
그 당시 십자가형은 로마에서 역적죄를 지은 사람이 받는 사형법입니다. 역적이 죽을 때는 일가친척들도 그를 떠나는 것이 보통의 관례였습니다. 그의 주변을 맴돌다가 붙잡히면 무슨 처벌을 받을지 몰라서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사형장에 네 여자가 있었습니다. 이들은 대단한 각오를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물론 이 여자들 가운데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자신의 아들이니까 그럴 수 있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의 자식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비참하게 죽는 예수의 십자가 밑에서 끝까지 지키고 있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네 여자 중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와 막달라 마리아를 통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를 묵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입니다. 그녀는 예수의 이모였습니다. 마리아와 자매지간이었습니다. 예수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을 것입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잘 모셨고 그 두 아들들도 예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특별한 총애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곧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실 것을 말씀하셨을 때 그녀는 주님의 나라가 임하면 자기 두 자녀에게 가장 좋은 자리를 달라고 했습니다(마20:20). 소위 ‘청탁’을 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께서는 그런 야망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 자신이 가는 길이 얼마나 고난의 길인지 가르쳐 주셨습니다. 살로메는 예수로부터 책망을 받았습니다. 사람은 책망을 받으면 그 공동체에서 떠나든지 떠나지 않으면 불평불만분자가 되기도 합니다.
가룟 유다는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예수 일행을 대접할 때 마리아가 아주 값비싼 향유 한 옥합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머리털을 풀어 예수의 발을 씻는 것을 보고 마리아를 책망하였습니다.
“어찌하여 이 향유를 허비하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막14:4-5). 그때 주님께서는 “가만 두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 그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막14:6)고 말씀하셨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의 책망을 받은 후 대제사장에게 예수를 넘겨주려고 갔습니다. 가룟 유다는 예수의 책망을 마음 속으로 잘 새기지를 못했습니다. 물론 꼭 그것 때문에 가룟 유다가 배신한 것은 아니지만 책망이 배반의 시간을 재촉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살로메는 예수의 책망을 받았음에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녀가 십자가 밑에 있었다는 것은 그녀가 예수의 책망을 받아들이고 변치 아니하는 헌신으로 주님을 사랑했던 것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들도 주님의 책망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살로메처럼 책망을 받아들여 오히려 우리의 신앙에 도움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미국의 어느 교회에 교회 건축 헌금을 거의 다 내고, 교회 예산도 다 의지하는 장로 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런데 그 장로는 술을 만드는 회사를 부모로부터 맡아 대사업을 하고 있었고, 모 교회를 거쳐간 여러 목사는 아무도 그분에게 술 만드는 회사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새로운 목사가 그 교회에 부임해서 보니 교회가 그 장로에게 너무 의지하고 있는 것을 알고 너무 안타까웠습니다. 그 목사는 술장사하는 돈으로 교회가 운영이 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하나님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기도하면서 교회에서 쫓겨나더라도 바른 말을 해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어느 주일 낮 예배 헌금시간에 헌금 바구니가 그 장로 앞에 가니까 장로님이 두툼한 봉투를 넣으려고 하였습니다. 그 때 목사가 소리를 쳤습니다. “장로님 그곳에 손을 넣지 마세요. 하나님께서는 술장사해서 번 돈으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습니다.”
그때 그 장로는 너무 화가 났습니다. “조용히 불러서 권면을 할 것이지,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주다니.... 어디 두고 보자.”
그 장로는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갔습니다. 그 후 교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교회의 모든 재정을 부담하는 장로가 나오지 않으니 교회는 뒤숭숭했습니다. 다른 장로들이 찾아와 “그 장로님과 화해하세요” 라고 권면해도 그 목사는 “그 장로님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나오기 전에는 절대로 찾아가지 않겠습니다” 라고만 말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장로가 찾아와 눈물을 흘리면서 “목사님 고맙습니다. 목사님은 내 생명의 은인입니다. 과거에 있던 여러 목사님들은 술장사를 하지 말라고 말하지 못했는데 저에게 그렇게 확실하게 가르쳐 주시니 정말로 고맙습니다”고 말했습니다. 그 장로는 처음에는 인간된 마음에서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기도하는 중에 그 말은 목사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책망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 장로는 “만일 내가 그 책망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이제 술 공장의 문을 닫겠습니다”고 하고 그 사업을 정리하고 다른 사업을 하여 더욱 크게 번창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기뻐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또 막달라 마리아가 십자가 밑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그녀를 지배했던 일곱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께서 그녀에게 해주신 것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의 사랑이 그녀를 구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예수를 사랑했습니다. 예수가 어떻게 되어도 변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들도 이 여자처럼 예수를 만나 십자가에 흘린 피로 죄를 용서받고 영원히 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얻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천국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예수에게서 멀찍이 떨어져 있지 않습니까? 예수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그 큰 사랑을 져버리고 내가 잘되면 감사가 있지만 나에게 어려운 일이 오고 실패가 오고 환난이 오면 그만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까? 막달라 마리아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변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주님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골고다의 십자가의 길을 함께 가야 부활에도 참여합니다. 영광에도 참여합니다.
전라남도 영광에 입성리라는 마을이 있는데 거기에는 영월 신씨 대종가가 있다고 합니다. 이 종가에는 화로의 불씨가 600년 동안 꺼지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대단합니다. 불을 다시 피워도 되지만 18대째 조상이 물려준 전통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만 피웠지 그로 인해서 특별하게 그 가문에 주어진 것은 없습니다.
그에 반해 유대인들은 온 인류에게 주신 가장 귀한 영적 전통인 신앙을 아브라함 때부터 자그만치 4천년 동안이나 지켜오고 있는데 그 결과 세계 최고의 민족이 되고, 최고의 부유함과 명예와 영광을 누리고 있습니다. 영월 신씨 종가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일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믿음을 잘 지켰습니다. 노아는 600년 동안, 에녹은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아브라함은 175년 동안, 이삭은 180년 동안, 모세는 120년 동안, 여호수아는 110년 동안 믿음을 지켰습니다.
어떤 어려움과 환난이 닥쳐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사람 중에 갈렙이 있습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을 정탐했고, 모세가 죽고 나서는 여호수아를 적극적으로 도와서 가나안 땅을 차지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갈렙을 칭찬하시고 축복하셨습니다. “내 종 갈렙은 그 마음이 그들과 달라서 나를 온전히 따랐은즉 그가 갔던 땅으로 내가 그를 인도하여 들이리니 그의 자손이 그 땅을 차지하리라”(민14:24).
약속의 말씀을 굳게 믿고 온전히 하나님께 순종했던 갈렙은 45년 뒤 헤브론을 기업으로 얻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흐르고 상황이 바뀌어도 갈렙의 믿음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갈렙처럼 주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변하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살로메처럼 고통스러운 자리까지도 주님을 신실하게 따르는 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주님과 함께 고난의 현장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과 고난을 함께 할 때 영광도 함께할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여 하늘나라의 영광을 받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