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수 목사 |
요한복음은 이단 영지주의에 대한 반박으로 영과 육이 하나이신,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에 대해 증거가 된 말씀입니다. 폴 틸리히(Paul Tillich)는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가르침은 ‘상징’이었다고 하면서, 그리스도, 십자가, 천국 등의 개념도 하나의 상징으로 그 개념 자체가 진리가 될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는 그 상징적인 개념 너머에 있는 의미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상징에 해당하는 개념, 즉 그리스도, 십자가, 천국(천국의 개념은 ‘하나님 나라’의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저 세상, 혹은 이 세상 너머에 있는 것처럼 인식하는데 익숙하다.) 그 자체를 신성시하여, 그 너머에 있는 의미를 찾으려는 시도에 대해서 불경시했습니다. 여전히 한국교회는 ‘문자’에 얽매여 그 너머에 있는 의미를 찾는데 익숙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 안에는 하나님이 거하신다.
오늘 읽은 말씀 중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의 의미는 문장 그대로 풀어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 안에 거한다는 말씀으로 ‘우리 안에 하나님이 거한다’는 말씀입니다. ‘너희(사람)가 내(예수) 안에 거하고 내 말(태초에 계셨던 말씀으로 하나님 요 1:1)이 너희(사람) 안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은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극명하게 나타내는 말입니다. 크리스천들은 창세기의 창조이야기를 통해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심을 받았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영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존재로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른 피조물로 나아갈 것도 없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 속에 하나님의 영을 품고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설령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조차도 혹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이들조차도 하나님의 영이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한국의 크리스천들은 다른 종교에 대해 배타적이며, 괴멸시켜야 할 적으로 규정하고, 구원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더 나아가 정복해야 할 대상으로 봅니다. 범종교적 에큐메니즘 신학자로 알려진 한스 큉(Hans Küng)은 말하기를 “종교 간 평화 없이 세계 평화 또한 있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껍데기의 종교에 머무르는 이들은 끝없이 종교 간의 갈등을 일으키므로 인해 세계의 평화를 위협하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이들을 성전(聖戰)이라는 명목하에 수단화하고 전쟁도구화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인 사실일 뿐 아니라 현실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직도, 종교 간의 평화 혹은 대화의 시도에 대해 불경시하고, 이단시하는 한국교회의 현실은 우리가 얼마나 문자적으로 혹은 표층, 껍데기 신앙에 머물러 있는지를 알게 하는 지표입니다.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 하나님이 거하신다.
그런데 이제 우리는 이 범주, 즉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라는 범주를 확대하여야 합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런 논의는 지속하였지만, 현실적으로는 ‘사람’을 특별한 위치에 놓고 그 외의 다른 피조물들은 종속적인 관계에 놓는 것에 익숙해 있습니다. 창세기 1:28절의 말씀에 대한 오해로서 “땅을 정복하라,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말씀을 인간의 편의대로 수단화되어도 좋다는 말씀으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이에 대한 신학적인 논의는 한국교회에서도 오래전에 다뤄졌지만, 실천적인 현실의 삶으로 살아지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인간은 다른 피조물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을 보지 못했습니다. 더 나아가 한국교회는 동양적인 사상의 바탕이라는 좋은 토대를 가지고 있음에도 다른 피조물에 깃들어 있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는 이들을 이단시했습니다. 동양적인 것을 미신적인 것으로 팔고, 모두 청산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게 했습니다.
이제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 다른 피조물 속에도 하나님이 거하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속에 하나님이 들어 있다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삶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욕구를 채우는 대상일 수 없습니다. 풀 한 포기, 들꽃 한 송이, 작은 벌레 속에도 하나님이 들어 있다고 인식하는 순간 그들을 함부로 인간의 편의를 위해 희생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인간적인 한계가 있으므로 그들을 의식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그들을 희생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인식을 하는 것과 하지 못하는 것 사이에는 아주 커다란 간격이 있습니다. 그것으로 파생되는 문제는 너무 복잡하므로 아주 긴 설명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직관적으로 다른 피조물 혹은 사람을 수단으로 보는 것과 동등한 혹은 하나님으로 보는 것에서 오는 삶의 차이가 어떠한지는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류의 생각을 ‘범재신론(凡在神論)’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서양적인, 너무나 서양적인 한국교회의 현실
동양사상은 자연과 합일된 삶을 추구합니다. 이른바 범재신론적인 관점에서 자연과 더불어 사는 삶, 자연과 하나 된 삶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도덕경>이나 <장자> 같은 책은 우리가 자연과 어떻게 합일된 삶을 살아가는지에 대한 기념비적인 책임에도, 불교 혹은 유교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다는 이유로 크리스천이 그런 책을 읽는 것을 불경시하기도 합니다. 성경이나 읽으라고 권고합니다. 신학교의 커리큘럼에도 서구 신학자들의 사상은 넘쳐나고, 서양의 종교역사에 대한 것은 넘쳐나지만, 동양적인 사상에 대한, 종교적인 심성에 대한 커리큘럼은 적거나 아예 없습니다. 이런 토양에서 목회자가 된 이들의 관심사는 오로지 외피, 표층, 껍데기를 가꾸는 데 집중하고 양적인 성공이야말로 성공적인 목회라고 착각을 합니다. 교인들은 자신들의 양심을 자극하거나 자신들의 믿음을 흔드는 설교를 싫어합니다. 어떤 적당한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지 않습니다. 위로의 메시지가 아니면 받으려 하질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감하지 않고 전하는(렘 26:2) 설교자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관련지어 좋은 말을 해주는 설교자를 좋아합니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도 과격하다거나 현실을 모른다거나 이상적인 것이라고 충고합니다. 그러면서 이른바 교인들의 가려운 곳을 잘 찾아내고 긁어주는 설교자들이 판을 치게 되고, 그런 설교자가 모범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영성이라는 권위보다 혹은 신앙적인 깨달음의 깊이의 권위보다는 학벌이 중요시됩니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이 합일의 경험을 통해서 내 안에 있는 하나님, 그리고 너 안에 있는 하나님을 인정할 때 사람 간의 관계에서 수단화시키지 않을 수 있을 것입니다. 더 나아가 다른 피조물에도 하나님이 거함을 볼 수 있을 때, 인간과 자연이 함께 공존하는 방안을 창출해갈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이것을 잃어버렸습니다. 내 안에 있는 하나님을 상실했을 뿐 아니라, 타자 안에 거하는 하나님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이런 상황에서는 치열한 생존경쟁만이 남습니다. 현재 우리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는 경쟁구도라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너와 네가 함께 사는 길이 분명히 존재하고 있음에도, 너와 나를 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분화시키면 무언가 분명해 보이는 것 같지만, 이러한 이원론의 극복이야말로 신앙인들이 관심을 둬야 할 과제입니다.
건강한 종교는 내세와 현세의 어우러짐이 충만합니다. 하늘과 땅, 현세와 내세, 내가 나비가 되고 나비가 내가 되는 경험, 그러면서도 나인지 나비인지 구분할 수 없는 경지, 보아도 보이지 않고, 보지 못해도 보는 것(도덕경, 히브리서 11장)입니다. 그가 내 안에 거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 그 황홀한 경험을 한 사람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열매’나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는 것’은 개인적인 욕심을 채울 수 있다는 주술적인 말씀이 아닙니다. 만일, 이 말씀을 그 정도 선에서 이해하고 만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모독입니다. 그 말씀이 온전히 내 삶이 되기까지 나는 끊임없이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삶에서는 내가 깨달은 그만큼 까지만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온전히 삶으로 살아갈 즈음이면, 지금의 깨달음의 한계가 보일 것입니다. 이러한 확신, 이러한 믿음은 어찌 보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요구하는 믿음과는 다르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가 내 안에 거한다’고 고백하면서도 여전히 그 실체를 온전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변명을 한다면 하나님은 내 인식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그런 점에서 자기 믿음의 확신으로 남의 믿음을 재단하고, 타 종교를 개종의 대상 혹은 타도의 대상으로 하는 이들의 믿음은 진솔해 보이지도 않고, 깊어 보이지도 않는 것입니다. 찬송시에서 고백하는 대로 ‘나 같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내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는 사람이라면 자기를 추스르는 일만으로도 인생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에 남을 재단할 겨를이 없을 것입니다
글/김민수 목사(기장총회 제주노회 총회교육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