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대각성운동의 결과로 미국 동부 뉴잉글랜드의 4개 주에서만도 인구 30만명 중 4만명 가까운 결신자가 생겨났고, 150여개 교회가 신설되었다. 중남부 지방에서도 수만 명의 결신자가 생겨났고 사람들의 개인생활과 가정생활의 변화와 함께 도덕적 기풍이 쇄신되었다. 그러나 부흥운동을 반대하는 학파의 비판이 많아 교파가 갈라지는 곳도 있었다. 그리하여 부흥운동을 위해서 차원 높은 신학교육의 필요성이 강조되기도 하였다.
미국 신대륙에 유럽의 각종 교파가 이식되어 교파별로 식민지 개척사업이 진행된 지방에서는 다른 교파의 교회가 들어오면 박해하고 추방하기도 하였고, 특히 영국성공회 식민지역에서는 타 교파에 대한 박해가 심하여 신앙의 자유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미국에서 교회의 신교(信敎)의 자유를 위해서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할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즉 모든 종파가 자유를 가지고 믿는 것이 미국 교회의 토착화 또는 미국화라고 믿게 되었다. 그리하여 부흥운동 기간에 부흥설교자들은 미국인의 정치적 자유와 신교의 자유의 두 가지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특히 동부의 회중교회와 대학 교수와 목사들이 이것을 강조하여 동부 지방에서 영국성공회의 국교제도를 폐지하였다. 1783년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이 승인되고 1787년 미합중국의 헌법이 선포되면서 영국으로부터의 자유는 그리스도교 종파들의 신교와 선교의 자유를 보장한 것이 되었다.
독립이 선포된 후 미국의 많은 교파들이 각각 전국적인 총회를 조직하였다. 장로교는 1789년에, 홀랜드의 더치(Dutch) 개혁파교회는 1792년에, 미국성공회의 프로테스탄트 에피스코팔(감독) 교회는 1780년대에, 미국 감리교 감독교회는 1784년에, 그리스도의교회(Christ Church)는 1789년에 총회를 각각 조직하였다. 미국 독립 이후 처음에 부흥운동이 캐롤라이나 주, 켄터키 주, 버지니아 주에서 강력히 일어나서 이 지역에서 침례교가 크게 성장하였고 다른 교파에도 번져 갔다. 켄터키 주에서 장로교의 부흥운동이 불붙어서 옥외의 캠프집회(camp meeting)가 성황을 이루어 널리 번져 갔고 이 집회에 수천 명의 군중이 모여들어서 설교를 들었다. 집회는 여러 날 계속되었고 6~7명의 부흥사들이 설교하였다. 6~7개 이상의 교파도 한 캠프집회에 동참했다. 이 집회를 통해 침례교와 감리교가 가장 큰 효과를 보았다.
뉴잉글랜드와 뉴욕과 뉴저지 지역의 장로교회에 부흥운동이 불붙었다. 1790년대에 이 지역에는 합리주의적인 아르미니우스 신학을 따른 목사들이 많아서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회심과 중생을 함께 강조하면서 어떤 일치를 보여서 부흥운동을 추진하였다. 그중에서도 예일대학 학장 티모디 드와이트(Timody Dwight, 1752~1817)가 예일대 학생 수 명을 규합하여 1802년에 부흥운동 센터를 만들고 부흥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번 제2차 부흥운동은 모든 지방에서 제1차 부흥운동보다 강렬한 것이었다. 교회당에서가 아니고 야외 숲속에서 야간집회를 열고 캠프파이어를 피우고 열광적으로 되었다. 그리하여 군중들 사이에 괴기한 현상이 많았는데 갑자기 넘어져 뒹굴거나 서로 끌어안거나 춤을 추거나 소리를 질러대고 큰 소란을 피웠다.
이때 한 젊은 장로교인 법률가 찰스 피니(Charles Finney, 1792~1875)가 강력한 부흥운동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부흥운동의 ‘새 방법’(new measure)을 내놓았다. 그것은 ‘안 좋은 시간에’ 집회를 열고 ‘긴 시간의’ 집회를 갖는 것과, 형식에 맞는 어법이 아니고 조잡한 구어체(口語體)로 설교할 것과, 기도와 설교 중에 개인의 이름을 언급하도록 할 것 등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이러한 방법으로 부흥회를 갖거나 인도하는 것을 반대하였지만 이 새로운 방법에 따른 부흥설교자들이 많았다. 그는 즉각적인 회심을 강조하였고, 목사가 검은 가운 복장을 입는 것을 반대하였고, 설교원고를 준비해서 설교할 것과, 여자도 기도할 때 무릎을 꿇고 할 것과, 평신도도 예배시간에 대표기도 하게 할 것과, 주일학교를 만들고 성서공회를 조직하고 그리고 절제운동을 할 것을 주장했다. 그는 프린스턴신학교에 입학할 것을 권고 받았으나 선택의 교리가 싫어서 입학하지 않고 오벌린(Oberlin)대학을 설립하고 학장으로 15년간 근무하면서 미국에서 최초로 남녀공학 제도를 만들었고 흑인들에게도 입학을 허가하여 백인 학생과 같이 공부하게 하였다. 그가 ‘그리스도인의 완전’이라는 설교를 한 것을 보수적인 장로교회가 비판하자 장로교를 탈퇴하고 회중교회에 속하였다. 부흥운동에 대한 그의 강의들이 책으로 출판되어 2천부가 매진되고 프랑스어와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19세기 중엽에 평생 평신도로 부흥운동을 인도한 드와이트 무디(Dwight Moody, 1837~1899)가 매사추세츠 주에서 태어났다. 그곳에는 유니타리안(Unitarian) 교회만 있어서 그 교회에서 자라났다. 이 교회는 회중교회에서 파생된 교회로서 삼위일체 교리를 믿지 않았다. 그는 20세가 가까웠을 때 보스턴에 있던 회중교회에 속하였고, 20세가 되기 전에 시카고로 가 신발장사를 해서 성공하였다. 그는 교회를 위하여 자발적으로 헌신하여 교회에서 주일학교를 조직하고 기도회를 열었고 가정 방문을 하면서 복지 활동을 벌였고 열심히 전도설교를 해서 많은 결신자를 얻었다.
1860년 무디가 20세 초반이었을 때 장사하던 일을 버리고 독립적으로 시카고에서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어느 교파에도 속하지 않은 한 교회를 세웠고 시카고에서 기독청년연합회(YMCA)의 회장이 되었고 1873년에서 1875년 사이에 전도인회를 만들어서 선교하였다. 그의 전도운동에 동역자가 된 아이라 생키(Ira David Sankey, 1840~1908)는 훌륭한 성악가로서 찬송을 잘 불렀고 풍금을 가지고 다니면서 전도집회 때 반주하였고 찬송가도 작사하였다. 이 두 사람은 짝이 되어 미국 안의 영국 이민자들이 살던 13개 주를 두루 다니면서 전도하고 영국 런던에까지 가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는 초보적인 교육만 받은 사람이었으나 학생들 사이에서 환영을 받고 미국과 영국의 대학들을 순방하면서 설교하였고 학생 전도집회의 대회장이 되어 인도하였다. 그리고 그가 만든 복음성가(gospel songs) 책을 팔아서 얻은 수익금을 가지고 자기 고향의 남녀학생들을 도왔다.
그는 이러한 전도집회에서 성서를 공부하게 하여 이러한 전도집회 곧 부흥회를 「성경집회」(Bible Conference)라고 일컬었는데 일제시대 한국 교회는 이 성경집회를 「사경회」라고 불렀다. 무디와 생키는 그의 고향 노스필드(Northfield)에 있던 헤르몬 산(Mt. Hermon)에서 부흥집회를 열고 그의 전도운동을 널리 확산시켜 복음주의 전통을 가진 영국과 미국의 교회에 지대한 감화를 끼쳤다. 그의 여름철 대학생 성경집회는 성황을 이루었고 그중 많은 학생들이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어 미국 교회 해외선교사의 선구자들이 되었다.
제2차 부흥운동에서 크게 교세가 확장된 미국의 침례교회 안에서 종말선교를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특별히 윌리엄 밀러(William Miller, 1782~1849)의 재림설교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였다. 그는 매사추세츠 주 시골의 한 농부였는데 성서공부에 열중하면서 침례교에 속하였다. 그는 구약 다니엘서와 신약의 묵시록을 읽고 명상하다가 예수의 재림이 임박했다고 설교하기 시작했고,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자 1843년 3월 21일을 예수의 재림일이라고 예언하면서 미국 전역을 순회하였다. 사람들은 그의 예언을 믿고 그가 예언한 날 직장을 떠나서 높은 산 언덕 위에 올라가서 예수의 재림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의 예언은 틀렸고 사람들의 실망이 컸었다. 그는 예수의 재림 날짜가 연기되었다고 말하고 다시 그 날짜를 정하고 그 이듬해 어느 날로 설교하였는데 사람들은 그의 부흥설교에 아주 매혹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의 말을 믿고 다시 예수의 재림을 기다렸으나 그의 예언은 실패하였다.
그를 믿고 따르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서 떠났고 그를 계속 따른 사람들이 새 교단을 만든 것이 「제7일 안식교」(Seventh-day Adventist)였다. 그들은 주일을 토요일로 정하고 예배를 드렸다. 처음에는 작은 교단이었으나 1916년에는 8만 명의 신도를 가졌다. 그리고 선교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해외에까지 확산되어 갔다. 1830년에 조세프 스미스(Joseph Smith, 1805~1844)가 뉴욕의 세네카(Seneca) 지방에서 「말일 성도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The Church of Jesus Christ of Latter-day Saints)를 조직하였다. 이 교회는 일리노이 주에 본거지를 두고 선교운동을 벌였고 그의 제자 브링함 영(Bringham Young, 1801~1877)이 1846년에 유타 주로 본거지를 옮겼다. 이 교파는 구약의 일부다처 제도를 본떠서 그 제도를 실시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다. 이 교파는 「몰몬경」(Book of Mormon)이라는 책을 성서처럼 계시의 책으로 믿고 있어서 이 교파를 몰몬교라고 부른다. 주로 가난한 사람들 사이에서 전도했고 신도들이 빨리 늘어 갔다. 그들은 유타 주에서 개척해서 산업을 발전시켰고 유타 주가 몰몬교의 교리에 따르는 주가 되었다. 심한 박해를 받고 후에 일부다처제는 포기하였으나 금주를 비롯한 금욕주의적 절제생활의 전통이 살아있었다. 국내외로 선교사를 파송하여 교세를 확장해 갔으나 소교파에 머물고 있다. 이 교회는 교회당을 ‘타버나클’(Tabernacle) 곧 장막이라고 부른다.
뉴잉글랜드 지방의 태생인 에디(Mary Baker Eddy, 1821~1910) 여사는 회중교회의 한 신자 가정에서 태어나서 크면서 정신불안과 히스테리 병에 걸려 고통을 많이 받다가 어떤 신자의 기도를 받고 고침을 받은 후 자기의 경험을 정리하여 1875년에 「과학과 건강」(Science and Health)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재판을 거듭하면서 팔렸다. 그리고 그녀가 보스턴에 세운 교회가 「크리스천 사이언스」(Christian Science) 교회다. 그녀는 이 교회를 인도하고 조직을 확대하는 유능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그 교회 교인들은 주로 도시 주민들이었고 신앙으로 육체의 건강을 얻는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생긴 또 하나의 신앙단체는 「여호와의 증인」(Jehovah’s Witness)이다. 1914년 이전에 조직되어서 널리 번져갔다. 이 단체는 찰스 T. 러셀(Charles T. Russell, 1852~1916)의 교훈으로 시작되었는데 그는 성서공부를 하다가 그리스도가 1874년에 재림해서 천년왕국을 세우고 통치하기 시작했다고 가르쳤다. 그는 모든 기성교회들은 하나님이 물리치셨다고 하면서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설교하여 교회를 세웠고 목사로 추대되었다.
이 부흥운동 기간에 성령운동에의 강조를 통해 오순절교회(Pentecostal Church)도 생겼고, 니그로들에게 전도 운동이 미쳐서 흑인 교인들이 늘어났다. 또 미국의 흑인 해방 전쟁인 남북전쟁이 일어나서 주류 교단들이 남북으로 분열되어서 장로교와 침례교와 감리교가 각각 나눠졌는데 남부의 교회들은 보수적인 교회들이었다. 퀘이커 교회도 둘로 나눠졌다.
미국의 부흥운동과 서적들의 영향을 받은 영국의 복음운동 지도자들이 부흥대회를 영국 호수 지역에 있는 케즈윅(Keswick)에서 1875년에 열었다. 영국의 복음주의운동은 19세기 중엽 이후부터 활성화되기 시작하였는데 특히 무디와 생키가 영국에 와서 끼친 영향이 컸다. 케즈윅 집회는 그 후 해마다 열렸는데 영국성공회 신부 하포드-바터스비(Harford-Battersby)가 지도적인 인물이었다. 이들의 부흥운동은 영국 상류사회의 운동이 되었다. 반면에 윌리엄 부스(William Booth, 1829~1912)는 영국의 빈민층을 대상으로 선교하고 구제하기 위해 구세군 운동을 1864년 런던에서 시작하였다.
제2차 각성운동의 결과는 다양했다. 제1차 때보다 더 열정적이고 광범위한 운동이어서 그만큼 그 효과도 크고 다양했다. 첫째로 교회의 부흥이다. 새신자가 많아 교세가 커졌으나 한편으로는 부흥운동에 대한 찬반양론이 있어서 새 교단을 세운 경우가 많았다. 신학도 진보와 보수로 나뉘게 되었다. 그리고 부흥운동의 열기로 새 신앙집단이 생겨서 작은 교파들이 만들어졌다. 다음으로 부흥운동으로 교파의식이 약화되었고 교단의 권위와 목사의 권위가 평신도들의 전도운동과 역할로 도전을 받았다. 그리고 신도들의 위상이 향상되어 교회 내 평등사상의 고취와 민주화가 가속화되었다. 그리고 부흥운동이 국가의 종교 간섭이나 교파 사이의 박해 및 차별의식을 해소하여서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신교의 자유사상이 고조되어 교파평등이 실현되어 갔다. 동시에 미국의 정치적 및 사회적 이상인 자유와 평등에 걸맞는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되면서 미국을 사랑하는 애국정신이 생기게 되어 교회 안 예배실에는 미국 국기를 세우게 되었다. 그리고 선교정신이 힘을 얻어 미국 원주민 인디안들과 흑인들에 대한 선교가 적극적이게 되었고, 절제운동이 일어나서 생활의 변혁과 개선 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많은 종류의 새 단체들이 학생들 사이와 평신도 사이와 교파들 사이에 생겨서 전도와 선교에 관한 문서출판과 복지사업과 교육사업 등등이 활발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