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향린교회 한문덕 담임목사
성경본문
(미 7:1-8, 고후 1:14-22, 눅 5:1-11)
[새로운 시간을 열어가며]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종살이하던 히브리 백성이 억압의 땅에서 나온 지 오십일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시내 광야에서 모세에게 율법이 새겨진 돌판을 줍니다. 이 돌판에는 노예 생활에 익숙한 출애굽 무리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거듭나기 위해 지켜야 할 약속들이 담겨 있습니다.
나사렛 예수를 따르던 유대인들이 오순절 날 한곳에 모여 있었는데, 하늘로부터 세찬 바람이 불어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하나님 백성으로 거듭났던 바로 그날에,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는 거룩한 영이 파고듭니다. 내면에 불꽃이 일었고, 뜨거운 기운이 온몸을 사로잡았으며, 사도들의 입에서는 세계 각국의 언어들이 마구 터져 나옵니다. 교회는 이렇게 탄생했습니다(사도행전 2:1-13).
사도행전은 그날 성령을 체험한 사람들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어서, 성령이 시키시는 대로, 각각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성령강림 사건은 세 가지 차원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하늘로부터 땅으로 임하는 수직적 차원이요, 또 하나는 사람들끼리 통하게 되는 수평적 차원이고, 마지막은 사람의 마음속 깊은 곳으로부터 솟아나 온몸을 채우고 우주마저 채우는 깊이와 넓이의 차원입니다.
첫 교인들은 이날 인간의 모든 약함을 넘어서는 초월의 하나님을 체험하였고, 그 하늘의 불씨를 자기 마음에 담아 그 힘으로 세상과 소통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꿔 나갔습니다. 성령강림주일은 바로 자기 인격을 변화시키고 세상 역사를 변혁했던 첫 발걸음을 기억하는 주일입니다.
우리 국민은 지난 6개월의 내란 사태를 극복하고 새로운 정부를 탄생시켰습니다. 역대 민주 정부와 비교했을 때, 대통령 선거 득표수와 여당의 국회의원 수에서 압도적으로 우위에 선 강력한 권력이 탄생했습니다. 특별히 국민에게 총칼을 들이밀었던 전 정부를 탄핵하고 국민의 염원을 담아 탄생한 정부이기에 국민의 기대가 매우 큽니다. 그러나 마음 한편에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이후 들어선 민주 정부에 대한 실망으로 인해, 이번에도 비슷한 일을 반복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와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새로 들어선 정부가 지난 3년보다는 분명히 잘하겠지만, 복잡한 사회와 냉정한 힘의 논리가 작동하는 세계 질서 속에서, 무너진 민생과 망가진 정의를 다시 세우는 일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반동 세력의 저항도 만만치 않을 것이고, 어수선한 틈을 노리고 스며드는 탐욕들과 기득권 내부의 권력 암투들도 여전히 우리의 발목을 잡을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민주주의는 온 국민이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며, 함께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기에, 새로운 정부와 함께 온 국민이 다시 애쓸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개신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내가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오늘 함께 읽은 제1성서는 미가서입니다. 미가서에는 참 신앙인이 평생에 걸쳐 묵상하며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을만한 한 구절이 등장합니다. 바로 미가서 6장 6절에서 8절 말씀입니다.
"내가 주님 앞에 나아갈 때에,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에, 무엇을 가지고 가야 합니까? 번제물로 바칠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가면 됩니까? 수천 마리의 양이나,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을 드리면, 주님께서 기뻐하시겠습니까?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내가 지은 죄를 용서하여 주시기를 빌면서,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예언자는 사람들을 대신하여 하나님께 묻습니다. "제가 무엇을 드리면 하나님 마음에 들까요?" 일반인들의 머릿속에는 일 년 된 송아지, 수천 마리의 양, 수만의 강줄기를 채울 올리브 기름이 떠오릅니다. 먹을 것이 늘 부족했던 고대 사회에서 가난한 이들에게 고기를 맛보는 것만큼 큰 기쁨을 주는 일은 없습니다. 양고기는 유목민들의 주식이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이슬람 문화권에서도 매우 즐겨 먹습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은 자주 먹지 못하니 마음속에서는 언제나 실컷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서가 수천 마리의 양이라고 표현한 이유입니다. 1년 된 송아지의 고기는 평생 가야 한두 번 먹을 수 있을까 말까 하는 고기였습니다. 결혼식 같은 큰 잔치에서야 한 두 점 맛볼 수 있지요. 특별히 1년 된 송아지는 고기가 연하면서도 풍미가 가득하고, 마을 잔치에 쓸 만큼 충분한 양이 나오기 때문에 아주 값진 것입니다. 올리브 기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도 고급 요리에는 올리브 기름이 들어갑니다. 우리가 즐겨 먹는 과자 새우깡도 일반 새우깡이나 매운 새우깡은 90g에 1,500원인데, 트러플(송로버섯) 오일향이 첨가되고, 올리브 기름도 0.16% 들어가 있는 새우깡 블랙은 72g에 2,000원이나 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목록을 가만히 살펴보면 사실 가난한 민초의 고달픈 삶과 소박한 바람이 녹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런 성서 구절 하나에도 사실 마음이 짠합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왜 이렇게 귀한 제물을 준비한 것일까요? 이어지는 말씀은 이렇습니다. "내 허물을 벗겨 주시기를 빌면서,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사람들이 제사를 지내는 이유는 지은 죄를 용서받기 위함입니다. 고대인들은 자신의 허물 때문에 하나님이 벌로 재앙과 불행을 내리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웃 나라 사람들도 저마다 자신들에게 불행한 일이 닥치지 않도록 신을 달래기 위해 제사하고 제물을 바쳤습니다. "내 맏아들이라도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 "이 몸의 열매를 주님께 바쳐야 합니까?"라는 구절은 실제로 인신공양(人身供養)의 흔적을 담고 있습니다.
신께 좋은 것을 바쳐서 재앙을 피하고 복을 받으려는 생각과 행위는 모든 종교적 인간에게 보이는 보편적 특성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는 어린아이 단계에 머물러 있는 매우 낮은 수준의 신앙입니다. 하나님께 선물을 바쳐서 하나님을 쥐락펴락해 보려고 하는 모든 사람의 관심사는 오직 자기 문제 해결입니다. 내가 중심이고 신도 나를 위해 필요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앙은 결코 이런 것이 아닙니다. 참된 신앙이란 나 중심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내 삶의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생은 너무나 험난하고,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에, 또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는 실수도 하고 잘못도 저지르면서 고통을 스스로 초래하기 때문에, 또 어떤 경우는 생각지도 않은 일이 발생하면서 감당하기 어려운 불행이 찾아오기도 하기에, 그런 일들이 발생했을 때 우리를 구원해 줄 초월적 존재,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를 찾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급박한 상황이 되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고 하기에 사실 그때의 행동은 오히려 상황을 악화시킬 수가 있습니다. 엉뚱한 곳에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자기 문제해결을 위해서만 하나님을 찾는 방식은 결국은 자기 탐욕을 강화합니다. 기복적 신앙으로 성장한 한국교회가 이제 자기 기득권을 강화하기 위해 정치와 결탁하여 거대 재벌기업처럼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기중심적 종교와 사회의 부패]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미가서는 오직 자기 문제해결에만 관심 있는 사회를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이 땅에 신실한 사람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정직한 사람이라고는 볼래야 볼 수도 없다. 남아 있는 사람이라고는 다만, 사람을 죽이려고 숨어서 기다리는 자들과, 이웃을 올가미에 걸어서 잡으려고 하는 자들뿐이다. 악한 일을 하는 데는 이력이 난 사람들이다. 모두가 탐욕스러운 관리, 돈에 매수된 재판관, 사리사욕을 채우는 권력자뿐이다. 모두들 서로 공모한다. 그들 가운데서 제일 좋다고 하는 자도 쓸모 없는 잡초와 같고, 가장 정직하다고 하는 자도 가시나무 울타리보다 더 고약하다. 너희의 파수꾼의 날이 다가왔다. 하나님께서 너희를 심판하실 날이 다가왔다. 이제 그들이 혼란에 빠질 때가 되었다. 너희는 이웃을 믿지 말아라. 친구도 신뢰하지 말아라. 품에 안겨서 잠드는 아내에게도 말을 다 털어놓지 말아라. 이 시대에는, 아들이 아버지를 경멸하고, 딸이 어머니에게 대들고,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다툰다. 사람의 원수가 곧 자기 집안 사람일 것이다."(미가서 7:2-6)
예언자를 통해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탄식 가운데서 정말 가슴이 미어지도록 슬픈 이야기는 한 방에서 함께 잠드는 배우자에게도 모든 말을 다 털어놓지 말라는 것이며, 가족들마저도 원수가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자기만을 챙기는 세상은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되고, 그래서 결국에는 자기 자신도 믿지 못하게 되어 모두가 파국으로 갈 수밖에 없는 세상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오늘 예언자는 절망적 상황을 묘사하면서도 절망으로 끝내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희망을 가지고 주님을 바라본다. 나를 구원하실 하나님을 기다린다. 내 하나님께서 내 간구를 들으신다. ~중략~ 나는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 지금은 어둠 속에 있지만, 주님께서 곧 나의 빛이 되신다."(미가서 7:7-8)
예언자 미가의 이 말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주신다는 이야기일까요? 하나님께 기도하면 만사형통이고 주님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위에서 우리가 그토록 경계한 자기중심적 신앙 태도와 다를 것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은 영이시니, 하나님의 영이 활약하시도록 우리가 주님의 손발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언자 미가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너 사람아, 무엇이 착한 일인지를 주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너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이미 말씀하셨다. 오로지 공의를 실천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가서 6:8)
이 세상에 공의를 세우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일은 자기중심적인 우리의 본능적 성향으로 인해 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행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모두가 자기만 챙기는 이 험악한 세상에 마지막 남은 빛의 보루입니다.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고대 종교가 양이나 소를 드려서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는 종교라면 그리스도교는 야훼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기 위해 우리의 삶을 드리는 종교입니다. 고대 종교는 희생제물을 바쳐서 자기 유익을 도모하지만, 야훼 종교는 자신이 희생제물이 되어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합니다.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았던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에 쓰는 편지를 통해 우리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힘입어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릴 합당한 예배입니다."(롬 12:1)
[하나님의 임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런 맥락에서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의 편지를 읽어야 합니다. 오늘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둘째 편지 1장 19절 하반절부터 20절은 이러합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예'만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아멘"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본회퍼 목사는 1944년 8월 28일 바로 오늘의 이 구절 고린도후서 1장 20절 말씀을 묵상하고 그의 친구이자 제자인 에버하르트에게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디트리히 본회퍼 지음/손규태, 정지련 옮김, 『저항과 복종』 대한기독교서회 2010. 729-730.)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기대하고 간구해도 되는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네. 모든 것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는 무관하지. 하나님이 약속한 것과 그 분께서 성취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기 위해 우리는 매우 오래, 그리고 침착하게 예수의 삶과 말씀, 행동과 수난, 그리고 죽음을 깊이 생각해야 하지."
본회퍼 목사는 여기에서 분명하게 밝힙니다. "모든 것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는 무관하지." 그렇습니다. 본회퍼 목사는 하나님을 로또나 만능열쇠로 생각하는 이들의 생각을 차근차근 고쳐줍니다. "하나님이 약속한 것과 그분께서 성취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인식하기 위해 우리는 매우 오래, 그리고 침착하게 예수의 삶과 말씀, 행동과 수난, 그리고 죽음을 깊이 생각해야 하지." 핵심을 바로 짚었습니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전국의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단도직입적으로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알기 위해,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 하나님의 성취를 깨닫기 위해 "매우 오래, 그리고 침착하게 예수의 삶과 말씀, 행동과 수난, 죽음을 깊이 생각했습니까?" 본회퍼 목사의 말씀을 계속 이어서 듣도록 하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가 항상 하나님의 가까이 계심과 임재 안에서 살아도 된다는 것이고, 이러한 삶은 우리에게 전혀 새로운 삶이라는 것이지. 또한 우리에게 불가능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에게 불가능한 것이 없기 때문이라네. 또한 세상의 세력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며, 위험과 곤궁을 통해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을 뿐이지."
[임마누엘의 신앙과 긍정의 힘]
본회퍼 목사님이 짚고 있는 신앙은 바로 임마누엘의 신앙입니다.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 곁에 계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편이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어느 한쪽 편이 된다는 것은 다른 한쪽은 편들지 않겠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우리 편'과 '다른 편'을 나누는 순간, 우리는 깊은 적대감과 혐오의 풍랑, 분열과 다툼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는 순간 놀랍게 지독한 교만에 물들고, 나만 옳다는 착각 속에서 상대를 너무 쉽게 모독하고 멸시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편이 되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곁에 계십니다. 하나님은 물론 다른 이들 곁에도 계십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모두의 곁에서 묵묵히 그리고 끈질기게 견뎌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사람에게나 선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해를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나 불의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무조건적 사랑은 누구에게나 부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그러하기에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오히려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할 수도 있고, 그래서 너무 힘들고 지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따라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려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계속 본회퍼 목사의 말을 들어 보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의 기쁨이 수난 가운데, 우리의 삶은 죽음 가운데 숨겨져 있다는 것이지. 확실한 것은 이 모든 것에서 우리가 우리를 지탱해 주는 사귐 안에 서 있다는 것이네. 이 모든 것에 대해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긍정'(Ja)과 '아멘'을 말했지. 이러한 '긍정'과 '아멘'이 우리가 서 있는 확고한 기반이지."
본회퍼 목사님에게 "긍정의 힘"은 놀랍게도 수난 한복판에서, 죽음 한 가운데서 발휘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사랑과 섬김, 정의와 평화, 평등한 세상을 만들다가 당하는 수난 속에서 기쁨을 누립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남은 수난을 이어가면서 기쁨을 누리는 바로 그 자리에서 "아멘"과 "긍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남들이야 어떻게 되든 말든 자신만 편하고 자신만 넉넉하고 자신만 떵떵거리며 사는 자리에서 "아멘"과 "긍정"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을 위하다가 당하는 고난 속에서, 약자를 위해 자신을 던지는 모험 속에서 "아멘"하는 신앙이 진짜 그리스도교 신앙입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세상이 우리를 건드리지 못하기에, 오히려 우리는 위험과 곤궁을 통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리다]
오늘 누가복음서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베드로가 한 일은 무엇입니까? 그렇습니다.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에 힘입어 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렸습니다. 베드로는 어부입니다. 예수님은 목수이거나 목수의 아들이며, 기껏해야 농사를 좀 지어본 사람일 것입니다. 예수의 고향 나사렛은 갈릴리 호수로부터 35km나 떨어져 있고, 차로 달리면 40분 정도 걸리고 언덕보다 훨씬 높은 마을도 세 개나 지나야 합니다. 그러니 예수님이 갈릴리 호수의 지형이나 생태환경을 잘 알았을 리가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해서 갑니다. 그런데 가는 곳도 "깊은 데"입니다. 여기서 깊다는 것을 저는 베드로가 가보지 않았던 곳, 베드로가 위험을 무릅쓰고서까지 굳이 가야 할 이유가 없었던 곳, 아니면 전문가라고 해도 넘기 어려웠던 한계 지점이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으라 하십니다. 오늘 우리 한국 교인들에게,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깊은 곳은 어디입니까? 한국 교인들은 아직 그리스도교의 깊은 진리의 바다에 이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대다수의 한국 사람은 유교적 습관으로 일상을 살다가 죽은 이후에는 불교에서 말하는 극락이나 천당을 꿈꾸고, 뜻하지 않은 어려움을 당하면 무당을 불러서 액땜을 하고 복을 비는 형식에 익숙합니다. 그리스도교인이 되어도 점집에 가고, 유교적 관습을 버리지 못하고,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 나라도 불교의 극락세계나 아수라 지옥 또는 천당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자본주의적 생활양식을 넘어서기 어렵겠지요. 아직 멀었습니다. 깊은 데는 커녕 깊은 데 근처도 가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신앙인에게 과연 깊은 데는 어디입니까? 정말 그곳으로 나아가 잡아야 할 물고기는 무엇입니까?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앙]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신앙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당신의 형상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즉 우리 안에는 하나님의 씨앗이 있습니다. 그 씨앗을 잘 키우면 우리는 창조주가 하실 일들을 하게 됩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피조물들을 아끼고 사랑하여 돌보시듯이, 우리 또한 그러하며, 사랑의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셔서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듯이 우리 또한 세상의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라고 응답하며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 안에 담긴 하나님의 씨앗은 아직 자라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이제 열심히 물을 주고, 거름도 주고, 잡초도 뽑아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저나 여러분은 미운 오리 새끼가 아닙니다. 우리는 사탄의 후손이 아니요, 어둠의 자식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있는 작은 불씨가 모든 생명을 북돋게 하는 태양이 될 때까지 우리는 최선을 다해 달려야 합니다. 개인의 안위를 바라는 자리에서 역사와 사회가 원하는 자리로, 내 유익이나 내 가족만을 위한 이기주의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그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물질적 축복을 넘어, 높은 정신의 경지에 이를 희망으로 부풀어야 합니다.
약 21킬로미터를 달려야 하는 국제 하프 마라톤 대회가 있습니다. 2008년 국제 하프마라톤 대회에 참여한 19살 스웨덴 청년 '미카엘 에크발'은 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화장실에 빨리 가야 할 것 같은 강한 신호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달리는 것을 멈추고 화장실로 직행하는 대신, 그대로 바지에 실례를 한 채 계속 달렸습니다. 계속되는 복통과 설사에 괴로워하면서도 그는 결국 완주를 합니다. 결과는 21위! 그의 모습은 전 세계에 생중계가 되었고, 이후 그의 별명은 "똥 싼 남자"(bajsmannen)가 되었습니다. 당시 레이스를 마친 그에게 기자가 물었습니다. "왜 화장실에 가지 않고 계속 달렸나요?" 그러자 에크발은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번 멈추면, 또 그 다음에도 멈추게 되기 쉬워요. 그러면 습관이 될 거예요." 에크발은 이듬해 같은 대회에 출전해 9위를 기록하고, 2014년 3월 덴마크에서 열린 하프마라톤 대회에서는 스웨덴 신기록을 세웁니다. 유럽 육상 선수권 대회에 스웨덴 국가대표로 출전했고, 2016년 브라질 올림픽에 스웨덴 국가대표로도 출전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계속 달려 나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입니다.([출처] 똥싼남자, 미카엘에크발, 마라토너이야기 - 2016년 3월 6일 일요일 여행을 떠나요 5부 "사색으로 떠나는 여행", 작성자 방송인 최진)
우리가 달린다면 바람을 맞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 바람이 무서워 멈추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바람을 가르며, 오히려 바람을 즐기며 계속 뛰는 사람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처음 만났을 때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달려 나갔고, 사람의 마음을 얻어 한 번 설교에 3천명씩 회개하는 역사를 일으켰으며, 스스로 죄인임을 알았던 그는 결국 교회의 반석이 됩니다. 그리고 이 이야기는 베드로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바로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씨앗입니다. 이제 곧 큰 나무로 자라고 거기에서 결실을 따게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주님께 우리의 배를 내어 드립시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읍시다. 더 깊은 곳으로 나아갑시다. 더 깊은 곳에 나아가서 바로 그 자리에서 긍정의 '아멘'을 말합시다.
다함께 침묵으로 기도하시겠습니다.
파송사
사랑하는 향린 교우 여러분, 믿음의 형제 자매 여러분!
오늘도 어깨를 쭉 펴고 똑바로 서십시오.
세상으로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나아가십시오.
자유인으로 사십시오.
매우 오래, 그리고 침착하게
예수의 삶과 말씀, 행동과 수난, 그리고 죽음을 깊이 생각하십시오.
주님 말씀에 힘입어 깊은 곳으로 나아가십시오.
그곳에 그물을 내리고 생명을 길어 올리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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