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덴마크 루터교회 선교
인도에서는 일찍이 포르투갈이 남단의 고아 지방에서 식민개척사업을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가톨릭 선교사 자비에르가 1542년 고아에 와서 시작한 선교사업이 확장되어 갔다. 그로부터 160여 년이 지나서 덴마크의 왕 프레데릭(Frederick) 4세가 인도에 있는 덴마크 식민지에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정하고 바돌로메 지겐발크(Bartholomew Ziegenbalg) 목사와 헨리 플류차우(Henry Plutschau) 목사를 파송하여 그들이 1706년 7월에 인도 트란퀘바(Tranquebar)에 상륙하여 선교를 시작하게 되었다.
이 두 선교사는 겨우 20대 초반이었는데 독일 할레대학에서 프랑케 교수 아래서 경건운동과 선교학을 배웠고 덴마크 왕의 요청으로 프랑케 교수가 추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그 지방의 말 타밀어를 우선 배워야 했는데 가르쳐 줄 선생을 구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곳에 와 있던 덴마크 식민회사원들이 그들의 선교사업에 협조하지 않고 도리어 방해하였고, 그곳에 와서 선교하던 가톨릭 예수회 선교사들도 적개심을 가지고 방해하였다.
지겐발크와 플류차우 두 선교사는 다섯 가지 선교정책을 촉진하였다. 그것은 학교를 세워서 현지인 아이들을 교육해서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것과, 성서를 속히 본토민 말로 번역할 것과, 본토민의 생활과 전통을 연구해서 그것과 조화되게 복음을 설교하여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쉽게 하는 토착화 방법을 쓸 것과, 대중의 회심을 유도하기보다는 개인 전도의 방법을 쓸 것과, 끝으로 되도록 빨리 본토민 목사들을 양육해서 그들이 자기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자전선교(自傳宣敎) 정책이다.
덴마크의 인도 선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최초의 세계선교였고 이것에 영향받아 영국 교회에 해외선교에 대한 각성이 일어났다. 지겐발크가 인도 국민의 종교생활을 연구해서 쓴 책 「말라바(Malabar) 신들의 연구」가 영어로 번역되어 널리 읽혔고 그의 선교를 돕기 위해 영국성공회 선교협회 SPCK(The Society of Promoting of Christian Knowledge)가 그를 초청해서 그가 안식년에 영국을 방문하여 인도선교를 보고하여 SPCK가 인도선교에 큰 관심을 갖고 후원하여 주었다. 지겐발크는 1719년 13년간의 선교를 끝내고 사망하였는데 그가 죽던 당시 트란퀘바에는 350명의 신자가 있었고 1733년에 아론(Aaron)이 안수를 받고 최초의 인도인 목사가 되었다.
영국성공회는 SPCK 선교운동조직을 통하여 ‘덴마크-할레 선교회’의 루터교 인도선교를 계속 지원하여 독일인이었던 크리스챤 프레데릭 슈바르츠(Christian Frederick Schwartz, 1724~1798) 목사를 지겐발크 선교사의 후계자로서 인도의 탄조르(Tanjore) 국에 파송했다. 그는 48년간 인도에서 선교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처음 20년 동안은 탄조르 국에서 국왕과 왕후들의 지지와 신뢰를 받고 주로 정치와 사회와 문화 사업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여서 대중선교는 소홀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국왕의 신임을 받고 나라의 수상 격의 인물이 되어 영향력을 발휘하였고 영국 정부의 대사처럼 되어 영국의 식민정책에 도움을 주었다. 그는 정직하고 청렴하였다.
덴마크-할레 선교회는 독일 교회에 선교운동을 일으켜 독일 교회가 스위스 선교회의 선교활동을 재정적으로 후원하였지만 1824년에는 베를린 선교회(The Berlin Mission Society)가 설립되었고 1828년에는 라이프치히(Leipzig) 선교회도 설립되는 등 계속 새 선교회가 조직되었다. 이것은 다 할레대학의 선교운동의 열매들이었다. 라이프치히 선교회는 슈바르츠 선교사를 이을 선교사들을 인도에 파송하였다. 이 선교회는 인도의 계급제도를 정면으로 비판하지 않아서 호감을 샀다. 1851년경에 인도 인구 1억 5천만 명 중에 그리스도인은 51,300여 명이었고 세례교인은 14,611명이었고 대부분이 성공회 선교지 교인들이었다.
영국에 일찍이 동인도회사(East India Company)가 설립되어서 식민정책이 추진되었다. 이 식민회사는 그리스도교 선교에 관심이 없었고 오로지 경제적 개발과 무역 증진을 통한 영국의 국익 증대를 목표로 했다. 영국의 이 식민정책은 16세기에 로마가톨릭 국가인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식민개척자들을 내보낼 때 로마교황청이 식민 개척 지도자에게 그리스도교를 선교하는 책임을 부가(附加)한 정책과는 대조적이었다. 동인도회사는 인도의 영국 식민지에 선교사가 들어오는 것을 원치 않고 원주민들의 재래종교를 보호하면서 호의를 얻어 식민 개척의 목적을 달성하려 했다. 다만 회사원들의 가족들의 신앙생활을 지도할 사목(社牧)을 두었을 뿐이었고 이 사목들 중에 인도 원주민 선교에 관심을 가진 사람이 더러 있었을 뿐이었다.
2. 윌리엄 캐리의 선교
인도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선구자는 영국의 침례교인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 1761~1834)였다. 그는 가난한 한 영국성공회 교인 가정에서 태어나서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여 구두 만드는 제화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독서의 기회를 만들어 남의 책을 빌려 독서하였다. 빌린 책 한 권은 영어로 쓰인 것이 아니어서 그것을 읽을 수 있는 사람에게 가서 물어서 그 책이 그리스어 책인 것을 알고 그때부터 그에게서 그리스어를 얼마 동안 배웠다. 그는 나중에 라틴어도 배웠다.
이때 영국에는 비국교도를 박해하는 법령들이 있어서 비국교도들은 영국에서 어떤 관직도 갖지 못했다. 이 무렵 영국이 미국의 독립을 허락할 수밖에 없었던 때였다. 캐리는 침례교로 교적을 옮겼다. 그는 과거에 국교의 일정한 교리와 예배 의식을 최선의 신앙생활로 알았다가 침례교회로 와서 신앙생활이 변하여 신앙의 어떤 사명의식을 갖게 되었다. 그는 성서를 많이 읽고 기도생활에 힘쓰면서 주일날 교회에서 설교하기를 좋아했다. 국교에서는 신부 외에 아무도 설교할 수 없었는데 침례교에서는 평신도들이 설교하고 있었다. 그는 교회를 부흥시키고자 하는 열심을 품고 설교하였고 담임목사가 떠나고 없는 동안 설교하면서 성직에 대한 어떤 소명을 생각하였다. 그는 시골학교에서 선생이 떠나고 없는 동안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는 침례교의 목사가 되었다. 그러나 가난한 교회 목사 캐리는 여전히 구두를 만들어 멀리까지 배달하러 다녔다.
1787년 침례교 목사회에 캐리가 참석하여 그날의 의제인 선교문제를 토론했을 때 캐리는 예수의 마지막 명령 곧 땅끝까지 가서 전도하라는 말씀을 상기시키는 발언을 했다. 캐리는 세계선교에 대한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이 이제 출판단계에 왔다. 그 책은 영국인들의 세계선교의 책임과 과제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영국인이 알고 있던 당시 세계 모든 나라의 정보를 수집하고 세계 각국에 대한 스무 개의 일람표를 만들었는데 각 나라와 섬들의 이름과 크기와 총인구와 종교상황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 책의 제 4장은 다른 나라에서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선교사에게 예상되는 위험과 난관들을 설명하고 외국여행의 가장 좋은 경로와 이교도들 사이에서 살해되지 않고 살아남는 방법과 선교지의 언어를 가장 빨리 배울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선교사가 파송받아 갈 때 재정준비의 길도 설명했다. 그 당시 세계선교를 위한 준비가 되는 책으로서는 캐리가 쓴 이 책밖에 없었다. 이 책이 1792년 5얼 12일에 초판으로 나왔다.
1793년 1월 10일 침례교 목회자 회석에서 인도 뱅갈에 가서 4년 동안 의료선교 했던 존 토마스 박사가 인도의 한 신자가 선교사를 보내달라며 부탁해온 편지를 읽어주고 누구를 보낼지 함께 의논했는데 캐리가 “내가 가겠다”고 제안했다. 그리고 이때 영국 침례교회 선교회가 조직되었다. 그러나 선교비 마련이 문제였다. 런던의 침례교 목사들은 선교비 모금에 자신이 없었다. 캐리는 그의 큰아들만 데리고 인도에 가기로 하고 부인과 두 아이는 영국에 남게 했다. 캐리 부자와 토마스 박사 부부의 인도 여비로 550 파운드가 필요하였는데 캐리와 토마스는 영국 전역을 다니면서 모금을 호소했다. 이렇게 전국을 다니면서 해외선교비를 모금하는 일은 유사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몇 주간의 모금 끝에 여비와 캐리의 남은 가족의 1년 동안의 생활비가 마련되었다.
영국의 동인도회사는 영국의 상인과 정부관리들만 인도 식민지역에 들어올 수 있게 했고 선교사는 제외했다. 그리하여 캐리는 토마스가 개인적으로 아는 배의 화이트 선장의 양해를 얻어 인도로 떠났다. 그러나 선장은 선교사인 캐리 일행을 인도로 태워 가는 것이 너무 위태로워서 그들을 한 시간 후 포츠머스 항구에 하선시켜버렸다. 캐리는 집으로 돌아와 아내 돌리와 가족을 만났다. 그런데 이것이 캐리의 온 가족과 처제까지 모두 같이 인도로 떠나는 기회가 되었다. 가족이 흩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지만 선교지의 불편과 위험을 염려해서 헤어지기로 했다가 이제 가족 전원이 각오를 새롭게 하여 부인과 처제와 아이 네 명을 데리고 인도로 떠나게 되었다. 캐리는 영국을 떠나기 전에 존 뉴튼(Newton) 목사를 만나보았다. 그는 노예상인의 상선 선장 노릇을 하다가 뉘우치고 목사가 된 사람이었다. 또 영국의 동인도회사 목사로 가서 몇 년 일하고 돌아온 한 목사(성공회)도 만나보았다.
1793년 6월 13일 캐리는 가족과 토마스 박사 부부와 함께 포츠머스 항을 떠나서 덴마크 상선을 타고 당시 영국과 싸우고 있던 프랑스의 군함의 감시를 피해서 도바 해협을 빠져 나왔다. 40미터 길이의 돛대를 3개 단 이 배는 인도까지 5개월 걸리는 항해를 하였다. 이 배는 아프리카 북서해안으로 내려가 북서무역풍을 타고 대서양을 건너 남미까지 가서 트리니다드 섬에 대였다가,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 연안을 항해하여 남동무역풍을 타고 남아프리카의 희망봉에서 인도양으로 들어간 뒤 남동무역풍을 타고 적도까지 내려가 인도네시아 해안까지 가서는 거기서 계절풍을 타고 인도 뱅갈 만에 이르게 되었고, 그곳 북쪽 끝에 있는 캘커타까지 항해하였다. 중간에 폭풍의 위험도 있었지만 이 일행은 1793년 10월에 뱅갈 만에 입항하였다.
캐리는 기후와 생활양식이 전연 다른 인도 땅에 와서 가족과 함께 기근과 피곤과 여러가지 위험을 겪고 드디어 정착하여 설교할 수 있는 캘커타 지역의 무드나바티라는 곳에 왔다. 여기에 있던 독실한 영국인 조지 우드니아가 경영하던 염색공장 경영의 감독직을 캐리가 맡게 되어 가족생활이 안정되고 경제적으로도 어려움이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캐리는 동인도회사에 속하게 되었다. 다른 곳에서 의료사역 하던 토마스 박사도 와서 동역자가 되었다. 공장일이 순조롭게 돌아가는 동안 그는 인도 본토민 언어로 성서번역에 열중하였다. 토마스 박사도 캐리와 함께 번역에 힘썼다. 그는 어려운 산스크리트어를 배웠고 뱅갈어로도 성서를 번역하였다. 캐리는 인도의 여러 방언을 공부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는 되도록 많은 언어로 성서를 번역하고자 했다. 그는 인도인을 회심시켜서 신자를 얻는 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했지만 쉽지 않았다. 공장의 직공 2,300명에게 성서이야기를 들려주고 예배를 드리곤 했지만 개종자는 나오지 않았다.
영국의 선교본부가 선교사를 더 보내달라는 편지를 받고 존 화운틴 목사를 보내서 그가 캐리를 도와 공장감독의 보조가 되었다. 1797년에 캐리가 번역한 뱅갈어 신약의 낱권이 인쇄기가 들어와서 출판되었다. 성서를 인쇄할 수 있는 양의 종이와 활자를 구입할 돈을 빌려준 사람이 있었다. 출판된 신약성서 낱권은 무료로 나눠주었다. 몇 년 후에는 신약성서의 번역된 낱권을 다 모은 한 권의 뱅갈어 신약성서가 출판되었다.
캐리와 그의 동역자들이 캘커타 지방에서 그동안 선교한 여러가지 업적이 영국 교계에 알려지자 영국 교회 전체가 합류해서 동인도회사의 선교사 입국 억제 정책을 비판하고 영국 국회에 선교사들의 자유로운 인도 입국을 청원하였다. 국회에서 찬반양론이 격돌했다. 반대론자들은 선교사들이 인도의 재래종교와 충돌하면 인도와의 무역사업에 불리하다고 주장했다. 이때 영국의 노예제도 반대론자인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가 일어나서 윌리엄 캐리가 인도에서 일한 사례들을 열거하면서 캐리가 번역작업과 문화사업과 원예학과 농학으로 인도 발전에 기여한 사실을 설명했다. 무엇보다도 캐리가 세람포르(Serampore)대학을 세운 것과 그리고 그가 받은 대학의 월급을 전부 선교비에 사용한다는 사실이 국회의원들을 감동시켰다. 결국 윌버포스의 주장이 관철되어 1813년 6월 28일자로 동인도회사의 규정이 수정되고 인도에 선교사가 자유롭게 들어가서 선교하는 길이 트이고 국회는 인도 국민의 복지를 향상시키는 것이 영국의 목적이므로 유용한 종교와 도덕교육을 인도인에게 준다는 규정을 새로 만들었다.
캐리는 덴마크 왕이 준 6천 평의 땅과 인도의 영국 총독이 후원한 돈으로 세람포르 기독교 대학을 세웠는데 인도에서 최초로 학위를 주는 대학이 되었다. 세람포르 대학에서 캐리는 600명 이상의 개종한 학생들에게 종교와 과학을 가르치면서 고령에도 불구하고 신약성서 개역을 꾸준히 진행했다. 1833년 7월에 캐리는 뇌졸중을 일으켜서 병상에 눕게 되었는데 많은 사람이 그의 병상을 찾아왔다. 그 중 알렉산더 두프(Alexander Duff, 1806~1878)라는 사람은 스코틀랜드 교회의 최초의 선교사로서 1830년에 캘커타에 와서 이때 캐리를 찾았다. 그는 병상에 누운 캐리의 선교사업에 대하여 들은 일들을 이야기하면서 자기도 인도에 대학을 세우고 싶다고 말했다. 캐리 선교사는 1834년 6월 9일 병상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그의 묘비를 생전의 그의 지시대로 세웠는데 소박한 돌에 그의 이름과 생년월일을 새기고 비문은 “비천하고 가난하며 벌레같이 보잘것없는 자가 주님의 친절한 팔에 쉬겠네”라고 쓴 것이었다.
윌리엄 캐리는 프로테스탄트 선교의 선구자이자 모범자로서 선교 초기에 경험한 모든 어려움과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였으며 어떤 선교사업을 어떻게 성취했는지에 대한 모든 교훈을 주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선교지에 가기 전 필요한 모든 지식과 방법까지 연구하고 준비하여 떠난 사람이다. 그가 인도인의 악습 한 가지를 고쳐주기 위하여 싸운 것은 ‘사티’라고 불리는 풍속인데 힌두교인들이 남편이 죽으면 과부가 된 아내도 남편의 시신과 함께 산 채로 화장해버리는 것이었다. 인도의 영국 총독은 캐리의 사티 폐지운동에 호응하여 법령으로 사티를 폐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