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68)

헨리 마틴의 선교





3. 헨리 마틴의 선교

헨리 마틴(Henry Martyn, 1781~1812)은 영국의 동인도회사가 일반 선교사들이 인도 식민지역에 들어오는 것을 금하고 있었을 때 이 회사의 목사로서 인도에 와서 선교에 힘썼다. 그는 가난한 한 광부의 가정에서 태어난 허약한 체질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성적이 우수하였고 15세 때 옥스퍼드대학의 코푸스 크리스티 칼레지(Corpus Christi College)에 지원했다가 떨어졌다. 입학시험 성적으로는 통과했는데 떨어진 것을 회고한 글에서 그는 말하기를 만일 합격되었더라면 방탕한 사람들을 만나서 방탕하게 되었을 것이 분명하다고 하였다.

마틴은 케임브리지대학에 입학해서 우등생으로 졸업했다. 그는 사도행전을 읽고 자신의 신앙을 일깨우기 시작하여 하나님의 긍휼과 사죄의 용서를 자기가 받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미래의 심판에 대한 공포가 엄습하는 것을 느끼기도 했다. 그는 1801년 케임브리지대학이 수여하는 그 해의 최우수상을 받았다. 이때 그는 겨우 20세였는데 그것이 그가 바라던 최고의 것이 아니었고, 다만 그것의 그림자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대학의 연구조교(fellow) 시험에 합격해서 조교가 되었다. 이것이 그의 학자로서의 생애의 시작이다.

마틴이 선교사의 소명을 받은 것은 그가 당시 인도의 유일한 선교사 윌리엄 캐리의 선교사역의 업적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때였다. 그는 선교사로 떠나기까지 많은 고민과 고통을 겪었지만 이교도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기쁨을 생각할 때 주저하지 않고 결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케임브리지 시에 있는 홀리트리니티교회(Church of the Holy Trinity)의 한 교구를 맡아 목회하면서 목사안수를 받고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1803년 말경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의 정식시험관의 직무를 맡게 되었다. 그것은 고전(古典)학 부문의 시험관이었다. 그는 이 직분을 맡은 후 고전서적들을 다시 읽어보게 되어 스스로 감명을 받은 책들도 있었다. 그는 교회에서도 목회자로 설교해야만 했다. 그가 고향에 가서 큰 교회에서 설교할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해 왔지만 그보다도 그는 병든 자들과 죽어가는 자들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을 즐거운 것으로 생각했다.

마틴은 동인도회사 전속목사에 지망한 후 고향 콘웰(Cornwell)에 처음으로 찾아갔는데 이것이 그에게는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이었다. 마틴은 영국을 떠나기 전 많은 친구들을 만나서 석별의 시간을 가졌다. 1805년 7월 17일 마틴은 ‘유니온 이스트 인디안’(The Union East Indian)이란 배를 타고 포츠머스 항을 떠났다. 이 배는 아프리카 남단 희망봉을 거쳐서 인도의 마드라스에 무사히 입항하였다. 항해 기간에 마틴은 선원들에게 주일날 설교하였는데 죄를 정죄하는 설교를 많이 하였다. 선원들이 듣기 싫어하는 설교여서 선장이 마틴에게 충고하기를 정죄하는 설교를 계속하면 선원들이 예배에 불참할 것이라고 하였다. 마틴은 선원들의 행동을 보고 견딜 수 없는 분노를 품게 되었던 것이다.

1806년 4월 22일 해가 뜰 무렵에 마틴이 타고 온 배가 인도 마드라스(Madras)에 입항했다. 그는 자기가 인도에 왔다는 사실이 그렇게도 기쁘고 행복할 줄 몰랐다고 일기장에 기록했다. 그의 목적지 캘커타에 가서 그 근방 알딘에 있는 브라운(David Brown) 목사의 처소에서 여장을 풀었다. 브라운 목사와 가족이 독신으로 온 마틴 목사를 진심으로 환영하고 그가 거처할 정자를 마련해주었는데 그곳은 강가에서 멀지 않았고 브라운 목사의 집에서도 멀지 않았다.

마틴은 도착하자마자 열병에 걸렸다. 그곳 기후는 매일 평균 40도를 오르내리는 무서운 더위였다. 마틴은 본래 허약한 체질인데다가 거처도 불편하고 간병도 어려워서 자기 인생이 마감되는 듯한 위기감을 가졌다. 그러나 그는 그 나라의 불쌍한 사람들을 위한 기도를 계속 드렸고 마침내 병에서 회복되었다.

마틴은 캐리의 인도선교 이야기를 많이 듣고 그의 발자취를 따르고 싶어했다. 그의 선교지는 캘커타 지방이어서 캐리가 선교하던 세람포르와 과히 멀지 않았는데 그곳에서 마귀를 예배하고 불쌍한 주민들을 불러내는 북소리와 징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었고, 근처에서 잔인한 종교의식과 끔찍한 우상숭배의 모습을 보았고, 어느 화장터에서는 장작더미 위에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숨이 넘어가지 않은 한 여인의 비참을 보고 구해주려고 뛰어들기도 했다. 그는 인도에 온 것이 마치 지옥에 온 것만 같았다고 술회하였다.

마틴은 현지 언어를 배우려 했으나 선생을 찾기 힘들었다. 그는 힌두스타니어를 배우려고 애썼다. 마틴은 그곳에 정착한 후 그곳 영국인들의 교회에서 설교하였는데 비판이 많았다. 마틴이 회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든가 사람의 본성이 전적으로 타락하였다거나 그리스도의 의만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어서 인간의 의는 구원에 도움이 안 된다고 설교한 것이 공격을 받았다. 마틴은 보수적인 칼뱅주의와 바울의 신학대로 설교하였는데 아르미니우스의 합리주의자들의 반대에 부딪혔던 것이다. 마틴은 영국 국교 성공회 목사였지만 영국 정부가 침례교회를 박해하는 시책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던 것이 또한 문제가 되어서 선교지의 다른 성공회 목사들과 논쟁이 있었는데, 훗날 마틴은 그 일을 회상하고 자기에게 직접 관계되지 않은 문제에 너무 관여한 것을 뉘우쳤다.

마틴은 1806년에 동인도회사가 정해 준 사역지 디나포레(Dinapore)로 갔다. 이 지역에서 그는 이교도들 사이에서 사역할 것이었다. 우상을 숭배하고 있던 그곳 사람들에게 우상을 버리도록 열심히 전도하였다. 그는 시간 나는 대로 힌두스타니어와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였다. 때로는 그를 돕는 원주민 수행원 수 명과 함께 총을 들고 숲에 사냥하러 나가 약간 큰 새를 잡기도 했다. 디나포레는 마틴이 얼마 동안 거주하면서 선교한 지역이었다.

마틴은 이곳에서 먼저 세 가지 목표를 정했는데 그것은 원주민 학교를 세우는 일과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설교할 수 있을 정도로 힌두스타니어를 배울 것과 마지막으로 성서와 신앙교양을 위한 소책자들을 힌두스타니어로 번역해서 책자로 만들어 주민들에게 배포하는 일이었다. 그는 힌두스타니어 외에도 인도에서 쓰이는 여러 말을 배워야 할 것을 알고 있었다. 인도에서는 4마일마다 언어가 바뀐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는 언어 공부를 위해서 달리 시간을 허비하는 일 없었다. 인도에는 신들도 많아서 마을마다 다른 신을 섬겼고 신화도 달랐다.

마틴은 이곳 디나포레에 있는 영국군의 병영을 찾아가서 병사들에게 기도문을 읽어 주었다. 영국인과 다른 유럽인들 사이에서 목회하는 것이 그의 첫째가는 의무였다. 동인도회사는 인도 여러 곳에 지사와 영국군대를 두고 있었다. 그는 주일날 영국인 가족들을 모이게 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는 설교하면서 원고를 읽지 않고 즉흥설교처럼 설교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그의 이런 설교를 반대하였다. 그는 불쾌하게 생각되었으나 교인들과의 화목을 위해 원고를 읽는 설교를 하였다. 디나포레의 교인들이 목사에 대한 존경과 예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일이 한두 번이나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가 캘커타에 도착하여 그곳 교회에서 설교한 것을 공격한 한 목사의 마틴을 대적하는 설교문이 인쇄되어서 출간되었다는 소문도 들려왔다. 마틴은 소명을 받은 지 7년이 되던 1807년 새해에 들어서면서 아직까지는 자기가 선교사의 일에서 시험을 당한 일이 별로 없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에 감사하면서 결국 자기가 이기는 자가 될 것이라고 믿었다.

마틴은 동인도회사 소속 가족들을 목회하는 사역자였지만 원주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에 관심이 컸다. 그리하여 그는 원주민들과 자주 만나는 시간을 가졌고 그들과 대화하기 위하여 바깥으로 나올 때엔 말을 타고 다니지 않고 걸어서 다녔다. 이제 그는 대화를 할 정도로 원주민 언어를 배웠던 것이다. 요한1서 번역이 완료되었을 때 번역하는 일에 협력해준 회교 신자 문쉬와 대화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 신앙이 아주 잘 설명된 구절을 마틴이 자랑삼아 지적했을 때 문쉬는 절대로 믿을 수 없다고 대답했다. 마틴은 문쉬와의 대화가 기술적으로 서툴렀다고 생각했다. 원주민에게 우상숭배의 잘못을 설명할 때도 논쟁적이 되어서 사람들이 화를 낸 일이 많았던 것을 그는 뉘우치게 되었다. 마틴은 인도의 상류층 사람들과의 대화를 모색했으나 실패했다. 길 가다가 거리에서 브라만족 사람이 경을 읽고 사람들에게 설명하는 것을 보고는 마틴이 질문을 던져서 긴 대화를 이어가다가 구원의 역사에 대해 말을 시작하려 했을 때 그 대화가 끝나버린 일이 있었다.

마틴은 디나포레 여러 곳에 자비로 학교 다섯 개를 새웠는데 주민들은 그가 아이들을 억지로 붙잡아놓고 그리스도교인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소문을 피웠다. 그리하여 한 학교에서는 학생 수가 40명에서 8명으로 줄었고 어느 학교에서는 교실을 증설할 땅을 지주가 팔지 않게 되었다. 한 곳에서는 동인도회사의 한 사환이 그리스도교를 버리고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고 사람들에게 소문을 피우고는 자기만을 위한 작은 이슬람 사원을 지어놓고 있었다.

1807년 3월 15일 그가 인도에 온 지 1년이 채 되지 않아서 공동기도서를 힌두스타니어로 번역한 것을 가지고 예배를 인도하고 힌두스타니어로 처음으로 설교하였다. 이날 예배에는 200여 명의 포르투갈인, 로마가톨릭 교인, 이슬람 교도들이 참석하였다. 그리고 예수의 비유 해설집도 번역되어 발간되었다. 마틴은 주일날에는 유럽인들의 예배와 오후 2시 힌두교도들의 모임에서 설교하였고 병원 방문도 갔다. 모임의 힌두교도들은 전부 여자였다. 그가 세운 학교의 학생들이 글을 배워서 책을 읽을 수 있게 되어 읽을 만한 책을 아이들에게 주어야 했는데 고민이 있었다. 학부모들은 마틴이 아이들을 개종시킬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의 비유 해석을 먼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없어서 힌두교 서적으로서 해가 되지 않는 책을 먼저 줄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고민을 가지고 마틴은 친구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리스도교 교과서가 소개되는 것을 보기 전에는 학교를 더 세우지 않겠다고 말했다. 마틴에게 다른 한 문제는 한 원주민 여인이 세례를 받겠다고 청원해온 일이었다. 그는 그 여인이 흠이 없고 세례문답에 바로 대답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죄를 진정으로 회개한 것 같지 않아서 세례를 주지 않았다. 마틴은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하였는데 다른 곳에서 목회하던 그의 한 친구는 원주민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듣고 그와 편지로 이 문제를 의논하였다. 로마가톨릭 선교사들은 세례 받겠다는 사람에게는 무조건 세례를 주었는데 마틴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마틴은 이교가 많고 그 역사와 전통이 유별나게 살아서 사람들의 정신과 도덕과 생활습성을 지배하고 있는 인도와 같은 나라에서는 설교나 대화와 같은 말로써 그들을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기 어렵다고 생각했고, 되도록 인도인들의 말을 많이 배워서 성서와 신앙교양 서적을 많이 출판해서 보급하는 길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인도에 도착한 날부터 말을 배우기 위해서 사람들과 대화하는 기회를 많이 가졌고 인도의 말들에 대한 책을 구하여 연구하였고 개인선생을 두어서 말을 배웠다. 그는 인도인의 말만이 아니고 무슬림들이 사용하는 아랍어와 페르시아어까지 공부하였다. 그는 캘커타를 떠나서 사역지로 파송받기 전부터 성경을 힌두어로 번역하는 일에 시간을 많이 보냈다. 마틴보다 먼저 동인도회사 소속 목사로 인도에 온 데이비드 브라운 목사도 성경번역을 위한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틴을 천재적인 인물로 알고부터는 마틴에게 의존하게 되었다. 마틴은 성서를 번역하는 일이 단순히 말을 바꿔놓는 일이 아니라고 보았다. 성서를 깊이 읽고 번역하면서 먼저 성서의 비밀을 공부하는 즐거움을 맛보아야 하며 지금처럼 언어의 아름다움과 사상의 중요성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다고 말하였다. 그는 밤늦게까지 성서를 번역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에 놀라움과 경의가 마음에 가득해져서 잠자리에 들곤 하였다.

마틴은 그동안 줄곧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공부해왔는데 여자들을 위하여 누가복음 번역 작업을 시작했고 베드로전서를 또한 번역했다. 그는 학교의 어린아이들에게 예수의 산상수훈을 소개하여 주었을 때와 이교도 소년들이 성경의 예수의 말씀을 읽는 것을 들었을 때 큰 행복감을 가졌다. 그 지방에서는 선교사들이 공개적으로 설교하는 것을 금하고 있었다. 학교의 아이들에게 번역한 성경을 배포할 때 어떤 일이 생길지도 몰라서 공중 앞에 설교하는 일을 보류하였다.

마틴은 영국에서 서로 사랑하던 한 여성이 있었는데, 몸은 허약한데 할 일은 많은 마틴은 결혼을 생각하게 되어 그 여성에게 청혼하였다. 그는 정말 동반자 아내가 절실히 필요해서 청혼하고 회답을 고대했다. 인도의 풍토와 사람들의 생활과 선교사업의 애로 등등 자세히 알리고 인도로 오기를 결심해 줄 것을 간청했는데 그녀는 쉽게 결심하지 못하였다. 어느 날 마틴이 이층 다락방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래층에서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애인의 목소리 같아서 허둥지둥 일어나 계단을 급하게 내려가다가 바닥에 떨어졌는데 그것은 낮잠의 꿈이었다. 그는 끝내 홀로 지냈다.

마틴은 1808년 초에 가슴에 심한 통증을 느꼈는데 그것이 이따금 재발하여 건강을 위하여 잠시 모든 일을 두고 쉬어야만 하는 상태였다. 3월에 마틴은 드디어 신약전서를 힌두스타니어로 완역했다. 이것은 그의 위대한 한 작업이었고 그가 캘커타에 도착한 이후 뜻을 세우고 시작한 일이었다. 그는 번역원고를 눈이 아프도록 읽고 또 읽으며 교정하였는데 밤에 자기 몸의 열기가 섭씨 36도를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고 말하였다. 그는 이때 또 페르시아 말로 신약성서를 번역한 원고를 번역 조력자 사밧에게 주어 검토하게 하였다. 건강이 안 좋았지만 유럽인과 원주민들을 위한 목회도 계속했고 신앙이 돈독한 사람들을 집으로 불러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통증이 계속되고 고열이 일고 현기증이 생겨서 쓰러지고 말았다. 의식을 되찾은 후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찬양하고 집을 정돈하고 유언장을 작성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는 3세기 초 에뎃사 교회에서 사용하던 시리아어 신약성서 「페쉬타」를 페르시아어로 새로 번역하는 작업 중이었다. 그는 페르시아어 성서 완역을 하지 못한 것이 마음의 부담이었다. 그는 페르시아어와 헬라어를 비교해가면서 8월에 마태복음 페르시아어 번역을 끝냈다.

그는 1808년 5월에 처음으로 한 어린이에게 힌두스타니어로 세례를 베풀었다. 그는 1809년 1월 디나포레에서 카운포레로 사역지를 옮겼다. 마틴은 사랑하던 여동생이 죽었다는 비보를 듣고 슬퍼했다. 그가 인도에 온 후 3년 동안 다른 여동생 한 사람과 어머니가 별세하였는데 이제 그의 혈육이 다 죽고 자기만 남게 된 것이다. 카운포레로 옮겨 온 후 그는 주민들을 상대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런데 불쌍한 거지들이 떼를 지어 다니고 있었는데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전에 구제품을 나눠주기로 했다. 한때는 집 앞에 800명이 넘는 거지가 모여들었다. 그들에게 힌두스타니어로 번역된 창세기를 펴서 하나님의 천지창조를 가르쳤다. 거지들은 그의 설교에 크게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갠지스 강을 신으로 알고 예배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의 병이 점점 악화되어 이제 말씀을 설교할 수 없게 된 사실을 선포했을 때 수백 명의 거지들이 그의 건강을 위해 소리 높여 기도했다. 그는 안정을 조금 찾는 대로 교회에서 예배를 인도했고 나중에는 친구였던 코리 목사가 그의 사역 절반 정도를 대신 맡게 되어 마틴의 짐이 조금 가볍게 되었으나 잠시라도 영국에 귀국해야만 할 단계에 이르렀다. 그는 10월 1일 자기의 적극적인 노력으로 그곳에 처음으로 서게 된 교회당에서 주민들에게 마지막 설교를 하였다. 그의 마지막 설교를 들은 한 영국인 부인 셔우드(Sherwood)는 그날 자기가 받은 감명을 다음과 같이 전하였다. “그는 아주 약하고 희미한 소리로 말씀을 시작했다. 그러나 설교를 진행할수록 목소리에 힘이 생겼고 마치 위로부터 감동을 받은 사람 같았다. 청중들이 그렇게 감동을 받을 수가 없었다. 이 거룩한 하늘의 사람은 카운포레와 그곳에서 그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떠났다. 그는 우리를 떠났다. 그를 다시 보리라는 소망도 거의 없었다. 구주의 긍휼하심으로 우리 아버지의 집에서 다시 만날 때까지는 그를 다시 못 보리라.”

마틴은 인도의 봄베이로 가는 배를 탔는데 푸나(Poonah) 주재 영국총독 대리로 부임해 가는 엘핀스톤(Elphinstone)과 동승하게 되었다. 이 배 선장 킨세이(Kinsay)는 마틴에게 인도의 슈바르츠 독일인 선교사에 대한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려주었다. 킨세이는 슈바르츠의 제자였다. 슈바르츠는 선교지의 국왕의 신뢰를 받고 그의 친구가 되어 정부의 총리와 비슷한 관직을 맡아서 국정을 돌보게 되었고, 왕이 연소한 조카에게 왕위를 물려주면서 슈바르츠가 그를 보호하고 도와줄 것을 당부하였다. 그리하여 슈바르츠는 어린 왕과 한 방에서 자고 지냈다고 하였다. 마틴은 선장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슈바르츠 선교사역에 감명을 받았다. 마틴은 동승한 엘핀스톤이 고전학문의 지식이 있는 것을 알고 좋은 말동무로 삼았다.

배가 중간에 몇 군데 기항하였다가 2월 7일 고아에 도착했다. 여기서 그는 일행과 함께 그곳의 교회당과 수녀원을 찾아보았다. 그곳의 초대 선교사 프란시스 자비에르의 무덤이 있어서 찾아보았다. 그는 그곳에 가톨릭교회 예수회 신부들의 종교재판소가 있는 것을 알았는데 사람들이 모두 무서워하고 있었다. 고아는 포르투갈 점령지여서 포르투갈인이 20만 명 살고 있었는데 누구든지 죄를 짓거나 이단자를 따르면 무서운 형벌을 받는 곳이었다. 2월 18일에 봄베이에 도착하여 주일날 예배 때 마틴이 설교하였다. 그리고 그곳의 가장 유명한 원주민 종교학자가 마틴과의 대화를 요청해왔다. 그는 모든 종교의 진리는 다 같은 것이라고 변론하였고 마틴은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변호했다. 그 학자는 동방의 세 박사들이 어떻게 아랍에서 7일 만에 예루살렘까지 갈 수 있었겠느냐고 했다. 그는 성서를 잘 알고 있는 이슬람 학자였다. 죄의 용서와 화해의 이치를 알면서도 마틴이 말한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믿지 않았다. 이슬람교에는 속죄의 교리가 빈약하였다. 그는 성서를 많이 읽는 사람인데 로마서 8장 첫 부분을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하였다.

마틴은 가는 곳에서마다 이름난 이슬람 학자들, 종교학자들과 면담을 갖고 토론하면서 복음을 증언하였다. 타고 간 배에서는 저녁마다 예배를 드리고 마틴이 설교하였다. 그리고 섬에 상륙해서는 관리들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페르시아 만의 기후는 섭씨 52도를 오르내리는 무서운 더위였다. 그는 밤에 잠을 잘 수 없었고 낮에는 잠을 보충할 시간의 여유도 없어서 어떻게 건강을 유지할 수 있을지 큰 걱정이었다. 배의 승무원은 항해사 45명과 12명의 포수 군인들이었다.

마틴은 쉬라즈(Shiraz)에 도착했을 때 이곳 왕자의 비서관의 면담 초청을 받았다. 왕자는 그곳의 최고 신문작가였다. 그리고 그곳 대학생 두 명이 와서 마틴과의 토론을 원했다. 이들은 다 무슬림이었다. 그들은 그리스도교가 말하는 이적들은 사실이라기보다 교회가 전해서 내려온 전통일 뿐이라고 말하려 했다. 마틴은 이슬람의 코란경에 나오는 기적은 한갓 전통이 만들어 놓은 것일지 모르나 성서의 기적은 목격자의 증언이라고 말했다. 또 유대인으로서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람이 마틴을 찾아와서 모세오경에서 마호메트를 발견하였다고 말하면서 횡설수설하였다. 하루는 유대인 학사 두 사람이 마틴과 변론하기 위하여 단단히 준비하고 왔다. 그 유대인 학사는 예수를 메시아로 믿느냐고 마틴에게 물었다. 그는 마호메트가 구약에서 예언된 사람이란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모세에게 12명의 지파의 족장이 있었듯이 마호메트도 그러했다고 말했다. 마틴은 그들 12명은 종교적 임무를 맡은 것이 아니고 정치와 군사와 같은 세속적인 임무를 맡은 사람들이었다고 대답했다. 어느 때나 마틴은 자기를 찾아와 대화하자는 사람들과 격론 끝에 헤어졌다. 그가 기항한 섬이나 도시에는 반드시 마틴의 명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전날 찾아왔던 유대인이 다시 와서 구약성서의 사건들과 말씀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에게 적용하는 것들이 있는데 사실은 예수와 관계없는 것들이어서 잘못 적용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대단히 심각한 문제였다. 마틴은 이곳 쉬라즈에서 선교의 기회를 얻기 위하여 자기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다 받아들여서 토론도 하고 격론도 벌였다. 그러나 주일날은 안식하는 날이어서 7월 14일 주일을 조용히 지내는 동안 사랑하는 애인이 생각났다고 일기에 적었다. 그리고 이틀 후 그는 이곳에서 이슬람 종교 학자들과 처음으로 공개토론을 가졌다. 쉬라즈의 이슬람 종교의 최고 권위 있는 학자 무추히드(Moojtuhid)는 영혼에 대하여 한 시간 가까이 강론하고는 자기 철학을 늘어놓았다. 마틴은 그가 토론을 원하는 것 같지 않아 들어주기만 하였다. 중간에 그를 반박하기 위하여 유대인이 반론을 들고 나오면 아예 무시해버렸다. 나중에 결국 그는 예수가 마호메트를 예언하고 증거한 한 예언자라고 말했다. 마호메트의 기적 문제가 다시 토론되었는데 그들은 그의 기적의 증거가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마틴은 증인은 없다고 말하였다.

하루 저녁은 마틴이 페르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이슬람 사원을 찾아가서 백발이 성성한 노인 선생과 만나 대화했다. 그 선생은 인생에서 겪는 고통과 기쁨은 다 비슷한 것이라고 말했다. 마틴은 그가 옛날 그리스의 스피들처럼 ‘무감정’ 상태를 설득하는 것으로 알고 선생은 무감정의 상태에 도달하느냐고 묻자 그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 선생이 기쁨과 고통이 왜 동일하지 않냐고 질문하자 마틴은 지각이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들은 묵상으로 아픔과 괴로움을 다 잊고 기쁨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8월 26일에 마틴은 캘커타의 직전 대사였고 지금은 파스(Fars)의 수상인 누비 칸(Nubee Khan)을 그의 궁내에서 만났다. 여기서 그는 여러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 지구가 움직인다는 이론을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마틴에게 그 대답을 기대하는 듯했다. 그래서 마틴은 옆에 있던 서기관에게 도구를 가져오라고 하여 원뿔(원추)의 단면도를 그린 뒤 태양 주위에 타원형으로 늘어서 있는 천체들이 하나의 초점을 중심으로 하고 돈다는 사실을 설명했으나 그는 수학을 전연 모르는 사람이어서 설명을 계속하는 것이 무의미해 보여서 중단하였다.

이해 성탄절에 마틴은 러시아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을 위해서 큰 잔치를 열었는데 공작의 신분인 자니 칸(Jani Khan)의 청을 받아들여서 스피들의 백발노인 스승과 그의 제자들도 초청했다. 식사 전 5~6 시간 동안 다같이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이 있었고 식사 후에 헤어졌다. 마틴은 이 크리스마스 절기에 그들이 한데 모여서 즐거운 시간을 가진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잊지 말기를 바랄 뿐이라고 자기 소망을 말했더니 그 노인이 “신께서 자기가 택한 자들을 인도하실 것이오”라고 대답했다.

1812년은 마틴의 생애의 마지막이 되는 해였다. 그는 페르시아에 와서 많은 이슬람 학자들과 왕족들과 고관들을 만났고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도 만났고 많은 사람의 방문과 초청을 받고 종교와 신앙에 대하여 대화도 하고 논쟁도 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무슬림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가는 곳에서마다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1월 15일에는 대학을 보러 알리 칸과 같이 갔다. ‘칸’이란 성은 왕족의 성이었다. 왕족들이 국가의 고관들이 되어 있었다. 그 대학은 폐허와 같이 빈약한 대학이었다. 그는 왕들이 모든 것을 빼앗아 가고 교사들에게는 봉급이 지급될 뿐이라고 말했다.

5월 15일 마틴이 페르시아에 들어온 지 1년이 되어 영국인 목사들과 함께 쉬라즈를 떠나 이제 콘스탄티노플을 향하여 험하고 불편한 길을 가면서 많은 괴로움을 겪게 되었다. 마틴은 두 달 동안 내내 고열이 계속되어서 자기가 번역한 페르시아어 성서를 페르시아 왕과 왕자를 직접 만나 뵙고 드리려던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동행하던 영국 가족들이 마틴을 극진히 간호하여 주었다. 쉬라즈에 있던 영국의 페르시아 대사 우슬리(Lord Gore Ouseley) 경이 마틴을 위로하면서 자기가 페르시아 왕에게 페르시아어 성서를 전달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는 나중에 약속한 대로 이행하였고 왕은 그 성서를 공적으로 인정한다고 선언하고 그 책이 인쇄되어 배포되도록 조치하였다.

마틴 일행은 이제 페르시아를 떠나 터키로 들어갈 때가 되어서 터키어를 할 줄 아는 사환을 찾아야만 했다. 그들은 9월 2일에 1,300 마일 떨어진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을 향하여 떠났다. 여러 곳을 거쳐 9월 7일에 쿠크(Khoock)란 곳에 도착해서 높고 장엄한 산을 보았는데 그 산이 아라랏(Ararat) 산이었다. 마틴은 노아가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렸을 장소가 어딘지 호기심이 생겼다.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서 새 세상에 안주한 것처럼 자기도 그리스도 안에서 안정을 누리고 마침내 영원한 성산에 내리게 될 것이라고 일기장에 기록하였다. 그는 여행하면서도 줄곧 히브리어 철자에 대해 생각했기 때문에 여행이 고단하다는 느낌이 없었다고 한다. 여행하면서 시편 15편과 16편에 대하여 계속 생각한 것을 적어 두었다. 그는 참으로 위험한 육로여행을 이때 경험했다. 강도들에게 붙들려서 죽임을 당할 뻔도 했다. 무서운 전염병이 그 지방을 휩쓸고 있었다. 마틴은 그 전염병 탓인지 자기의 병과 쇠약함 탓인지 1812년 10월 16일에 여로에서 객사하였다. 마틴은 32세로 그의 생애를 끝냈다. 영국으로 가서 건강을 회복하여 다시 동방으로 와서 선교할 생각이었는데 애석하게 죽었다.

영국에 많은 선교단체가 생겨서 인도를 비롯한 세계 각지에 선교사를 파송했다. 런던에 그리스도교 문서 출판사(Religious Tract Society)가 1799년에 설립되어 해외 선교지에 성서와 서적을 공급하기 시작했다. 1792년에 침례교선교회가 설립되었고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가 1796년에 설립되었고 성공회선교협회(Church Mission Society)가 1799년에 조직되었고 감리교선교회가 1817년에 조직되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인도 선교사로서 파송한 최초의 선교사 알렉산더 두프(Alexander Duff, 1806~1878)가 1830년에 인도 캘커타에 도착하여 선교를 시작했다. 그는 캐리를 찾아가서 자문을 얻으려 했으나 그때 캐리는 임종에 가까워 병상에 있었다. 두프는 캘커타에서 선교 목적으로 학교를 세워서 인도의 어린이들을 교육하기 시작했는데 그가 세운 학교가 캘커타대학으로 성장하여 인도의 고등교육에 크게 공헌하였다. 그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귀국해서 에딘버러대학에서 선교학을 강의하였다.

인도 선교는 재래종교의 반발로 어려움을 겪었고, 인도인의 국민운동이 일으킨 내셔널리즘의 발동으로 영국 식민정부에 대한 배척운동과 더불어 선교사 배척운동이 이따금 일어났다. 한때는 영국인들을 협소한 곳에 잡아넣고 질식시켜서 많은 사람이 죽기도 했고 1857년 7월에는 영국 정부의 용병으로 복무하던 인도인들이 반란을 일으켜 이슬람 교도들과 합세해서 영국인을 하루에 900명을 죽인 일이 있었는데 이때 영국 선교사들과 인도인 크리스천 중 죽임을 당한 사람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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