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계/교회

[강남교회] 십자가 밑의 도박꾼들

2011년 8월 21일 설교자 전병금 목사

성경본문  
 
요한복음 19:23~24

설교문

1941년 12월 7일 주일날 아침, 일본의 353대의 비행기가 진주만 상공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때부터 2 시간 안에 미국의 8대의 커다란 전투함과 6개의 주요비행장에 있던 거의 모든 비행기와 2천 4백명의 인명이 피해를 입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일본의 진주만 폭격입니다. 미국은 그 때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진주만 폭격이 있던 날 아침 7시에 일본 전투기들은 진주만으로부터 50분 거리 밖에 있었고, 두 명의 미군이 작은 레이더 관측 스크린을 통해 태평양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스크린에 점과 점이 나타나더니 화면 전체를 채웠습니다. 두 미군은 그날의 일직사관인 해군 대위에게 신고했습니다. 그날은 주일이라 일직사관 외에는 장교들이 없었습니다. 그 해군 대위는 그 점들이 캘리포니아로부터 오는 전투기 편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걱정하지 말라. 그것은 우리 비행편대가 오고 있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보통 때라면 그 50분은 일본 전투기에 대항하기 위해 진주만에 있는 전투기들을 가동해야 할 시간이었고, 전투 준비에 만전을 기해야 할 시간이었으며, 주변의 민간인들을 피난시켜야 할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해군 대위는 그 중요한 50분의 시간에 국가가 그에게 준 사명에 무감각해 그만 엄청난 재앙을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예수께서 마지막 재판에서 빌라도로부터 사형 판결을 받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었고, 4명의 군인들이 사형을 집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얻은 것은 예수의 옷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통상적으로 속옷 위에다 겉옷을 걸치고 거기에 띠를 매었습니다. 그리고 터번을 두르고 신을 신었습니다.

따라서 예수께서 입으신 것도 속옷, 겉옷, 띠, 터번, 신 이렇게 다섯 가지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은 넷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제비를 뽑아서 그것들을 취하고 나머지 하나 속옷이 남았습니다. 그 속옷은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네 조각으로 나누면 무용지물이 됩니다. 그래서 그것의 주인을 가리기 위해 그들은 다섯 번째 제비뽑기를 했습니다.

그 네 명의 병사들은 참으로 무정한 사람들입니다. 거기 죄수 세 사람이 비참하게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는데 그 밑에서 죄수들의 옷을 서로 갖기 위해 제비를 뽑고 있으니 정말 잔인한 자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특히 그 자리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의 메시야인 예수께서 비참하게 죽어 가고 있는데, 그의 옷을 제비뽑기하여 나누고 있으니 한심한 노릇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깊은 뜻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그 깊은 뜻이 무엇인지 알고 우리의 삶에 적용하여 주님의 은혜를 받으시길 바랍니다.

1. 십자가 밑에서 도박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아래에서 제비뽑기를 하는 군인들은 도박꾼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인간은 모두가 도박꾼들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어려서부터 벌써 경쟁사회에서 살아갑니다. 우리 어린이들은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부터 벌써 영어공부를 하고, 각종 학원에 다니면서 적자생존의 경쟁을 체험합니다.

어떤 대학에 들어가느냐에 따라 자녀의 인생의 행로가 결정되기 때문에 피나는 싸움을 해야 합니다. 생존 경쟁에서 살아남느냐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느냐의 싸움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도박장과 같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밑의 군인들은 예수의 옷을 가지고 도박을 했습니다. 누가 마지막으로 예수의 속옷을 차지하느냐를 두고 도박을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도박을 하고 계셨습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께 충성해 당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에 걸었습니다. 따라서 이 십자가는 바로 인간에 대한 예수의 최종적이면서도 최대의 호소였으며, 하나님의 뜻에 대한 최후의 그리고 최대의 순종의 행위였습니다. 스튜더트 케네디(Studdert Kennedy)는 이런 광경을 묵상하면서 시를 지었습니다. “군병들이 앉아서 그를 지켜보며 주사위를 가지고 장난하고 있는 동안에 그는 희생의 제물이 되었도다. 세상 죄를 없애기 위해 십자가상에서 죽으셨도다.

나의 그리스도로 주사위를 던지는 자, 바로 그 군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취하여 그것을 멀리 죽음의 계곡으로 던져 버렸노라. 이 세상을 구속하기 위하여 그 괴로움은 아직껏 끝나지 않았으며, 석양이 서편 하늘로 가라앉기 전에 진홍의 면류관을 쓰신 그분도 아셨으리로다, 이미 세상을 이기신 것을.“

예수께서는 인간의 구원을 위한 도박에 과감히 자신의 생명을 걸었습니다. 십자가의 모진 고통을 감내하면서 하나님의 구원의 섭리를 믿고 그 도박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우리 기독교인들도 모두가 도박꾼과 같습니다. 우리는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죽든 살든 우리 목숨을 주님께 내 놓아야 할 것입니다.
 
슈바이처, 테레사, 주기철, 손양원, 장기려 등 위대한 신앙의 위인들은 예수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에게 모든 것을 걸고 마지막 그날에 주님이 주실 면류관을 기대하면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2. 십자가 밑에서 예수를 해롭게 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헤롯 왕, 유대 종교 지도자들인 대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 그리고 로마의 빌라도 총독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데 일조를 한 사람들입니다.

그 가운데는 군중 심리에 의해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친 유대 군중들도 있었는데, 그들도 예수를 죽이는데 한 몫을 했습니다. 지금도 인터넷을 보면 안티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은 지 모릅니다. 어떤 신문은 유달리 기독교에 대해 비판적이어서 아예 기독교를 우리나라에서 추방하고 싶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들 때문에 주님의 교회가 문을 닫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죽였지만 이제는 온 인류가 그분을 메시야로 믿고 따르고 있습니다. 세계의 수십억의 사람들이 예수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 자리에 예수께 비판적인 사람이 있습니까? 이제는 돌이켜 회개하고 그분에게 무릎을 꿇고 그분을 경배하십시오. 그날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비웃었던 이들은 다 사라졌지만 예수는 인류의 구세주로 우뚝 서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예수만을 높이고 찬양하십시오. 어떤 모임에서 하나님이 존재하느냐의 문제를 놓고 열띤 토론이 벌어졌습니다. 토론이 절정에 달했을 때 한 중년 남자가 일어나 말했습니다.

“하나님이란 존재는 없습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을 본 사람이 있습니까? 없지요. 그럼 내가 5분 내에 하나님이 없다는 증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했습니다. 그 중년 남자는 품에서 날이 선 칼을 꺼내면서 다시 말했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 하나님은 5분 내에 여기 이 칼로 나를 죽이십시오. 그러나 5분 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없는 것이요.”
 
1분, 2분, 3분.....5분이 지났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 남자는 의기양양해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것 보시오. 하나님은 이미 죽었거나 아예 없습니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말하는 대로 하나님이 존재하고 지금도 살아 있다면 나같이 신성모독적인 사람을 그냥 두겠습니까?” 모두 잠잠했습니다. 바로 그때 그 모임에 참석했던 할머니 한 분이 그에게 다가와서 말했습니다. “여보시오, 당신에게도 자녀들이 있습니까?”하고 물었습니다. “물론 있지요.” 그러자 할머니는 “지금 당신 손에 잡고 있는 그 칼을 당신 아들이 들고서 아버지인 당신에게 ‘이 칼로 나를 죽이시오.’ 한다면 당신은 그 아들을 죽일 수 있겠어요?” 그러자 그 남자는 “할머니, 그걸 말이라고 하십니까? 내가 어떻게 내 손으로 아들을 죽인단 말입니까?” 그러자 할머니가 말했습니다.

“그것 보세요.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이십니다. 자녀들인 우리를 죽이시기는커녕 죄 지은 우리를 구하시려고 독생자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어떻게 당신을 칼로 죽인단 말입니까? 비록 하늘을 향하여 침을 뱉는 당신이지만 말입니다.”

시편 14편 1절은 말합니다. “어리석은 자는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는도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입니다. 옛날에 장삼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땀 흘려 일해서 은 삼백 냥이라는 큰돈을 벌었습니다. 이 돈을 상자 속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습니다. 그러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한 밤중에 일어나 이 은을 상자에서 꺼내 단지 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 누가 보는 사람이 없나 주위를 살피면서 뒷밭에 구덩이를 파고 단지를 꼭꼭 묻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았습니다. 더 좋은 방법이 없을까 궁리하던 장삼은 나무판에 이렇게 써서 단지를 묻은 밭에 꼽아 놓았습니다. [이 곳에 은 삼백 냥 없음] 그리고 나서야 안심하고 돌아가서 잠을 잤습니다.
 
그런데 그 밤중에 장삼의 행동을 몰래 훔쳐보고 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바로 옆집에 사는 아얼이라는 사람입니다. 그는 장삼이 잠든 것을 보고는 몰래 담을 넘어와 단지를 파내어 은 삼백 냥을 훔쳐갔습니다. 이 아얼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던 사람입니다. 이 아얼은 분명히 장삼이 다음 날 돈이 없어진 것을 알면 자기를 의심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꾀를 냈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나무판에 이렇게 써서 꽂아두었답니다. [옆 집 아얼이 절대로 훔치지 않았음]. 참으로 어쩌구니 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이 두 사람은 바로 저요, 여러분이요, 우리 모든 인간들입니다. 특별히 하나님 앞에서 우리 모든 인간의 모습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하나 그 지혜는 우물 안 개구리가 가진 지혜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지혜는 한 치 앞 밖에 모르는 지혜로서 사냥개에 쫓기는 꿩이 자신에게 닥친 위험을 피한답시고 머리만 풀 속에 처박는 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 만한 지식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롬1:18-20). 그러나 우리 인간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여 그 하나님을 잊어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들과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롬1:21-23).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하나 그 지혜로 인해 어리석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우리 삶의 주인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사람이 될 때만 우리의 지혜는 가장 현명한 지혜가 될 수 있습니다.

3. 십자가 밑에서도 예수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골고다 산상에서 예수께서는 많은 고통 가운데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밑에서 군인들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즐겁게 웃으면서 주사위를 던지고 있었습니다. 어떤 화가는 그 모습을 그림으로 그렸습니다. 그 그림은 근대적인 도시 안으로 못 자국을 가진 손을 펴고 계시는 주님을 그렸습니다. 그 밑에는 군중들이 떼지어 몰려 다녔습니다. 한 간호사를 제외하고는 누구하나 예수에게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그림 밑에는 이렇게 씌여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애1:12).

그 그림의 비극은 예수에 대한 세상의 적대가 아니라 예수에 대한 이 세상의 무관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에게 인류의 죄짐을 지우고 계시는데 그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인 양 무관심한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BC 598년 경 예루살렘 함락과 그것에 이어지는 포로 생활로 인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을 보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여 너희에게는 관계가 없는가 나의 고통과 같은 고통이 있는가”(애1:12)라고 묻고 있습니다.

국운이 쇠하여 사나운 이리떼와 같은 적군들에게 갈기갈기 찢기는 백성들의 모습을 보고 선지자의 입술을 빌어 절규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나라를 빼앗긴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에스겔 선지자는 “목자가 없으므로 그것들이 흩어지고 흩어져서 모든 들짐승의 밥이 되었도다“(겔34:5)고 말하고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양떼로,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들을 양떼를 먹이고 지키는 목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양떼를 먹이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에만 눈이 먼 악한 목자들의 직무유기로 나라를 잃고 갈 곳 몰라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눈물은 무기력한 목자들을 향한 분노로 나타납니다.

“내 양 떼가 모든 산과 높은 멧부리에마다 유리되었고 내 양 떼가 온 지면에 흩어졌으되 찾고 찾는 자가 없었도다“(겔34:6). 잃어버린 것이 귀할수록 찾으려는 열정도 더해지는 법입니다. 악한 목자들의 나태함으로 양의 우리가 들짐승의 발에 밟히고 가련한 양들이 사정없이 찢겨나갈 때, 주님은 스스로 목자가 되셔야만 했습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 같이 말씀하셨느니라 나 곧 내가 내 양을 찾고 찾되 목자가 양 가운데 있는 날에 양이 흩어졌으면 그 떼를 찾는 것 같이 내가 내 양을 찾아서 흐리고 캄캄한 날에 그 흩어진 모든 곳에서 그것들을 건져 낼지라”(겔34:11-12).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성육신하셨고,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한 마리 어린 양의 비유로 우리가 잃어버린 자를 찾는 구원의 역사에 동참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눅15:4). 우리는 주님의 권면을 무시하면 안 됩니다. 나하고 아무 관계도 없다는 식으로 그냥 지나치면 안 됩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생명을 살리는 구원의 역사에 동참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잃어버린 자를 찾아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의 충성된 일꾼된 신자는 마땅히 주님이 우리에게 맡기신 생명 구원의 사역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여 주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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