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이곤 칼럼] 아브라함의 ‘소명’이 갖는 의미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

▲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아브라함의 ‘소명’(召命)사건은 ‘신(神)의 부름을 받은 자들이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모범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모형이며, 후대의 모든 ‘소명 받을 자들’이 또한 반드시 본받아야 할 하나의 ‘모델’로서 제시된 소명사건입니다. 말하자면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여 부르시고, 그에게 ①고향 땅과 ②친척과 ③아버지의 집(=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모두 다 버리고 하나님께서 장차 보여 주실 그 불확정적 미래의 땅을 향하여 떠나가라고 명령하신 그것은 그리고 그의 신앙적 복종을 전제로 하고, 하나님께서 곧 이어 그에게 주신 말씀, 즉 “너는 [땅의 모든 족속에게] 복이 될 것이다!”(창 12:2c)라고 하신 그 말씀은, 분명, 하나님께서 이러한 ‘아브라함을 통하여(!!)’ 지상(地上)의 모든 사람에게로 ‘복’이(또는 ‘저주’가) 옮겨가도록 하시겠다(창 12:3)는 뜻을 가진 말씀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저의 지난 달 칼럼인 칼럼10(‘바벨탑 신드롬’)에서도 말씀 드린 것처럼, 인류역사의 바로 이 시점(時點)에서 하나님께서 일으키신 이 <아브라함 소명(召命)사건>은 ‘바벨탑의 거인주의적인 오만’을 가지고 끊임없이 신(神)에게 항거하는 저 구제불능의 인류를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구원에로 이끌어 내는 일을 하여야 할 ‘모범적 구원공동체의 한 조상(祖上)’, 즉 ‘아브라함’이라는 한 인간을 우리의 이 인간역사 속에 꼭! 등장시키셔야 하겠다는 그것이 바로 그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그런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의 다급한 ‘구원사적 결단’의 한 결과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민(選民) 공동체’의 선조(先祖)로서 선택하신 후, 그에게 주신 바, ‘자기의 모든 것을 버림으로서! 땅의 모든 민족을 살리는 자가 되어라!’(창 12::1-9)라는 이 ‘사명부여’는, 신.구약 성서 전체의 문맥에서 볼 때,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이 소명 사건은, 매우 분명한 언어로, 떠돌이 백성인 아브라함-이삭-야곱의 그 선민(選民) 공동체(구원공동체=교회 공동체)로 하여금 그 내어던져진 이 험난한(창 47:9) ‘고난의 세상역사’ 안에서, <‘고난’과 ‘구원’을 통한 하나님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그 ‘축복약속’이(“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다. ...” 창 12:2-3]) 이루어지게[實現] 되기를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라함을 이 역사 속에 불러내신 바, <하나님 선교(missio Dei)>의 그 진정한 의미요 본질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듯 신(神)의 축복 속에서 출발한 이 이스라엘이 '결코 파기되지 않는 신의 약속 성취'를 자신의 고난역사 속에서 여실(如實)하게 경험(經驗)하였음에도 불구하고(참조, 신 26:5b-9; 수 24:2b-13), 막상, 그들이 그 ‘약속의 땅’에 들어간 이후에는 그 받은 바, 축복의 은혜를 곧 망각하고 또 비록 예언자들의 끊임없는 경고가 거기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배신’의 길을 걸음으로서, 결국은, 아시리아 제국과 신흥 바벨론 제국의 포로가 되어 마침내는 ‘약속의 그 땅’을 깡그리 잃어버리고 유배생활(流配生活)로 방황할 즈음, 그들 이스라엘 공동체로 하여금 그 잃어버린 약속의 땅으로 다시!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돌아갈 수 있도록 섭리(攝理)하실 때(시 126:1-6), 즉 마른 풀과도 같고 시드는 들의 꽃과도 같은 저 길 잃은 양 같은 포로유민 이스라엘을 “팔로 모으시고 품에 안으시어”(사 40:11) 그들의 ‘꿈의 조국’으로! 광복(光復)시키실 그 때, 그 동터오는 새 역사의 첫 머리에서도 또한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 소명 때와 꼭 같이!!, 그 조국귀환의 새 이스라엘 공동체를 향하여서도 단지 이렇게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네가 내 종이 되어, 야곱 지파들을 다시 일으켜서, 이스라엘 중 살아남은 자들로 하여금 [조국으로] 돌아오게 하는 이런 일쯤이야 ‘네게는’ 오히려 ‘가벼운’ 일이다. 그러나 보라, 이제 내가 '나의 구원'이 땅 끝까지 이르도록 하기 위하여 ‘너’를 다시 일으켜 ‘열국[뭇 민족]의 빛’ (a light to the nations)으로 삼았노라!”(사 49:6)라고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소명'은 이젠 또 똑같은 언어로 '귀환 공동체의 새 소명'에로 반복(反復) 전이(轉移)되어 하나님의 인류구원 역사의 '아방가르드'(avantgarde/ avancurier)로, 즉 ‘열국의 빛’으로의 사명을 또 다시 저 ‘포로귀환 이스라엘 새 공동체’가 위임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저 목이 곧은 백성, 이스라엘은 비록 바벨론 포로의 그 비극이, 분명, ‘토라’를 불이행(不履行)한 죄의 결과라는 것만은 알았으나(dtr) 그러나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단지 ‘토라’에 대한 철저한 기계적/문자적 이행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잘못된 판단’을 함으로! 또 다시!! ‘부름 받은 자의 사명’을 바르게 인식하는데 실패하고, 불행스럽게도 ‘율법주의의 교조’에만 매몰되어 살게 되었던 것입니다. 아, 이것은 분명 천추의 한을 남길만한 비극이었는데! 저들은 불행스럽게도 ‘토라’에 대한 문자주의적인 그리고 기계주의적인 신봉에만 전적으로 전 운명을 걸고 매달렸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소위 말하는 <율법주의>라는 또 하나의 ‘악’을 낳고 말았던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약성서(TaNaK)의 히브리 신앙을 왜곡시킨 ‘유대교’(Judaism)의 바로 그 범죄(!)현실이었습니다. (나는 유대교의 이러한 판단을, 예수님과 함께, '유대교' 출발의 결정적 패착이라고 봅니다만,) 이것은, 실로, 우리네 인간 역사가 겪는 지겨운 악순환(惡循環)이기도 하였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율법주의의 이러한 ‘이기적 배타주의 교조’라는 또 다른 ‘거인주의적인 오만’(titanic hubris)이 우리의 종교역사 속에 뿌리를 내리게 된 것입니다. ‘유대교’(Judaism)는 바로 이러한 오만이 낳은 대표적 산물(産物)이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유대주의적인(=배타적 율법주의의) 이 악(惡)은 마침내 저 적(敵) 그리스도적 ‘로마의 멍에’라는 전대미문의 고통스러운 멍에를 이스라엘로 하여금 또 다시 메도록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구약성서[=예수님의 성서!]에 나타난 ‘복음적 진리’를 왜곡하여 해석하는 저 유대교의, 이른 바, 인간을 넘어지게 하는 ‘덫’과 같은 ‘근본주의적 교조주의 신앙’을 바로잡으려고 <올바른 성서해석으로(!)> 맞서서 결사항전하며 싸우셨던 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는 -‘노(怒)하기를 더디 하시는 긍휼의 신[엘-라훔]이셨기 때문에’(출 34:6)- 인류구원을 결단코 포기하실 수는 없으셨기에 마침내 사람의 아들[=人子] 예수를 하나님의 양자(養子)로 삼으시고(시 2편) 그를 세상에 보내셔서 ‘열 두 제자들을 모으게 하신 후’(즉 ‘에클레시아 ’를 만드신 후; 마 5:13-16→마 16:18) 그가 만드신 그 제자공동체(예수 공동체→교회공동체의 모체)에게도 또한 역시!! ‘아브라함의 소명’ 때와 꼭 같이 다음과 같은 말씀을 또 다시 ‘반복적으로’! 아들[神子] 예수로 하여금 그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도록 하셨던 것입니다. 즉 “너희는 ‘세상의 빛’(the light of the world)이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라.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는 법은 없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렇게 하여서야 비로소 그 빛을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칠 수 있느니라. 이같이 ‘세상의 빛’인 너희 빛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비치게 하여 그들도 또한 너희 착한 빛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마 5:14-16)라고 예수님은 그의 제자들(의 공동체)에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즉 예수님의 제자 공동체 역시 ‘열국의 빛’으로서만!! 부름[召命]을 받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히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이스라엘→새 이스라엘로서의 예수 공동체→오늘의 교회 공동체>에로 이어지는 이 ‘소명 받은 자’의 정체성(identity)이란 논의의 여지없이 오직 ‘세상의 빛’로서의 기능’만인 것이 분명합니다. 오직 세상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는 빛!

실로, 아브라함 소명(召命) 기사(記事; 창 12:1-9)에서 이미 분명하게 정의(定義)된 대로, ‘열국의 빛’이 되어야 한다는 그 ‘소명 받은 자’의 기능이란, 우선, ①자기의 모든 기득권(=고향[땅], 친척 그리고 아버지의 집으로 대변되는 모든 기득권)을 버리고(=철저히 극복하고), 그 대신, 사람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만을 따르는 그것이고(창 12:1, 즉 ‘사람의 일보다 하나님을 생각하고’ 마 16:23; 막 8:33), 그 다음은 ②지상의 모든 열국에게 구원의 길을 비취는 ‘열국의 빛’이 되는 그것이며(창 12:2-3), 그리고 끝으로는 ③자기가 아니라! 남[後孫]을 위하여 영원한 순례자(巡禮者)가 되는 것(창 12:4a,7a,9), 바로 그것이라 하겠습니다, 창 12:1-9에 나타난 바, 이 ‘소명(召命)’에 대한 정의(定義)는, 그러므로,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하여 ‘이스라엘,’ ‘새 이스라엘,’ 그리고 ‘예수 공동체,’와 오늘의 ‘교회 공동체’에게로 정확히 계승되고 있는 그 ‘당위적’(當爲的)인 의무와 사명을 가리킨다 하겠습니다. 실로, ‘교회의 진정한 기능’은 바로 이것, 즉 자기를 불태워 세상을 불 밝히는(세상을 살리는) ‘열국(세상)의 빛’이 되는 기능, 바로 그것이라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시점에서, 아브라함 소명에 관한 본문(창 12:1-9)을 다음과 같이 다시 정리해서 읽을 수 있습니다. (1)하나님께서는 그가 선택하신 자를 부르셔서, 우선,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서는 자신의 모든 것(모든 인간적인 것)을 먼저 버려야 한다고 명령하십니다. 물론 이 명령은 ‘자기 버림’(=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를 요약한 실제적이고도 상징적인 언어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출향할 때(우르와 하란을 떠날 때, cf. 창 11:27-32) 일찍 아버지를 여읜 조카 ‘롯’만은 대동하였다는 것(창 12:4이하)은 바로 이러한 사정을 반영한다고 하겠습니다. 즉 이 명령은 ‘소명 받은 자’란 ①지연(地緣) ②혈연(血緣) 그리고 ③가문(家門) 등등의 ‘모든 인간인연(因緣)의 고리’를 끊는 결단을 요구한 말씀으로 보아야 합니다(마 12:48-50; 막 3:33-35; 눅 8:21). 즉 진정한 ‘엘리트’의 정체성(elitism)을 가지기를 요구한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지연, 혈연, 학연, 등등 인정(人情)의 인연(因緣)의 굴레에서부터 자유하지 않으면 ‘소명 받은 자’(엘리트)의 ‘정체성’을 올바로 가지지 못한다는 말씀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무엇보다, ‘소명 받은 자의 공동체’(교회 공동체)는 결코 세상 위에 군림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교회’를 그의 제자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세우겠다고 하시면서도(마 16:16-19)! 그러나! 이 교회의 특권만은 ‘비밀’(=메시아의 비밀)로 해주기를 부탁하시고, 비로소,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을 전제한 후의 부활이라는 비밀[救援의 秘密]을 ‘계시’하시기 시작하시면서, 정작 교회의 참 본질적인 기능을 실천하려는 자신의 뜻은 오히려! 만류하는(마 16:21) 저 교회의 기초 돌인 ‘베드로’를 가리켜서는 “사탄아(satana),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skandalon)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구나!”(마 16:23-24; 지상 최대의 아이러니!) 라고 질책하셨던 것은 오늘 교회에 대한 성서의 놀라운 비판적 아이러니가 아니고 달리 무엇이겠습니까? 종교개혁 이후의 오늘의 개신교회가 저 ‘사탄’이라고 비난 받는 ‘베드로의 오만’을 중세 가톨릭 이상으로! 한 술 더 떠서 더 열심히 답습하고 있는 것을 보는 것은 그런 아이러니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개신교회는 우선!! 회개부터 먼저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하여서는 ‘땅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기득권)을 우선 먼저 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울상을 짓고 근심하며 떠나갔던”(막 10:22; 마 19:22; 눅 18:23) 부자 청년처럼 되어서야 안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고서야 어찌 자기 자신을 ‘구원 공동체인 세상의 빛’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다음으로 (2)아브라함 소명 기사(창 12:2-3)는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할 ‘소명 받은 자’를 향해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게 되는 바로 그 ‘열국의 빛’/‘세상의 빛’이 되라! 고 요구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를 내어주어 이웃을 살리는 ‘엘리트’ 공동체가 되라!는 것입니다. 등불(촛불)과 소금처럼 자기를 내어주어(燒滅/鎔解하여) 이웃을 살리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단지! 세상의 소금이고 빛일 뿐(直喩)이라는 것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회개할 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아브라함 소명기사는 (3) ‘소명 받은 자’란 영원한 순례자(pilgrim)여야 하는 것이라고 결론짓습니다(창 12:7-9). 수용하기가 가장 힘이 드는 대목입니다. 아브라함은 드디어 조카 롯과 그리고 하란에서 얻은 모든 소유를 이끌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갔습니다만”(창 12:5, 봐이야보우!), 그러나 그 땅이 결코 자기의 땅이 아니고! ‘자기의 후손의 땅’(짜르아카)임을 통고 받고 아브라함은 그 지시에 따라 단지! ‘지속적인 순례자’(=계속적인 나그네, 닛사아 할로크, 창 12:9)의 길을 계속하였다는 보도로(“점점 남방으로 옮겨갔더라.”) 그의 소명기사는 종료됩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이 이스라엘 공동체, 새 이스라엘 공동체, 그리고 오늘의 지상교회공동체가 반드시 취하여야 할 바로 그 원 모습(Urbild)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순례자’가 되어야! 타락하지 않습니다! 에클레시아의 교회(모이는 교회)와 디아스포라의 교회(세상으로 흩어지는 교회)가 평형을 유지하여야 합니다. 많이 가진 자가 되려고만 하고, 높아지려고만 하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훈계하려고만 들고, 또 온 세계가 다 기독교 국가(theocracy)가 되도록 힘으로 강요하기만 하려 한다면(crusade하면) 기독교는 하나님에 의하여! 그리고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에 의하여 망할 것입니다(시2편). 교회는 단지 메시아의 비밀(마 16:20-21 !!)을 간직한 채, 주님과 함께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를 걸어야! 참 교회의 사명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아, 그러나 우리는 약합니다. 그러나 비록 도착지에 도달하지는 못하였다 하여도 우리는 단지 이 길만을 걸어야 합니다. 이 길을 걷는 동안만은 우리는 ‘참 교회’일 것이기에!!

한 마디만 더 부언한다면, 공관복음서(마태, 마가, 누가 복음서)와 제 사(第 四) 복음서를 예의주시(銳意注視)해 볼 때, 우리는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예수님의 의지(意志)표현은 오직 마태복음 16:18에서만 나타나고 또 ‘교회’라는 단어 자체(에클레시아)도 사(四) 복음서에서는 마태복음에서만 세 번(마 16:18에서 한 번, 마 18:17에서 두 번) 나타날 뿐임을 보게 됩니다(Robert Young의 Analytical Concordance to the Bible을 통해 조사).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교회(에클레시아)를 세우시겠다는 의지 표명이 과연 마태복음 기자에게만 있었는지? 아니면 오늘날의 지상교회와 같은 그런 교회는 세우실 생각을 안 하셨는지? 하는 생각을 갖게 하기도 한다 하겠습니다. 따라서 그가 만일 ‘그의 제자 공동체’로서의 ‘한 이상적 교회’를 생각하셨다면, 분명, 마태 16:19-28과 마가 8:30-9:1, 그리고 누가 9:21-23에 언급된 그런 대속적인 구원 사명을 실천하는! 신앙공동체만을 ‘참’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참조: (창 12:1-9; 사 49:5-7; 마 5:13-16[막 10:28; 마19:27; 눅 1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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