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본문
요한복음 20:1-10절
설교문
미국의 존경 받는 대통령 중 한 사람이 루즈벨트 대통령이라고 합니다. 그는 1921년 어느 날 가족과 함께 별관에서 쉬는 중에 이전에는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통증이 다리에서 느껴졌고, 그 후에 서서히 마비되어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가 옷도 손으로 입지 못하고, 두 다리를 쓸 수 없는 장애인이 되자 그의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의 정치 생명이 끝났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인 엘레나는 달랐습니다. 그녀는 계속해서 남편을 격려하며 곁을 지켰습니다.
어느 날 루즈벨트가 엘레나에게 “내가 장애인이 되었는데, 지금도 날 사랑하오?”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미소를 지으면서 “전 당신의 다리만을 사랑한 것이 아니예요. 나는 당신 전부를 아직도 사랑하고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루스벨트는 이 말에 용기를 얻어 자신의 장애를 비관하지 않고 11년 뒤에 미국의 32대 대통령이 되었고, 그 뒤 처음으로 4번이나 연속으로 대통령에 오르는 영광을 안게 되었습니다. 루즈벨트가 그렇게 훌륭한 대통령으로 우뚝 서게 된 것은 그의 아내 엘레나의 아낌없는 위로와 격려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그녀의 내조가 없었다면 루즈벨트 같은 위대한 인물은 결코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믿음의 아들’이라고 했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이 이 세상에 남겨둔 가장 귀한 걸작품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이런 만남이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루즈벨트처럼 엘레나 같은 아내를 만나고, 디모데처럼 바울 같은 훌륭한 멘토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니, 우리가 그런 만남을 기대하기보다는 차라리 내가 그런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스스로 영적인 멘토가 되어 엘레나 같은 위대한 인물을 만드는 사람, 바울처럼 디모데 같은 위대한 인물을 키우는 사람이 되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가 십자가에 죽으셔서 무덤에 장시지낸지 사흘 되던 날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을 찾았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를 사랑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녀는 본래 일곱 귀신이 들렸던 여자였습니다. 그녀는 아마 아름다운 창녀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만난 다음 그녀는 바뀌었습니다. 회개했고,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그 뒤 예수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바칠 수 있었던 것은 사랑 뿐이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시체를 무덤에 안치하고 사흘 후에 그 무덤을 방문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의 무덤을 방문했습니다. 그 시간은 이른 새벽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직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무덤에 온 막달라 마리아는 놀랐습니다. 본래 로마 당국이 예수의 무덤의 문에 봉인했습니다. 그런데 그 돌문이 옮겨진 것입니다.
그녀의 마음 속에 놀라운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유대인들이 예수의 시체를 어디로 가져간 것이 아닌가, 유대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서 죽이는 것만으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아 예수의 시체를 훔쳐 거기에 모욕을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또 그 당시에는 무덤을 파서 무엇이라도 수입을 잡는 도둑들도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혹시 무덤에 도둑이 들어와 무엇을 훔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녀는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가 베드로와 요한을 찾아가서 예수의 무덤의 상황을 전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자신이 지은 많은 죄를 용서하시고 한없는 사랑으로 감싸주시던 주님의 시신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녀는 예수가 어떻게 되어도 사랑했습니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이 잘 돼야 하고 성공해야 하고 건강해야 더욱 사랑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가 사형수가 돼 비참하게 온 세상에서 버림을 당해도 자신의 사랑을 끝까지 유지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의 시체까지도 사랑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은 예수를 다 경원시한다고 하더라도, 예수와 연루되어 당국으로부터 무슨 큰 처벌을 받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예수를 쳐다보지도 않았지만, 마리아는 달랐습니다.
마리아는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이 모든 것을 본인 스스로가 책임을 지고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제자들마저 두려워서 제자로서의 책임을 잊어버리고 뿔뿔이 흩어졌지만, 마리아는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 자신에게 어떠한 불이익이 오더라도 이 모든 것을 자신의 책임으로 알고 목숨까지 내놓는 심정으로 감당하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신자는 문제가 생기면 그 문제의 책임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말고 자신의 탓으로 돌려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한국교회는 구한말 우리나라를 개화시켰고, 3.1 운동 당시 기독교인들이 전 국민의 2% 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3.1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우리나라가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또한 수많은 기독교 인재를 배출하여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의료 발전에 그 어떤 종교보다도 책임있는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근자에 들어 한국교회의 일부 지도자들의 잘못된 일탈현상으로 사회의 비판을 받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독교 2천년 역사를 뒤돌아 보면 하나님은 교회가 잘못되면 그때마다 예언자적인 사람을 보내서 교회를 변화시켜 세상을 이끌어 가도록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한국교회를 버리시지 않을 것입니다. 예언자적인 인물을 보내 한국교회를 갱신시키실 것입니다. 그 예언자적인 인물이 내가 아닐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교회를 갱신시킬 역사적인 인물은 따로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주의 제자로서의 책임을 망각한 것입니다.
이사야처럼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나를 써 주소서” 하며 한국교회를 갱신시킬 책임을 각자가 떠맡는다면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을 것이고, 그 사람이 바로 역사적인 인물이 될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고 그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도 떠넘기면 주님의 종으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기에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소리를 들을 것입니다. 런던 타임즈에서 여러 필자들에게 동시에 ‘무엇이 이 세상의 문제인가?’라는 주제로 원고를 청탁했을 때, G. K. 체스터튼은 가장 간단하면서도 문제의 핵심을 정확하게 짚어낸 글을 보냈습니다. “편집장 귀하, ‘바로 내가 문제입니다. -G. K. 체스터튼.”
어두운 세상을 주님의 말씀으로 바꿀 역사적인 인물은 바로 우리들 자신입니다. 이 세상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알고 그 문제에 책임지는 사람이 바로 세상을 바꿀 위대한 신앙의 인물입니다. 우리 속담에 “잘 되면 내 탓, 안 되면 조상 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바벨론 포로가 된 이스라엘 백성도 이런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스라엘 땅에 관한 속담에 이르기를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었으므로 그의 아들의 이가 시다고 함은 어찌 됨이냐(겔18:2절).”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서 “아버지가 신 포도를 먹으면 아들의 이가 시다”는 속담이 유행한 것은, 조상들의 범죄 때문에 그들이 이방에서 고통을 당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의 죄 값이 자녀에게 미친다”는 사상은 출애굽기에 근거합니다.곧,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20:5)”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자손들이 아버지의 죄악과 같은 죄를 범하면서 회개하지 않을 경우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에스겔도 여러 예를 들면서 이것을 분명히 합니다. 의를 행하는 사람은 마땅히 살 것이나(겔18:5-9절) 그 의인의 자녀가 악을 행한다면 그는 죽을 것입니다(겔18:10-13절). 악인의 자녀라도 돌이켜 의로운 삶을 살면 아비의 죄와는 상관이 없습니다(겔18:14-18절). 악인이 돌아서면 살 것이며, 의인이라도 악을 행하면 죽을 것입니다(겔18:21-24절).
에스겔은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를 전달합니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다시는 이 속담을 쓰지 못하게 되리라(겔18:3절)”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모든 영혼이 다 내게 속한지라 아버지의 영혼이 내게 속함같이 그 아들의 영혼도 내게 속하였나니 범죄하는 그 영혼은 죽으리라(겔18:4절).”
에스겔은 죄의 책임을 조상에게 돌리는 것을 부정하면서, 아버지의 영혼이나 아들의 영혼이 모두 하나님께 속해있음을 언급합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개인적으로 독자적으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들이나 아버지나, 자신의 문제는 자신 스스로가 책임져야 합니다. 조상 탓을 할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포로기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이 당하는 오늘의 고통을 조상의 탓으로 돌릴 것이 아니라, 각자 스스로의 모습을 살펴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의롭게 서야 했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나님 앞에 단독으로 서서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의를 행하고 있습니까? 한국 교회의 이 암울한 상황을 우리 조상 탓이라고 핑계대고는 있지는 않습니까? 한국 교회가 사회적으로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 누구 탓입니까? 우리 조상 탓입니까? 아니면 다른 교회 탓, 다른 성도 탓입니까? 주님께서는 분명히 말하고 계십니다, 바로 우리들 탓이라고, 바로 내 탓이라고...!
막달라 마리아의 주님에 대한 사랑과 그 사랑에서 나온 책임감도 대단하지만, 막달라 마리아보다 더 대단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요한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믿음의 눈으로 예수의 부활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베드로와 요한에게로 갔습니다. 그들은 즉시 예수의 묘로 뛰어갔습니다. 먼저 도착한 요한이 그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고 밖에서 보았습니다. 좀 늦게 도착한 베드로는 그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 순간 베드로는 텅빈 무덤에 들어가서 대경실색했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마음 속에는 어떤 생각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만일 그 누가 예수의 시체를 옮겼다면, 예를 들어 만일 좀도둑이 들었으면 왜 예수의 수의는 가져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옷이 너무 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아마 도둑이 들었다면 수의마저도 훔쳐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수의를 가져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수의와 수건이 조금도 흩어지지 않고 반듯하게 접혀 있었습니다. 요한은 수의와 수건이 이렇게 반듯하게 접혀져 있으니 분명 예수께서 부활하셔서 그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신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도 요한은 부활의 현장을 보고는 예수의 부활을 믿게 된 것입니다. 요한이 부활을 믿게 된 것은 성경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눈으로 보고 서였습니다. 여기서 요한이 예수를 사랑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의 부활의 현장을 보고서 분명히 예수는 부활하셨다고 믿었습니다.
아직 베드로와 막달라 마리아도 믿지 못하고 있는 때였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믿었습니다. 이것으로 보아 그의 예수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성경을 읽을 때나 설교를 들을 때 그렇지 않은 사람과는 매우 다릅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모든 사건을 대하는 것이 서로 다릅니다.
생후 6개월 만에 의사의 오진으로 맹인이 되어 일생을 살았지만 찬송가 역사상 가장 빛나는 작사자가 된 사람이 바로 크로스비입니다. 그녀는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어머니는 남의 집 가정부 생활을 해야 했기 때문에 외할머니 밑에서 불행하게 자라났습니다.
외할머니는 경건한 신앙인이었기 때문에 그녀를 말씀과 기도로 키웠습니다. 그녀는 할머니의 성경 읽어주는 소리를 듣고 신약은 한자도 틀리지 않게 암송할 정도였습니다. 자녀에게 말씀과 기도가 최고의 유산이라는 것이 증명된 셈입니다. 그녀는 전혀 보이지 않는 맹인이었음에도 영의 눈으로 그 누구보다도 더 밝게 생활했습니다.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등 우리가 보는 찬송가에만도 그녀의 찬송이 21곡이나 됩니다. 예수를 사랑하는 그녀는 신체적으로는 불행한 사람이었으나 영적으로는 불행하지 않고 너무 행복했습니다. 아무리 자기의 현실이 어렵더라도 그 환경을 탓하지 않고 오직 주님만 바라보았습니다.
어떤 화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을 그렸습니다. 다 그리고 난 다음에 세계적인 화가인 도래에게 그 그림의 평가를 부탁했습니다. 도래는 쉽사리 평가하지 않았지만 결국 단 한마디를 했습니다. “자네는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지 않는군. 그렇지 않았다면 좀 더 잘 그릴 수 있었을 텐데.”
만일 우리들도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면 성경을 보고 설교를 들어도 우리에게는 그 어떤 변화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교회를 몇 년 다니고는 목사에게 “나는 이제 교회에 나오지 않기로 했습니다. 믿음이 생기지 않아서 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를 사랑하지 않으면서 아무리 많이 들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께 나를 다 맡기십시오. 내 마음도, 내 생각도 다 맡기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여 예수의 무덤을 제일 먼저 찾은 막달라 마리아처럼, 예수를 사랑하여 부활하신 주님을 최초로 믿은 사도 요한처럼, 주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소유하고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