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시골택시에 대한 기억이 떠오른다. 비포장도로를 무서우리만치 달리는 그 속도 그리고 기사님이 브레이크라도 밟으면 무릎에 앉힌 내가 택시미터기를 들이받을까봐 한 손엔 미터기, 다른 손엔 내 머리를 감싸시던 아버님이 생각났다. 그렇게 달리면서도 기사님은 나에게 이것저것 물으셨다. 질문에 대답하던 나는 용기를 내어 우윳빛 물의 정체에 대하여 물었다. 답은 매우 명료했다. 태고 적부터 쌓이고 쌓인 산호와 어패류의 퇴적층들, 유황, 타닌과 같은 미네랄이 섞여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이곳 물이 맛이 좋고 건강에도 좋다고 하신다. 그럼 그렇지….
▲이충범 협성대 신학과 교수 ⓒ베리타스 DB |
마음씨 좋은 기사 아저씨는 나를 강진에서 가장 깨끗하고 조용한 작은 여관 앞에 내려주셨다. 물론 전라도 인심 많이 느끼고 가라는 인사도 잊지 않으셨다. 나는 방을 잡기 전에 우선 약국을 찾아 주위부터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문을 연 약국이 하나 있어 커다란 바셀린 한 통과 일회용 반창고를 샀다. 기사 아저씨 말대로 여관은 오래되었지만 정말 깔끔하고 깨끗했고 입구에서 손님을 맞는 할머니도 친절하셨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몸에 접히는 부분마다 바셀린을 흠뻑 바르고 까진 데 마다 일회용 반창고를 붙이니 살 것 같았다. 그냥 누워서 잠을 청하고 싶은 유혹을 가까스로 이기고 늦은 저녁을 먹기 위하여 방을 나섰다.
이미 시간은 오후 9시를 훨씬 넘어 버렸다. 읍내를 여기저기 다 둘러봐도 적당한 식당이 눈에 띄지 않았다. 다행히 고깃집을 발견하고 내장탕을 주문했더니 비만한 아주머니가 눈총을 준다. 둘러보니 다들 고기를 구우면서 술들을 들이킨다. 생전 처음 고약한 인심에 별 감동 없는 저녁을 뚝딱 들이키고 다시 읍내를 산책하다 강진터미널 후면에서 촛불을 든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젊은 부부들, 어머니들, 엄마를 따라 나와 돗자리에서 자는 아기들까지 밤 10시가 다 된 시각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를 외치고 있었다. 대통령의 굴욕적인 소고기 협상결과로 인해 이 작은 지역의 민초들까지 거리로 밀려 나온 것이다. 안타까워 합류하고 싶었지만 너무 피곤했다. 그리고 이미 서울에서 몇 차례 촛불집회에 참석하고 내려왔기에 죄책감도 덜해서 그냥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자버렸다.
의식이 돌아왔지만 여기가 어디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떠지지 않는 눈을 비벼 뜨고 주변을 돌아보니 내가 있는 곳이 어디인지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정말 이렇게 단잠을 잤던 게 얼마만이던가?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이에게 단잠을 주신다더니 그 말씀이 무슨 소리인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곧 나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난다. 온몸 여기저기 쑤시고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일어나 맨손체조를 한번 하고 나니 훨씬 몸이 가벼웠고 아픈 부분들의 통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런데 옷을 챙겨 입으려는 순간 또 다시 좌절감을 느껴야만 했다. 그렇다. 어제 세탁하는 것을 잊고 그냥 잠에 빠져버린 것이다. 결국 어제 입은 냄새나는 옷은 비닐에 넣고 첫날 입고 내려왔던 옷을 다시 걸치고 방을 나왔다.
마음이 급해 대충 우유와 과자 부스러기로 아침을 때운 후 바로 영랑생가로 향했다. 시간이 부족해 다산초당을 지나친 것이 아쉬웠기에 영랑생가만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1948년도에 매각한 영랑생가는 깔끔하게 복원되어 있었다. 문학에 대하여 문외한인 내가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한 무리의 사람들을 만났다. 영랑생가 곳곳을 신명나게 설명하고 있는 초로의 교수님의 현장강의는 나로 하여금 영랑이 살았던 시대로 돌아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였다. 금방이라도 부르기만 하면 영랑과 그의 동료들인 박용철, 정지용, 그리고 사랑했던 최승희가 “응”하고 대답하며 방문을 열고 나올 것만 같았다. 교수님과 문학여행을 온 학생들 틈에 슬며시 끼어서 신나게 공짜수강(?)을 즐기며 과거의 환상 속에서 헤매던 중 나는 그만 교수님에게 들키고 말았다. 물론 인연이 닿으면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면서 교수님과 명함을 교환하고 먼저 자리를 떴다.
영랑생가 위쪽의 금서당은 영랑이 한문을 공부하던 곳으로서 후에 강진중앙초등학교가 된 강진 최초의 교육기관이다. 1919년 3.1운동 당시 전교생 200명 모두가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민족정신이 살아 숨쉬는 곳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서당은 반쪽짜리 건물이었다. 건물이 반파되어 반은 옛 건물 그대로이고 반은 현대식으로 지어 이어 붙였다. 예전의 담장은 가난한 사람들의 땔감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강진에서 태어나 강진을 떠나지 않고 강진풍경과 강진사람만을 화폭에 담으셨던 완향 김영렬 화백이 1950년대 이후 지금까지 소유하고 있는데 지금은 그 분의 미망인만이 집을 지키고 계셨다.
외로우셨던지 자꾸 들어와 차 한 잔하고 가라시는 사모님을 따라 대청으로 들어가 손수 내주신 차를 마셨다. 집안은 온통 완향 선생의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고 사모님은 쉬지 않으시고 완향 선생님 이야기를 해주셨다. 먼저 가신님에 대한 그리움이 가득한 사모님의 말씀을 멈추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갈 길이 먼 나그네는 사모님께 정중하게 인사를 드리고 다시 길을 나섰다. 길을 내려오면서 내심 씁쓸한 것은 반쪽짜리 건물이었다. 전통을 몸에 담으셨던 선비들의 근거지, 근대식 교육의 발상지, 만세운동의 발화지가 반쪽만 온전한 것이 왠지 지금 우리나라의 현실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한여름의 일요일 오전 강진은 한가롭기만 하다. 깨끗한 옷을 차려입은 사람들이 커다란 교회로 향한다. 주일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마지막으로 주일에 교회에 가지 않았던 적이 언제였을까? 적어도 20년은 넘지 않았나 싶다. 오늘이 20여 년 만에 주일을 범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냥 슬쩍 들어가서 예배를 드리고 길을 떠날까 생각도 해보았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내 몸에서 나는 냄새가 가장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혹시 새신자가 왔다고 일어서라든지 앞으로 나오라고 하면 헐렁 반바지에 반팔 티셔츠의 거렁뱅이에겐 그야말로 낭패 중에 낭패요, 망신 중에 망신이었다. 주일예배를 거르긴 하지만 너무 오랜만이라 그 기분은 참으로 묘했다.
여하튼 제대로 아침식사를 못한 탓에 주변을 둘러보며 이른 점심을 먹으려고 했지만 이상하게도 강진엔 육고깃집만 가득했다. 여기부터 성전까지 약 20리길. 점심은 부리나케 걸어서 성전에 가서 먹자고 결심하고 택시기사 한 분을 붙잡고 성전 가는 길을 여쭈었다. 길을 알려주던 기사는 내게 어디까지 가냐고 묻는다. 그래서 오늘 목표는 영암이라고 하자 그 분은 혀를 끌끌 차시면서, “아따, 멀리 가시네요잉” 하시며 “걸어서 갈 수 있을랑가?”하고 되묻는다.
어제 고생길을 금방 다 망각하고만 새머리인 나는 오늘도 자신에 차 있었고 그 정도 거리야 어제 걸은 거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속으로 코웃음치고 있었다. 꼬불꼬불 마을길을 돌고 돌아 드디어 성전으로 올라가는 2번 국도를 만났다.
“아니, 이게 뭐야?”
국도를 본 나는 어이가 없었다. 바로 앞엔 매달린 “성전 9킬로”라고 쓴 팻말이 무시무시하게 다가왔다. 맙소사, 이건 내가 생각하던 그 국도가 아니었다. 그냥 고속도로였다. 서해안 고속도로하고 똑같이 생긴, 도무지 걷기가 겁나는 그냥 자동차 전용도로였다. 그때서야 택시기사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걸어서 갈 수 있을랑가?”(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