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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범의 길에서][7][혼자놀기의 고수와 만나다]

이충범·협성대 신학과 교수

나는 이런 도보여행을 원하지 않았다. 그리고 상상하지 못했다. 해남에서 강진으로 오는 길은 위험한 도로였지만 그래도 길과 농토가 맞닿은 꼬불꼬불 국도였다. 그런데 새로 확장 개통된 2번 국도는 차만 쌩쌩 달리는 불쑥 솟은 자동차 전용도로였다. 조선시대 어르신들이 살아 돌아오셔서 삼남대로가 이렇게 변한 것을 보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하고 상상해본다. 한참을 망연자실 도로를 쳐다보다가 지도책을 펼쳐들고 다시 지도를 확인해보았다. 지도를 거꾸로 들고 봐도 갈 수 있는 길은 이 길 뿐이었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가 결국 나는 휘어진 고속도로 나들목 길을 통해 2번 국도로 들어섰다.

▲이충범 협성대 신학과 교수 ⓒ베리타스 DB
차들은 사정없이 달려댔다. 쌩쌩 차들이 지나칠 때마다 매연과 먼지가 내 코로 들어와 폐를 사정없이 오염시키는 것만 같았다. 무엇보다 오늘부터 발이 아파왔다. 아직까지 다리 근육엔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러나 아스팔트길을 내딛는 발이 한발 한발 내딛을 때마다 발의 뼈들이 쩌렁쩌렁 울려댔다. 미국서부터 신었던 정들은 테니스화가 갑자기 버리고 싶어 졌다. 다른 사람들이 등산이나 여행을 다닐 때 신발부터 옷까지 명품의류를 휘황찬란하게 빼입고 다니는 것을 보면서 내심 속으로 비난했던 것을 회개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런 여행을 할 때는 바닥이 두툼한 기능성 트랙킹화 정도는 하나 더 갖고 왔었어야만 했다. 여하튼 이제 와서 후회해봐야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아픈 발을 이끌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땅만 보고 걸었다. 딱히 뭘 볼 것도 별로 없었다. 옆면에 소음차단벽이 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걸으니 소음차단벽이 사라져 그래도 산하를 볼 수 있었다. 한참을 걷다보니 국도 옆길을 따라 소농로가 나 있었다. 두 길이 평행하는 한 그 농로를 따라 걷는 것이 편할 것 같아 국도탈출을 시도했다. 일단 국도 가장자리에 파놓은 하수로를 뛰어 넘었다. 그리고 불쑥 솟은 국도의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서 억센 잡풀들 사이를 헤치고 내려가야만 했다. 뱀의 출현이 걱정되어 조심조심 가슴팍까지 오는 잡초들을 헤집고 내려오는데 그만 팔뚝과 다리 여기저기 풀들에 베이고 말았다. 게다가 더 이상 헤쳐 나갈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그 자리에서 점프를 하여 농로로 뛰어 들었다.

가뜩이나 발의 뼈들이 아픈데 점프하여 착지하는 순간 그야말로 내 입에선 단말마의 신음소리가 났다. 한참을 발을 붙잡고 누워서 아이고, 아이고를 하다 보니 주변이 걱정된다. 다행히 나를 보는 사람은 이 허허벌판에 아무도 없었다. 간신히 통증을 수습하고 일어나 걸으니 이건 천국이었다. 마치 스펀지나 구름 위를 걷는 것 같았다. 내 생애 처음 딱딱한 콘크리트나 아스팔트 위를 걷는 것이 이렇게 우리 몸에 부담스러운 것인지 생생하게 체험하는 순간이었다. 도톰한 흙으로 된 농로 위로 걷는 내 발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너무도 편하고 따듯했다. 게다가 아무도 없는 길을 걷는 중에 친구를 조우했으니 그 길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안녕하세요?”

바닥에 흙을 보면서 걷던 내게 갑자기 누가 인사를 한다. 깜짝 놀라서 얼굴을 쳐들자 작은 사내아이가 나를 보며 인사를 한다. 그리고 그 옆에는 누렁 강아지가 아이에게 연신 장난을 걸어대며 쫓고 있다. “응, 안녕” 하고 대답을 하고 길을 계속 가는데 그 아이는 그 자리에 서서 내가 지나가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서너 발짝 지나가다 왠지 미안하기도 하고 이 핑계대고 좀 쉬자는 생각에 다시 몸을 돌려 꼬마에게 물었다. “너, 이 근처 사니?” 나의 질문에 아이는 자기 집을 손으로 가리킨다. 산 중턱에 홀로 떨어져 있는 작은 농가였다. 그때서야 비상식량으로 넣어 둔 배낭에 있던 다 녹은 초콜릿이 생각났다.

내 호의를 받은 아이는 껍질까지 쪽쪽 빨아서 잘도 먹는다. 내년에 학교에 간다는 녀석은 이 근처에서 함께 놀 친구가 전혀 없는 외톨이였다. 그의 유일한 친구는 누렁 강아지, 오늘도 강아지와 함께 놀다 처음 보는 외지인을 발견하고 내게로 달려 온 것이었다. 머리를 감지 않아 뻣뻣해진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다시 걷기를 시작하면서 녀석을 생각해보았다. 하루 종일 혼자 놀아야만 하는 아이, 그래서 사람이 반가운 아이, 하지만 혼자 너무 잘 놀고 있는 아이. 하루 종일 혼자 걷는 나 역시 혼자 놀고 있는 어른, 그런데 사람이 반갑기는커녕 사람들을 피해서 여행하는 어른, 그러면서도 혼자 잘 놀기는커녕 걸음을 옮기고 새로운 지역에 들어갈 때마다 외로움을 느끼는 어른. 결국 나와 아이는 “혼자”이지만 정반대의 혼자인 것이다. 아이는 혼자일 수밖에 없어 사람을 그리워하지만 혼자도 잘 노는 아이이고 나는 사람이 싫어서 일부러 혼자되었지만 혼자 잘 놀지 못하는 어른이었던 것이다. 그는 즐겁지만 나는 즐겁지만은 않은 혼자 놀기였다.

그래서 나도 즐겁기로 했다. 힘들 때마다 자꾸 회의가 드는 이 여행, 무조건 잘 왔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일생 동안 만날 수 없는 사람들, 평생 발 디딜 수 없던 땅, 단 한 번도 볼 수 없는 작은 식물들을 만나러 지금 나는 걷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없는 길에서 이런 생각이 미치자 갑자기 춤곡에 맞추어 춤이라도 추면서 걷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이 농로와 옛길이 연결되어 있어 호젓한 들길을 푹신한 흙을 밟으면서 편하게 걷고 있다. 이렇게 걷다 보니 어느덧 성전면 입구에 다다랐다. 성전면 앞에서 나를 맞이해준 것은 거대한 마을의 나무였다. 그 규모에 너무 감탄하여 지나가던 할아버지께 무슨 나무냐고 여쭙자 평나무라고 알려주신다. 한참을 고개가 아픈지도 모르고 나무를 바라보았다.

성전면 중심에 들어서자마자 식당부터 찾았다. 일요일이라 거의 문을 닫은 상태였는데 밥집 하나가 눈에 띤다. 허기진 김에 생각할 것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전라남도 여행을 하면서 또 하나 이상한 것은 식당의 구조였다. 내장탕을 먹은 강진의 식당도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주방이 보였고 주방을 지나가야 손님들을 맞는 방이 있었다. 성전의 이 식당도 동일한 구조였다. 왜 지저분한 주방을, 그것도 완전히 공개된 채 문 바로 앞에 두었을까 참 궁금했다. 여하튼 주방에는 커다란 솥단지에 뭔가 푹푹 끓고 있었고 그 냄새가 아주 고약했을 뿐 아니라 식당 전체에 파리가 들끓었다. 방으로 들어가자 계모임을 하는 듯한 중년여성들이 깔깔대고 수다들을 떤다. 그리고 그 옆에는 근처에서 공사를 하는 인부들 한 그룹이 식사를 하고 있었다. 다행이 밥상 하나가 비어 있어 거기에 자리를 잡고 메뉴에 있는 백반을 시켰다.

비지땀을 흘리는 아주머니가 커다란 쟁반에 밥을 내왔는데 반찬의 종류가 무척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갓김치, 묵은지, 파김치, 게장, 젓갈류 등 환상이다. 그리고 갈치 한 토막도 구워져 나왔다. 보기만 해도 모든 반찬이 짜 보였기에 입에 침이 마구 고였다. 무엇보다 밥그릇 옆에 놓은 국에 눈이 갔다. 아까 커다란 솥에 푹푹 끓던, 도대체 얼마동안 계속해서 끓이고 있는지 모를 바로 그것이었다. 옆에서 식사를 하는 인부들을 슬쩍 보니 이것을 맛나게 떠먹고 있었다. 그래 큰맘 먹고 한 숟가락을 떠 입에 넣었다.

간기를 봐서는 이게 국인지 찌개인지 잘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맛은 가히 일품이었다. 할머니 돌아가신 후 단 한 번도 유사한 맛을 느껴보지 못한 그런 할머니 국맛이었다. 시장해서일까? 반찬이 짜서 그랬을까? 뚝딱 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 한 그릇을 더 청해 먹었다. 그리고 밥값은 단돈 5천원이었다. 나오면서 주인아주머니께 국에 대하여 여쭈었더니 인부들을 위해서 뼈를 갈아 끓인 특별한 국인데 마침 내가 백반을 주문해서 드렸다는 것이다. 동성식당, 언제 다시 성전에 들를지 모르고, 이 식당이 언제까지 영업을 할지 모르지만 나는 식당을 나오면서 그 식당의 이름을 잊지 않도록 여러 번 입으로 되뇌면서 외우고 있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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