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식 박사. |
지난 글에서 예수님이 탁월한 이야기꾼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기억을 되살리는 의미에서 간단히 되짚어보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누구나 알아듣게 하려고 재미있는 '이야기 방식’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그런 방식을 두고 흔히 비유라고 하는데 이번에도 예수님의 비유 한 가지를 다루도록 하겠다(포도원 주인의 비유: 마태 20,1-16).
어느 포도원 주인이 이른 아침에 사람을 구하러 나섰다. 포도 수확 철이면 대규모의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지라 주인이 일손을 찾아 나선 것이었다. 그러나 포도원 일이 늘어나면서 일손이 점점 더 많이 필요해졌다. 아홉시, 열두시, 세시, 다섯 시... 날이 저물자 겨우 일이 끝나 일꾼 모두를 불러 셈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주인의 계산법이 이상했다. 막판에 와서 겨우 한 시간 일을 한 자와 아침부터 온종일 땀 흘려 일한 자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게 아닌가! 특히 마지막에 온 이부터 품삯을 주었으니 처음부터 일한 자들은 은근히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한 시간 일하고도 한 데나리온이니 나는 다섯 데나리온쯤 받겠지.’ 그러니 기대만큼 실망감도 컸을 것이다. 이야기에 긴장감을 더하기 위해 예수님은 일부러 그런 설정을 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거칠게 항의했다.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자칫하면 주인의 입장이 곤란해질 판이었다. 주인이 불공정한 사람이라는 평판이라도 주위에 나 보라! 다음 포도 수확 철에 어디 일꾼이나 한 명 제대로 구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비유를 처음 들었던 사람들은 주인의 대답이 여간 궁금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순간에 틀림없이 예수님은 주변 사람들을 둘러보고 미소를 지으며 숨을 고르셨을 법하다. 원래 궁금증을 유발시키기 위해서는 약간의 침묵이 필요하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한 숨 돌려보자.
예수님이 활동하던 시대의 이스라엘은 경제사정이 별로 좋지 않았다. 계속되는 흉년에 탐욕스런 로마총독들이 줄이어 부임한 까닭이었다. 그래서 일자리를 창출하기 위해 대규모 토목 사업들을 벌이곤 했었는데, 헤로데 대왕이 기원전 20년경에 예루살렘 성전을 중건한 것이나, 그 아들 헤로데 안티파스가 기원 후 20년경에 갈릴리 호숫가에 티베리아라는 도시를 건설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그에 따라 큰 도시에는 자연스럽게 일용직 노동자들의 인력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따라서 청중들에게 예수님의 비유가 전혀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거친 항의에 주인은 세 가지로 대답한다(13-15절). ① 만일 그들이 (경제) 정의를 주인에게 따지는 것이라면 전혀 문제가 안 되는데, 주인이 원래 계약대로 하루 품삯을 주었기 때문이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② 만일 주인의 그릇된 계산법을 따지고 있다면 그 역시 문제가 안 되는 것이, 임금을 주는 입장에서 주인 맘대로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내 돈 가지고 내 맘대로 쓰는데 무슨 참견이냐?’는 것이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③ 만일 그들이 주인이 늦게 온 일꾼들에게 베푼 자비에 시비를 거는 것이라면 그들은 악한 마음을 가진 자들이 된다. 그런 자들에게는 찬 기운이 설설 감도는 대답만 돌아올 뿐이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질문은 한가지인데 대답은 셋이니 아예 의문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겠다는 뜻이다.
포도원 주인이 하나님을 가리킨다는 사실은 일자무식인 사람도 쉽게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전하는 하나님은 어떤 분일까?
하나님은 ‘자기 맘대로’인 분이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경제 정의 따위에는 관심도 없었으며 주위 사람들의 평판도 귓등으로 흘리시는 분이다. 그분이 세상을 다루는 솜씨는 인간의 머리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다는 뜻이다. 다만 비유를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하나님이 막판에 와서 한 시간만 일한 자에게도 하루치 품삯을 다 주실 정도로 자비로운 분이시라는 점이다. 특히, 나와 같이 수많은 죄를 지는 인간에게 예수님의 비유는 진정한 복음일 수밖에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죄를 하나하나 따진다면 나의 최후는 불 보듯이 빤한 노릇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다행일 수 없다.
글/박태식 박사(서강대, 가톨릭대, 성공회대 신학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