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신앙적 순례생활은, 문자 그대로, ‘실패’와 ‘성공’의 ‘파도타기’와 같았다고 하겠습니다. 창 11:27~창 25:18에 나타난, 이른 바, <아브라함 설화>는 분명 이러한 ‘삶의 기복(起伏)의 리듬’을 잘 보여줍니다. 우리가 지금 다루려고 하는 본문, ①창 12: 10-20과 ②창 13:1-18 사이의 대조적(對照的) 이야기가 바로 그러한 ‘삶의 파도타기 리듬’을 극명하게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즉 ①창 12:10-20의 증언은 믿음의 선조인 아브라함의 신앙적 삶의 여정에 나타난 그의 ‘신앙적 실패’[伏]에 관한 증언이라고 한다면 ②창 13: 12-18의 증언은 이와 대조되는 그의 ‘신앙적 성공’[起]에 관한 증언이라고 하겠습니다.(물론 대부분의 현대 주석가들도 이렇게 봅니다만[J. Skinner; G. von Rad; E.A. Speiser; B. Vawter; W. Brueggemann; G.J. Wenham, et al.], 그러나 C. Westermann은 다소 이와 견해를 달리합니다.)
이 두 사건은 모두 다 똑 같이 ‘삶의 위기’와 더불어 시작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첫 이야기의 경우는 당시의 중동세계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는 것으로서, 힘없고 가난한 유랑민이면 누구나 일반적으로 겪는 ‘위기’로서, 그것은 미모의 아내를 둔 약자가 겪는 ‘위기’였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너무 아름다워서’(yefat mar’eh; 창 12:11) 힘없고 가난한 유민인 아브라함에게는 아내의 그러한 미모가 오히려 자신의 생명을 위협하는 요인이 되었다고 말합니다(창 12:13). 게다가 ‘기근’을 면해보려고 이주민으로서 접근해 온 이국(異國) 땅에서이므로(창 12:11a) 그 두려움은 배(倍)가 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신앙의 성패(成敗)를 가름하는 사건은, 일반적으로, 이러한 ‘위기의 때’에 일어나는 것이 상례입니다.
비록 하나님의 부르심[召命]을 온전히 받아들인 신앙의 사람(히 11:8-9a)이라고는 하나, 아브라함은 그토록 비장하게 결단하고 출향한 직후의 그 첫 시련에서는, 그만, ‘신앙적 실패’를 하고 맙니다. 즉 자기 목숨을 지키려고 아내를 ‘누이동생’이라고 속이는 ‘속임수’[奸計]를 써서 아내를 ‘수치의 위험’에 쉽게 내어주는 신앙적 ‘과오’를 범하고 맙니다(창 12:13; [‘죄’라는 히브리 말들의 의미는 ‘과오’ 또는 ‘이탈’이라는 말에서 由來]). 또한 이 아내의 희생 때문에 아브라함은 오히려 ‘뜻밖의 부(富)’를 누리게 되고(창 12:16) 반면에, 이집트 왕은 특별히 큰 잘못도 없는데 난데없는 재앙을 입게 됩니다(창 12:17). 아브라함의 신앙적 실패!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물론,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은 처음부터 아브라함의 편이셨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그러한 비도덕성까지도 감싸주신다는 따위의 궤변을 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정작 신앙적 실수는 아브라함이 하였는데 이로 인해 피해를 본 사람은 전혀 이 사건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는 ‘이집트 왕’(‘바로’)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일의 결과를 정당화하고 아브라함만 변호/찬양하는 것은 성서 기록의 경전됨을 모독하는 것이 되고 동시에 그것은 성서해석학의 빈곤을 드러내는 수치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본문의 전후문맥을 다시 자세히 들여다보니, 이러한 현상이 생긴 것은 오히려 전혀 다른 문맥, 즉, 야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실 때 그에게 주신 그 ‘약속의 말씀’으로부터 이 모든 것이 비롯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그것은 창 12:3의 말씀, 이른 바,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축복하고 또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를 내릴 것이다. 땅에 사는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축복[과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는 ‘약속의 말씀’에서부터 비롯된 것일 수밖에 없음을 보게 됩니다. 말하자면, 아브라함의 잘못에 대한 징벌이 이 일과 관련해서는 아무런 잘못도 없는 저 이집트 왕에게로 전이(轉移)되어 갔다는 말이 되는데, 말하자면, 아브라함이 받을 ‘축복’뿐만 아니라 ‘저주’도 또한 엉뚱한 다른 사람에게로까지 옮겨 가기도(!) 또한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아브라함의 잘못/부름 받은 자의 잘못/ 부름 받은 공동체(기독교 공동체 또는 교회 공동체)의 잘못이 받아야할 그 심판의 저주도 또한 이 잘못에 직접적으로 연루되지 않은 사람에게로 전이(轉移)되기도(!) 또한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 하겠습니다!!
저주의 전이(轉移)! 즉 소명 받은 자가 가지고 있는 그 ‘세상의 빛’이 갖고 있는 전이기능(轉移機能)은 세상에게 ‘복’만이 아니라 ‘저주’도 또한!! 옮겨주는 기능을 한다는 이 기현상(奇現象)은, 실로, 우리의 인간역사를 ‘홀로!’ 주관하시는 ‘보다 더 큰! 초월적인 힘’이 우리 인간의 역사 속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인간역사의 이러한 특별한 ‘역리적(逆理的) 섭리’ 때문에, ‘때 아닌 재산증식’을 하게 되어 뜻밖의 풍요를 누리며 인생순례를 계속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 밖의 ‘횡재’는 오히려 ‘위기’를 갖고 오기 쉽다는 것이 또한 우리네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위기는 또한 믿음의 사람들에게는 ‘시험’의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앞의 본문(창 12: 10-20)에서는 ‘신앙적 실패’를 겪은 아브라함이 그 다음에 이어지는 본문(창 13:1-18)에서는 과연 이 시험을 잘 통과하게 될 것인가가 최대 관심사로 부상하게 됩니다.
뜻밖의 재산증식, 그러나, 거기에는 삼촌(아브라함)의 목자(牧者)들과 조카(롯)의 목자들 사이에서는 ‘목축 장소의 협소함’ 때문으로 인한 잦은 ‘땅-분쟁’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특히 그 땅에는 가나안 사람들과 브리스 사람들도 함께 살고 있었다는 본문의 증언으로 미루어보면, 협소한 초원지로 인한 ‘땅-분쟁의 갈등’은 당시의 인간 삶에서는 다반사적(茶飯事的) 현실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분명, 한 핏줄간의 다툼(창 13:8)이라는 것은, 먼 후일 사도 바울도 말한 바,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 5:15)라는 경고가 말하듯, 양편의 그 누구에게도 결코 ‘득’(得)이 되지 않는다는 ‘단순한 진리’를 잘 간파하고는 조카 롯에게 분쟁해소를 위한 ‘분가’(分家)를! 제안합니다. 이 대목에 와서야 우리의 본문은 드디어 한 이야기의 절정(絶頂)을 직시하게 됩니다. 즉 분가(分家)에 따른 여러 결과들이 ‘신학적 해석’에 의하여 잘 정리되어서 ‘케리그마적’(kerygmatic) 메시지를 담아내게 합니다. 신언(神言)이 마련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제안합니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左)하면 나는 우(右)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라고 말합니다. 분명, 이 제안은 삼촌이 조카에게 기득권을 양보하겠다는 제안이었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제안은 기원 전 15-6세기의 고대 중동사회에서는 대단한 ‘모험’을 내포한 보기 드문 미덕의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해석의 잣대를 달리해서 이러한 기득권 양보란 오히려 조카 롯에 대한 삼촌 아브라함이 감당하여야 할 후견인의 책임을 포기하는 무책임한 행동(spoiling)이라고 비난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왜냐하면 삼촌(아브라함)은, 후일, 조카(롯)가 사는 소돔 성을 멸하시려하시는 하나님의 길목을 막고 서서(창 18:22) 조카(롯)을 구하려고 결사적으로 매달려 “의인을 악인과 함께 멸하려 하시나이까?”(창 18:23-33)라고 항변하였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께서도 이러한 아브라함을 기억하셔서 그 때문에(!) 롯을 그 급박한 재앙 중에서 극적으로 건져내 주셨다고(창 19:2 -29) 성서는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이 ‘기득권 양보’의 결단은 ‘하늘도 인정한’(창 13:14-17) 신앙적 결단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결단은 그 무슨 아브라함의 인격이 지닌 단순히 순수한 인도적(人道的) 의지의 결과라기보다는, 본문(창 13:8-9)의 증언에 의하면, 그의 이러한 기득권의 양보에는 오히려 <‘다툼’보다는 ‘화목’이 그 무엇보다 우선적인 하나님의 뜻>이라는 믿음이 작용하였기 때문이라고 설명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이 본문의 성서기자가 이 사건을 보면서 계시 받았던 바, 그의 해석학적 증언을 통하여 확인된 사항입니다. 즉 창 13:10-13은 아브라함의 그러한 결단의 결과가 두 가지의 상반된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임을 ‘예변법적(豫辨法的’[proleptic])으로 증언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많은 현대 창세기 주석가들이 해석해 주었듯이(C. Westermann을 제외한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그러했듯이), 아브라함의 이러한 기득권 양보 제안에 대하여 나이 어린 조카 ‘롯’은 자신의 ‘후견인’(보호자)인 삼촌에게 겸양의 제스처 한 번 취하지 않고 주위의 땅들을 둘러보자마자, 즉각!, ‘좋은 땅’으로 쉽게 식별되는 그 좋은 땅을 신속히 자기의 것으로 선택한 후 신속히 그 곳으로(=동쪽으로) 떠나가 버렸던 것입니다(창 13:11a). 말하자면, 가나안 남부 헤브론 지역의 메마른 땅과는 너무나 대비되는 ‘물이 넉넉한’(창 13:10) 땅, 성서 기자가 첨부한 해석(hermeneutical gloss)에 의하면 ‘야훼의 동산’(=에덴동산)과도 같고 ‘이집트 땅’(=나일 강 유역)과도 같은 지상최고의 비옥한 지역(창 13:10)을 자기 것으로 선택한 후 작별의 인사도 없이 떠나가 버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더욱 주목할 사실은, 다음의 기록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즉 롯이 그토록 신속히(!) 선택하여 떠나가 살게 된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그 땅에 대한 성서기자의 신학적 해석의 덧붙임이 주는 바, 그 메시지(창 13:10-13)가 주는 영적 충동이 하! 놀라워 우리의 옷깃을 다시 여미게 한다는 그 사실입니다. “롯이 멀리 바라보니, 요단 온 들판이, 소알에 이르기까지, 물이 넉넉하여 마치 야훼의 동산과 같고, 이집트 땅과도 같았다. 그것은 아직 야훼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시기 전이었기 때문이었다. 롯은 요단의 온 들판을 자기 것으로 하고, 동쪽으로 떠나갔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따로 떨어져서 살게 되었다. 즉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에 살고, 롯은 평지의 여러 성읍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살다가, 소돔 가까이에 이르러서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소돔 사람들은 악하였으며, 야훼를 거슬러서 온갖 죄를 짓고 있었다.”(창 13:10-13)라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밑줄 친 부분의 첨가된 신학적 해석은, 실로, 아브라함의 결단과 롯의 결단에 대한 신(神)의 상반된 반응, 즉 축복과 저주의 반응이 가져 올 그들의 미래(창 18-19장)를 극명하게 대비(對比)시켜 줌으로 우리도 우리의 미래를 또한 진지하게 관조(觀照)해보도록 만듭니다. 즉 롯이 선택한 비옥한 평원(‘키칼’= 창 19:28, 옹기 가마에서 솟아오르는 연기와 같이 타서 소멸하여 멸망하게 될 넓은 들의 소돔 땅)과 그리고 롯이 쓸모없다 하여 아브라함 몫으로 내동댕이쳐진 불모지 팔레스타인의 네겝 지역 ‘그 곳’(‘함마콤’ the very place) 사이에는 저주와 축복이 서릿발처럼 날이 서서 ‘대각’(對角)을 이루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삼촌의 기득권을 조카가 잽싸게 움켜쥐었던 저 에덴동산 같이 비옥한 땅은 장차는!! 불타 없어질 소돔 땅이었던 반면에 내버려진 땅 네겝(남방 땅) 돌무지는 장차는 헤브론 성소가 있는 유서 깊은 성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러한 현란하기 그지없는 역사의 ‘역리적 섭리’(逆理的 攝理)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땅 분쟁의 각박한 생존의 전쟁터 한 복판에 서서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창 13:9)라고 말한 아브라함의 저 위대한 신앙고백은 3500여년의 세월이 지난 오늘 21세기의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우리에게 동일한 예언자적 경고로 울려옵니다.
‘좌파’(gauche)라는 말은 1789년 프랑스 대혁명 당시 국회의장 석을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 앉았던 급진파 의원들을 가리켜 이름 하였던 데서부터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여기서 유래한 유럽 좌파들은 그들의 정치현실을 선의(善意)의 경쟁으로 이끄는 정치선진(政治先進)의 길로 이끌어갈 때만 하여도 우리는 정치(政治)라는 것에 어느 정도는 희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최선이든 차선이든 합의를 도출하면 좌파는 우파를, 우파는 좌파를 ‘frankly’(있는 그대로 솔직히) 인정하고 두 바퀴의 수레를 마치 한 바퀴인양 굴려왔던 저 선진 유럽의 민주 길잡이의 그 원형을 부러워하면서 모방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21세기는 더 이상 그 때는 아닌 것 같습니다. 좌/우의 이념논쟁은 전적으로 권력쟁취만을 궁극적 관심(=God)으로 삼는 이데올로기 광신주의자가 되어 영원한 평행선의 “서로 물고 먹는”(갈 5:15) 이전투구(泥田鬪狗)의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더 이상 우리 가운데는 없습니다. 슬픔이 강물 되어 흐르고 있을 뿐입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겠다는 정신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찾아 볼 수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렘 5:1 !!).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는 우리 본문의 증언은 분명 이념극복과 이념초월의 과제가 우리 시대의 미래를 희망차게 열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 21세기 이 시대를 향한 ‘복음의 소리’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믿는 우리들 신앙인들은 모름지기 갈라디아서 5:15를 읽고 또 읽으면서 동시에 예레미야의 예언경고(렘 5:1)를 우리 시대의 메시지로 읽을 수 있었으면 얼마나 좋겠느냐는 것이 나의 간절한 바람입니다. 좌(左)는 무엇이고 우(右)는 무엇이기에, 그 좌우 이념이 우리의 미래를 이토록 어둡게 하는 것입니까? 적어도! ‘이념’이 우리의 신(神: 궁극적 관심 ultimate concern)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기독교인이면 더욱 그러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키는 십계의 제 1, 2계에 대한 정면부정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세상의 종말을 재촉하는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토에바’=‘브델류그마’; 단 9:27; 마24:15) 즉 “노하시기를 더디 하시는 하나님”(출 34:6)께서도 뱉어버리시지 않고는 참고 견디시기가 힘드신 ‘우상숭배’의 ‘혐오 물’이기 때문입니다.
21세기의 최대 신앙적 과제는, 그러므로, 이 ‘좌파’ ‘우파’하는 ‘이념신앙’(‘토에바’)을 극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분명, 우리 본문의 증언에 의하면, 그 극복의 길은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는 인간 신뢰의 회복>, 그것이 아니고 달리 다른 길은 아닐 것입니다(2011. 10.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