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디지털기술 혁명가의 남긴 말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편집자문위원). |
2011년 10월 5일 새벽,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상징되는 현대 디지털문명에 새로운 혁신과 비젼을 가져다준 인물 스티브 잡스가 56세의 아까운 나이로 별세했다. 그가 이룬 과학적 혁명의 엄청난 파급결과와 미래기술문명에 미칠 영향을 예측하는 것은 내 전문분야가 아니라서 언급을 아니하겠다. 다만 그의 아까운 죽음을 애도하는 전문가들의 기사를 보면서 두 가지가 신학자의 맘에서 떠나질 않는다.
그 한 가지는, 그가 단순히 정보산업기술을 혁신해서 돈을 벌자는 전문기업인이 아니라, 기존질서의 세계를 절대화하거나 당연시하지 않고 항상 새로운 삶의 질서, 새로운 문명의 실현을 꿈꾸며 외길을 달려가는 신념의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새로운 문명의 본질적 특징으로서 과학적 기술, 인문학적 사람가치 중심, 그리고 예술적 아름다움을 통합하는 깊은 통찰과 직관력을 가질 것을 강조한 사람이었다는 점이다.
그의 신념은, 췌장암이라는 현대의학으로써는 치유한계를 드러내는 질병을 앓으면서 어쩌면 머지 않은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는 가운데 참석했던 2005년 미국 명문대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식에서, 매우 종교적인 내용의 격려사 속에서 나타났음을 주목하고 싶다. 격려강연의 핵심은 두 가지였다. 현대사회의 번잡함 속에서 많은 것들을 성취하려는 무제약적 성취욕망의 욕동에 휘둘려 이끌려 살지 말고, 후회 없을 가장 소중한 일에만 유한한 생의 시간을 쏟아부으며 살라는 것이다. 그리고, 삶의 자세는 “언제나 갈망하는 자세로, 언제나 우직한 맘으로”(Stay hungry, stay foolish) 하라는 조언이었다. 디지털 통신기계를 가능한 한 단순하게 그리고 사용하기 쉽게 만들려는 목표처럼, 인생의 가장 아름다움도 단순성과 일상성에서 완성된다는 멘토로서의 조언이었을 것이다.
부동산재벌 이름의 광장을 ‘자유광장’으로 되돌려놓은 뜻
스티브 잡스가 마지막 삶의 숨결을 가늘게 쉬면서 평안한 잠에 들어가려고 식구들과 의료진의 지켜보는 가운데 있을 때, 그의 나라 미국의 금융중심도시 뉴욕에서는 심상치 않은 보통사람들이 ‘리버티광장’에 모여들고 있었다. 그들이 외치는 구호 목소리는 별로 크지 않았으나 주장하는 구호내용은 문명의 전환을 촉구하는 본질적인 구호였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월가를 점령하라!”는 것이다. “1%가 99%의 부를 독점하고 있는 현 세상질서는 바꿔져야 한다!”는 것이다.
기상학적 물리현상 중에 ‘나비효과’라는 것이 있지만, 뉴욕 중심 작은 리버티광장에서 시작한 이 작은 ‘나비날개 펄럭임’의 결과는 금융기업의 부패와 탐욕으로 대표되는 오늘날 지구촌의 ‘자본주의적 세계화’라고 불리는 경제정치질서의 탈바꿈을 촉구하는 역사의 소리임에 틀림없다.
머리가 비교적 우수한 학생들이 몰려드는 대학의 전공분야가 의학, 법학, 경영학인 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거의 문명사회일수록 비슷한 현상을 보인지 오래다. 의학은 사람 몸을 다루는 어렵고 힘든 영역이며, 의사는 사회신분적 존경과 부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법학으로 상징되는 법대출신은 판검사를 거쳐 사회공동체를 조정하고 관리하는 정치권력에 접근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경제학과 더불어 특히 경영학은 쉽게 말해 돈 버는 비법을 터득하는 전공분야이다. 보이지 않지만 인간의 정신과 영혼을 돌보는 철학이나 신학은 계몽시대 이후 급격히 인기가 추락하여 소신있는 청년들이나 진학하는 소수인의 전공영역이 되었다.
신학을 지망했던 필자는 서울 명동 주변 한국의 금융산업 중심지역을 대학시절부터 걸어갈 때마다 풀리지 않는 궁금증이 있었다. 위용을 자랑하는 높은 고급빌딩엔 금융업에 종사하는 수많은 머리 좋은 젊은이들이 밤 8시가 되어도 퇴근하지 않고 전등을 밝게 밝혀놓고 주판알을 튕기고 전자계산기를 두드리며 일하고 있었다. 봉급도 많이 받아서 생활수준은 높은 것 같고, 자기가 하는 일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끼며 일에 몰입하고 몹시 바쁜 것 같았다.
한국 같은 작은 나라에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나 논밭이나 목장이나 바다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1960-70년대만 하더라도 총생산력이 얼마 안 되는 때였다. 그렇다면 은행, 국제금융사업, 주식회사, 증권회사 등등은 무얼 가지고 이익을 창출하는가 무식한 신학도는 늘 궁금했다. 한국경제 규모가 발전할수록, 생산과 제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주류를 이루거나 주목받는 국가의 산업구조는 후진국의 표징이고, 금융업과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발전되는 것이 정상이고 선진국이 되었다는 표징이라고 자꾸 신문에서는 떠들어댔다. 그러나, 머리가 나쁘고 고지식한 신학도인 나는 여전히 납득이 아니 되었다.
그런데, 필자와 같은 머리가 별로 좋지 않고 경제 정치 논리를 모르는 우직한 사람들도 그 ‘마법의 경제논리’를 깨닫게 된 사건이 일어났다. 김영삼 정권과 김대중 정권 교체기에 일어난 세계금융위기, 2008년에 미국의 리먼브라더스 은행의 부동산 신용대출이 파산원인이 된 미국 금융위기사건, 그리고 지금도 유럽에서 전전긍긍 날마다 불타고 있는 그리스, 이탈리아, 스페인, 아일랜드의 금융위기의 뉴스속보들을 보면서 나와 같은 보통사람들에게도 ‘요술방망이’ 같은 경제법칙은 없다는 명료한 진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심는대로 거둔다”는 동서고금 속담과 성경진리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경제적 부가 머리 좋은 경영학도들의 주판알과 컴퓨터 조종능력에서 기적처럼 부풀려지는 법은 절대 없다는 아주 쉽고 명백한 진리가 드러난 것이다. 사람들은 창세기 창조설화대로 “이마에 땀을 흘리며” 노동의 대가로서 먹거리를 만들어 살도록 되어 있다. 경제적 삶의 기본구조, 기초발판은 공장, 논밭, 바다, 사무실에서 정직하고 성실하게 일하는 생산제조업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투명하고 정직한 경제정책과 경영운용의 결과물인 것이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국가정책으로부터 개인가정에 이르기 까지 지나친 탐욕, 불로소득의 경제이익 창출, 경제유발 효과 및 일자리 창출이라는 과장된 정부의 과대홍보, 거품경제의 투기거래, 은행들의 비생산적 이자로 돈벌기에 속아 살아왔다. 그 결과 제조업 특히 대기업 하청업체들은 몰락해 가고, 자영업자들은 현상유지도 어려워 고민이 깊어가고, 빈익빈부익부 현상은 가중화되어 사회의 공동체의식은 깨어지고, 시민들은 불안과 불신이 심화되어 갔다. 젊은이들은 꿈을 잃고 마치 사회탈락자가 된 듯한 억울한 수치심에 마음의 불만이 끓어오르고 있다.
자본주의적 사회의 전형이며, 자본주의가 지닌 모든 창조적 가치가 존중되어 왔고, 정당하게 창의성과 경쟁과 노력을 통해 부를 이룬 기업가를 존경해오던 미국사회에서 ‘월가를 점령하라!’는 구호의 데모대가 출현한 것은 일부 사회불평자들이나 사회경쟁 탈락자들의 분풀이 시위가 아닌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말했던 것처럼 기존질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보다 인간다운 얼굴을 지닌 사회를 창출하려는 깨어있는 시민들의 일어섬인 것이다.
여당 서울시장후보가 한기총을 방문한 뜻은
스티브 잡스의 죽음과 뉴욕 리버티광장의 시민 데모와 유럽 여러나라 및 중동국가에서의 시민혁명 불길이 새 문명의 산고의 진통으로 느껴져오는 이 때, 한국 사회와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약 2주 후 10월 26일엔 대한민국 수도 서울 시장의 보궐선거가 열린다. 여야 후보진영간의 선거전에 불이 붙었다. 그런데, 선거 전초전의 모양새를 보니 이 나라가 과연 희망이 있을까 하고 분노와 한숨이 나온다. 정치란 피도 눈물도 없는 싸움터라고 하지만, 양 진영의 ‘네거티브 선거전략’을 보고 듣는 깨어있는 시민들은 기가 막힌다. 특히 여당진영이 야당후보의 ‘병역의무’에 관련하여 네거티브 선거전략을 먼저 사용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아무 감동이 없을 뿐만 아니라 구태의연한 정치계의 시대착오적 정치술수에 ‘구토증’이 나올 지경이다.
본래 정치란 그런 것이 아닐 것이다. 가장 남자다운 학문이 정치학이요, 가장 대도를 걷고 명분이 뚜렷한 논리를 가지고, 그야말고 창조적이고도 실현가능한 구체적 정책을 놓고 경쟁하여 시민들의 판단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지금 우리 한국 백성이 해야 할 가장 시급한 일은, 허황된 과장광고 문화, 겉치례의 허장성세의 자랑, 질량적 크기만 신경쓸 뿐 거기에 걸맞는 내실이 전혀 갖추어 있지 않은 물량주의, 인격과 생명의 존엄성을 비웃는 듯한 일부 특권층의 낭비벽과 무한 탐욕을 중지시키는 일이다.
자라나는 우리 어린 자녀들이 어른들의 줄세우기 교육에 정신과 몸이 말라 비틀어져가는 것을 두고 보는 것은 죄악인 것이다. 서민들과 오늘의 한국사회의 밑거름이 되었던 노후대책 없는 빈곤노인계층이 월 10만원 복지지원금으로 근근이 생활하는데, 핸드백 한 개 값이 몇 백 만원 나간다는 외제수입명품이라고 하는 그것을 경쟁하듯 예약주문하는 사회는 ‘자유를 보장하는 자유민주주의’ 사회가 아니라 변혁되어야 할 ‘비인간화된 병든 사회’인 것이다.
이러한 시기에, 한국 기독교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서울시장 여당 후보자가 선거운동의 일환으로 예비적 인사방문차 평소 여당 후보를 지지하는 든든한 울타리 사회집단을 방문했는데, 그 중 ‘한기총’ 지도부를 방문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방문 못 할 이유는 없지만, 서울시민들과 국민들은 ‘달마가 동쪽으로 가는 뜻은…’이란 영화제목을 생각하면서 만감이 교차한다.
여당 후보의 한기총 방문의 깊은 속을 서울 변두리 학교 은퇴교수가 알 수야 없지만, 온 세계가 새 문명의 동터옴을 감지하면서 환골탈태의 근본적인 변화 기운으로 가득한 이 시대에, 기존질서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그러한 정치적 노선이 ‘안정과 번영’이라는 명분 아래 보수정치집단의 ‘궁정사제집단’으로 역할하는 것으로 한국 기독교 보수적 지도부가 국민에게 비친다면, 한국 역사 속에서 기독교의 미래는 매우 어둡고 희망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스티브 잡스의 마지막 유언같은 부탁을 한국 기독교는 경청해야 한다. 언제나 새로움과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자세로, 영악한 맘을 버리고 단순해져서 바보처럼 우직하게 보일 만큼 진솔해야 한다. 자본주의 대표적 국가, 그 중에서도 금융시장의 심장 같은 뉴욕월가를 점령하고 외치는 구호를 진지하게 듣지 않으면, 곧 한국 사회 안에도 ‘촛불집회’보다도 더 밝고 더 큰 함성이 인간다운 사회를 만들자고 일어날 것이다. 그 때, 한국 기독교가 4.19 혁명이 일어날 때 경험했던 ‘역사적 죄책감’과 새로운 역사변혁의 주류흐름에서 철저하게 비판적으로 무시당한 ‘소외감’을 다시 체험할 것이다. ‘안정과 더 큰 번영’을 약속하는 정치가 아니라 ‘변혁과 더 큰 나눔’을 약속하는 정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