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69)

중국과 일본 선교




제13장 중국과 일본 선교

1. 중국 선교

중국에 온 최초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는 런던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에서 파송받고 1807년 중국 마카오에 도착한 로버트 모리손(Robert Morrison, 1782~1834) 목사였다. 모리손은 광동(廣東) 지방에 당분간 숨어 생활했다. 이 당시 서양인으로서 동남아 지역에 거주할 수 있는 곳은 광동 지방뿐이었는데 광동이 동서 무역의 항구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역상에 종사하는 서양인들만 거주할 수 있었고 선교사는 거주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선교사는 무역업에 종사하는 신분으로 거주할 수 있어서 모리손도 동인도회사 통역관이 되어 월급을 받고 몰래 선교활동을 하였다.

모리손은 중국인 어학선생을 구해서 중국어를 배워서 1813년에 신약성서를 번역하였고 1819년에는 구약을 번역하여 출판할 기회를 기다렸다. 1814년에 차(Tsae A-ko) 씨가 처음 개종자가 되어 해변가 높은 산에서 숨어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모리손은 중영(中英)사전을 편찬하여 후래의 선교사들에게 큰 도움이 되게 했다. 그리고 1818년에 말라카에 영화대학(英華大學, Anglo-Chinese College)을 세웠다. 이 대학에서 동서 언어학과 과학을 가르쳤고 1818년에는 42명의 학생들이 세례를 받았다. 아직은 중국 본토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는 25년간 한정된 좁은 지역에서 선교할 수밖에 없었지만 ‘문화사도’라고 불릴 만큼 큰 업적을 남겼다. 모리손의 동역자로서 함께 선교한 윌리엄 밀네(William Milne) 목사의 선교를 받고 한 인쇄공업자가 개종하였고 후에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가 중국인 최초의 목사 리앙 파(Liang Fa)였다.

중국이 영국과 프랑스를 상대로 한 전쟁에서 지고 1842년에 남경조약(南京條約)을 맺고 상하이(上海)를 비롯한 5개 항구를 개항함에 따라 그 5개 항 구역 안에서만 그리스도교 신교가 허락되었다. 이 5개 도시는 외국인의 자치구역이어서 중국의 통치에서 자유하는 소위 조계(租界)였다. 그리고 그 후 새 조약으로 1858년부터는 선교사들이 다른 유럽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롭게 중국을 여행할 수 있게 되어서 선교단체도 많아졌다. 영국과 중국 사이의 전쟁은 영국 무역상들이 중국에 인도산 아편을 팔았기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중국은 중국인들의 아편 중독을 막으려 한 것이었다. 또한 중국이 서양 제국과의 공세적인 국교와 무역을 싫어한 것이 전쟁의 한 주요 동기였다.

모리손보다 조금 늦게 홀랜드의 개혁파교회 목사 칼 F. A. 귀츨라프(Gutzlaff) 목사가 1826년에 마카오 지방에 와서 무역회사의 통역관으로 취직하여 복무하면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태국에도 들어가서 활동하였고 조선의 서해안에도 무역선을 타고 들어와서 중국어 성서를 전하였다. 그는 중국인 18명을 고용하여 18개 성을 다니면서 성서를 전하게 하였으나 그들은 거의 다 아편중독자들이었고 홍콩을 벗어나서 중국 내륙에 들어간 사람이 없었다. 그는 크게 실망하였으나 뒤에 올 선교사들에게 도움이 된 것들이 있었다. 그는 1850년까지 무역회사원으로도 많은 월급을 받고 살았다. 귀츨라프의 한 동역자 루돌프 레헬러(Rudolf Lechler)는 50년간 중국에서 선교했다.

홍수전(洪秀全)이라는 사람이 학교의 교사였는데 중병을 앓고 있던 중에 우연한 기회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한 소책자를 얻어 보고 환상을 보았다. 그리하여 1846년경부터 광시성의 남쪽 산악지대에서 종교와 정치를 섞은 사회운동을 시작하였다. 그는 그리스도교의 관습을 채택하여 조직한 한 운동단체를 만들고, 여러가지 사회사상을 혼합해서 우상타파와 마약근절을 부르짖고 한족 해방을 표방한 정치운동을 전개하였다. 1853년 3월 19일에 그의 해방군대는 남경을 함락시키고 태평국 건립을 선포하였다. 이것을 ‘태평천국(太平天國)의 난’이라고 부른다. 그는 자신을 그 천국의 태평왕으로 자칭하였다. 이 태평천국에서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했고 세례를 베풀고 일요일을 성일로 지키고 찬송가를 만들어 불렀고, 그리스도교 교리를 왜곡하여 믿었다. 홍수전의 천국에는 만주족의 청국(淸國) 군대보다는 엄격한 기강이 서 있었다. 그리하여 선교사들 중에는 그의 운동에 호감을 가진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만주족이 세력을 규합하여 홍수전을 반격하기 시작하였고 영국 군인 찰스 골돈(Charles Gordon) 대위가 이끈 군대가 홍수전을 타도했다. 홍수전의 운동에 가담한 폭도들이 중국에 있던 로마가톨릭 선교사들이 자기들의 운동을 반대한다는 이유로 가톨릭 선교사들과 중국인 신도들을 합해서 600명을 살해했다. 이 무렵 프랑스가 중국과 제2차 전쟁을 벌이고 있었는데 이때 중국 정부는 로마가톨릭 교인들을 의심하고 미워하였고 가톨릭 선교사 한 명을 사형했다. 1856년에 휴전하고 유럽의 선교활동이 조금 자유롭게 되었다. 이때 중국에서 활약한 가톨릭 선교사들은 프란체스코 수도회 선교사들이었는데, 이들은 예수회 선교사들과는 달리 중국문화에 대한 이해와 관용이 없어서 중국인들이 싫어하였고 신부들이 하던 의료사업과 고아원 사업도 의심을 많이 받았다.

1853년에 21세의 영국인 의사 허드슨 테일러(J. Hudson Taylor, 1832~1905)가 중국복음협회 선교사로 와 의료봉사를 하면서 중국 각지를 여행하여 말과 풍속을 배웠다. 1860년에 건강이 좋지 않아서 7년간의 사역을 그만두고 귀국하였다. 그가 중국인 복장을 하고 중국인과 같은 습관을 보였을 때 다른 선교사들의 반대가 극심했었다. 그리고 1865년에 중국내륙선교회(Chinese Inland Mission)를 조직하여 중국에 다시 와서 선교를 시작했다. 이때 중국의 18개 성 중 11개 성에 아직 프로테스탄트 선교사가 없었다.

그의 선교회는 초교파적인 단체로서 어떤 교파의 원조도 없었다. 그의 선교회는 몇 가지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선교본부를 영국이 아니고 중국에 두는 것과 정식 신학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도 선교사로 영입할 것과 신학은 보수적일 것과 선교사는 중국인 복장을 하고 중국인들과 동일시되어야 할 것과 복음 전파의 전도설교를 일차적 사명으로 할 것과 교육•문화 및 자선사업도 가능하나 복음 전파에 방해가 되지 않게 해야 할 것 등이며, 이 선교회의 지휘권은 영국이 아니고 중국에 있다고 명시했다. 그리고 그들의 전도설교의 주요 메시지는 임박한 재림이었다. 테일러는 어떤 교파에 속한 사람이든지 뜻이 확실하고 설교에 재능이 있으면 선교회원으로 받았다. 그리고 그는 다른 선교단체가 아직 선교하지 못한 지역을 우선적으로 선교하게 하였고, 선교사들에게는 일정한 월급이 없이 선교지원이 들어오는 대로 나눠 가졌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늘 기도하면서 성서에 있는 말 ‘에벤에셀’(Ebenezer)과 ‘여호와 이레’(Jehovah jireh)라는 말을 즐겨 썼다. 1882년경에는 중국 18개 성에 이 선교회 선교사들이 들어갔고, 15개 성에 선교회 지부가 설치되었다. 이 선교회 설립 30년 만에 641명의 선교사가 가담했고 1914년에는 회원이 1,000명이 넘었다. 이 선교회는 중국의 모든 지역에 들어가서 선교하였고 개종자들은 비교적 가난한 층이었다. 이 선교사 자신들도 고급지성인들이 아니었고 다만 복음을 하루라도 빨리 그리고 더 널리 전파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이렇게 하여 중국에 그리스도인들의 인구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1914년의 통계에 따르면 교인 수는 250,000명 이상이었는데 로마가톨릭 교인 수는 더 많았다. 그의 중국내륙선교회는 서양문명을 중국에 소개하려는 생각은 없었고 중국본토민 교회를 수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다. 서양의 교파를 중국에 이식할 생각이 없었고, 중국 내지 선교로 생긴 교회가 하나의 중국인 교회가 된 것이다. 테일러의 중국내륙선교회의 업적이 널리 알려져 영국 케임브리지대학 졸업생 7명이 테일러에게 와서 동역하였고 그 중의 한 사람 D. E. 호스트(Hoste)가 테일러의 후계자가 되었다.

1865년 이후로 중국은 유럽과 미국의 많은 선교단체들의 가장 큰 관심의 대상국이 되었다. 중국은 큰 나라인 동시에 유교, 도교와 같은 재래종교의 긴 역사와 완강한 전통을 가진 나라여서 이러한 나라의 복음화가 동양의 복음화의 첩경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동북아시아만이 아니고 동남아시아까지 중국의 문화권에 속하였기 때문이다. 반면에 유럽 제국과 미국의 정치가들은 중국과의 무역으로 경제적 이익을 얻으려 하였다. 아무튼 서양의 문화와 그리스도교 종교까지 중국 땅에 와서 중국이 서구화되는 듯이 보였다. 이것은 중국인의 민족적 및 국가적 반감을 야기할 수 있는 일이어서 1900년 북경에서 의화단(義和團) 폭동이 일어났다. 이 폭동은 서양의 식민세력과 그리스도교의 포교에 대한 반항이었다. 이 폭동으로 로마가톨릭 선교사 50명과 2,000명의 신도들과 188명의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과 신도들이 살해되었다. 많은 선교사들이 피난을 갔고 중국인 신도들도 박해를 받았다. 청조는 자력으로 이 폭동을 진압할 힘이 없어서 서양나라 군대와 일본 군대의 힘을 빌려서 진압하였다. 폭동이 진압된 후 청나라 정부는 폭동으로 피해를 입은 서양나라와 일본에 막대한 변상을 해야 했다. 배상 문제는 복잡하였다. 선교회들이 입은 피해도 컸다. 인명피해와 재산피해를 보상받는 문제에 있어서 테일러의 내륙선교회는 변상을 거부하여 받지 않았다. 미국 정부는 받은 보상금을 중국의 교육사업을 위해 돌려주었다. 테일러는 이때 참으로 지혜로웠다. 이 사건 이후 중국의 선교는 전성기를 맞았다. 19세기 말 5,462개 프로테스탄트 선교사가 중국에서 역사하였다.

의화단 사건 이후 청나라는 정치적으로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사회적으로는 서양 문물의 영향으로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즉 중국은 이제 더 이상 서양문명과 서양나라들과의 수교와 유대를 배척할 수 없게 되었고, 정치적 및 사회적 신진세력들이 등장하여 혁명을 부르짖었다. 손문(孫文)이 청조를 타도하고 1911년에 중화민국을 수립하였다. 서양의 민주주의 정치체제인 공화제 국가이다. 그는 중국의 민주주의 정치의 시조가 되었다. 

손문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진 사람이어서 미국 선교사들의 협력을 받았고 중국의 정치적, 문화적 및 종교적 혁명을 성취시켰다. 그를 도운 선교사들은 Y. J. 알렌(Allen)과 G. 레이드(Reid)와 T. 리차드(Richard)였다. 이들은 정부의 고위 관직과 그 밖의 요직에 앉아서 정치와 교육과 사회의 혁신과 발전을 위하여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이때는 중국에 모리손 목사가 첫 번째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서 입국한 지 꼭 100년이 되는 때였다. 많은 박해와 수난을 겪었으나 1907년에 중국의 프로테스탄트 선교단체가 50개가 넘었고 선교의 협력을 위하여 처음으로 중국선교사협의회가 모였다. 이 협의회는 서양의 선교사들만의 회합이었으나 그들은 중국 그리스도교 협의회를 조직할 생각을 하였다. 그리하여 중국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자력으로 복음을 전하는 자전교회(自傳敎會)가 되며 중국 그리스도인들이 자력으로 교회를 다스리는 교회(自治敎會)가 되며 더 나아가 선교지원비 없이 중국교회가 자급하는 교회(自給敎會)로 성장하도록 하는 선교정책을 채택했다. 이 협의회는 지방의 협의회도 만들어서 같은 선교정책으로 교회를 발전시킬 수 있게 결정하였다. 아무튼 1910년에서 1920년에 이르는 동안 유사 이래로 가장 왕성한 중국 선교 활동이 전개되었고 교회학교와 병원과 자선사업 단체들이 우후죽순같이 새로 생겼다. 손문의 중국공화국은 장개석 총통이 이어서 발전시켰다. 그리스도교의 선교활동은 중국 영토의 절반 이상으로 넓게 확장되어 갔다.

이러한 중국 선교 전성기에 중국의 대학생들이 중국 내셔널리즘 사상을 가지고 중국에서 군림하던 서양제국의 식민정책과 국교(國交)의 불평등한 조약과 그리스도교 선교를 반대하기 위한 강력한 조직을 만들어 전국적으로 운동을 개시했다. 그들의 운동은 많은 정치인들과 학자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심지어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지지를 받기도 하였다. 이 운동은 중국의 각급 학교의 교육권을 서양인들로부터 빼앗고자 하였다. 그들은 서양 선교사들을 살해하고 교회학교와 교회당을 파괴하였다. 장개석 총통은 그들의 운동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학교가 그리스도교 전도의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도록 하고 학교에서 외래적인 것을 줄이게 하였다. 1925년 5월 30일에 중국 교회협의회와 그리스도교 대학생 단체들도 그 운동에 대하여 동정적인 태도를 표명했는데 영국 군인 한 사람이 대학생 데모군중에 총을 쏘아 해산시키려다가 한 학생이 총살되어서 형세가 아주 불안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스도인 대학생들도 서양나라의 식민정책과 수교조약의 불평등을 철폐하라고 성명을 발표하면서 중국의 교육권을 중국인이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무렵에 중국에 공산주의 사상이 젊은 대학생들 사이에 침투해 있었는데 그리스도인 대학생들 중에도 공산주의에 유혹된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게 하여 중국의 그리스도교 선교의 전성시대가 서서히 지나가는 듯 하였다. 너무 과열된 선교가 오히려 중국인들의 자존심을 자극했고, 서양 식민국가들의 선박에 편승하여 길을 튼 로마가톨릭 선교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선교운동도 같은 오해를 받았다고도 볼 수 있다. 아무튼 중국에서 그리스도교가 서양 국가들의 식민세력과 동일시 된 것이다. 서양 국가들과 그리스도교 선교가 모두 동양의 정치혁명과 문화혁명을 통하여 현대화를 이룩하고자 한 것만은 사실이며, 중국인들도 그것을 굳이 반대할 생각은 없었지만 자기들의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자존심을 잃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중국의 프로테스탄트 선교회가 무수했는데 서양 모교회들의 교회분열이 심했고 그들의 선교가 자파 교파의 이식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중국에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일기 시작하자 중국에서 선교하던 같은 종파의 선교회들이 연합하기 시작하여, 수 개의 감리교 선교회가 하나의 감리교회로 개편되고 개혁파교회와 루터교회도 각각 하나의 개혁파교회와 하나의 루터교회로 연합하였다. 이 같은 교파연합에는 1910년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의 영향도 있지만 중국의 정세 변화의 영향이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중국에서는 그리스도교 서양선교의 종막이 내리워졌다.

2. 일본 선교

1859년에 일본의 도쿠가와(德川) 장군의 정부가 미국과 수교하게 되어 미국 정부의 대사로 온 T. 하리스(Harris)가 미국인들이 일본의 항구들에 거주하는 동시에 그곳에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하는 허가를 얻어냈다. 그러나 선교의 자유를 정식으로 얻은 것은 1873년 일본의 명치유신(明治維新) 이후였다. 그런데 미국 교회의 선교사들이 그 전에 일본에 들어왔었는데 1859년에서 1869년 사이에 미국 감독교회와 장로교회와 개혁파교회와 자유침례교회 등이었다.

이 선교사들은 처음에 일본인 학생들에게 영어와 함께 성서공부반을 만들어서 가르쳤다. 미국 감독교회 선교사 차닝 윌리암즈(Channing Williams)는 1866년에 최초의 일본인 개종자들에게 세례를 주었다. 개혁파교회 선교사 J. G. 발라그(Ballagh) 목사는 1872년에 9명에게 세례를 주고 바로 교회를 시작하여 ‘일본 그리스도 교회’라고 불렀다. 그리고 발라그 목사가 당분간 그 교회 목회자가 되었고 기본신조 9개조를 정하였고 신자들이 다스리는 회중교회 제도를 만들었다. 그리고 서양 교파에 속하지 않는 순전히 일본인교회로 만들었다. 이 교회는 교회의 급성장을 위한 대중운동을 하지 않고 소수 회원들의 자각적이고 자발적인 성장을 지향하였다.

1871년 L. L. 재인즈(Janes) 대위가 구마모도(態本)에 군인학교 비슷한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실시했는데 직접적으로 그리스도교 진리를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1876년에 35명의 학생들이 하마모까 산에 올라가서 그리스도에게 충성을 서약하였다. 그들은 일본국가를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해방시킬 것을 약속하였는데 일본애국정신과 그리스도신앙의 결연이었다.

1876년에 일본 정부가 홋카이도(北海島)에 농업학교를 세우면서 미국 매사추세츠 농과대학 교수 W. S. 클라크(Clark) 박사에 1년 동안 교장의 임무를 맡기면서 초빙하였다. 클라크 박사는 학생들에게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르쳤다. 그의 인격과 신앙에 감화를 받아 첫해 입학생 15명이 다 세례를 받았고 그가 그 학교를 떠난 후에도 그의 감화로 학생들이 많이 신자가 되었다. 그런데 교파 없는 교회로 시작한 일본 교회의 이상이 무산되기 시작하였다. 일본인 전도자와 신도들 중 일본에 들어와 있는 서양 교파 교회들의 도움을 받고 교회를 세우기 시작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유럽 교회들의 선교단체들도 들어와서 자파의 교회를 세웠다. 초기 일본 그리스도교 교인들은 학생들과 상류층의 지식인들이 많아서 봉건주의 일본 사회를 미국과 같은 민주국가와 시민사회로 혁신하려는 운동이 있었고, 또 일본혁명운동의 선봉에 일본 교회를 내세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이와 같은 이상의 실현이 어렵게 되어 간 까닭은 서양 교회 교파들이 선교의 처녀지인 일본 땅에 난립하여 교파 경쟁이 생기고 일본 그리스도교의 통일이 어려워져 그리스도교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이 무렵 미국에서 왕성해져 간 부흥운동이 해외 피선교지들에서도 일기 시작하였는데 일본에서는 1884년에 교토(京都)의 도지샤(同志社)대학에서 대중신앙부흥운동이 일어나서 학생 200여 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 대학은 곧 잠잠해지고 학업이 진행되었다. 한때의 정열이 일본인 개종자들에게는 곧 그들의 지성 속에 잠겨버리는 것이었다. 이때 일본의 모든 선교단체들이 부흥운동을 추진하여 수천 명의 사람들이 부흥집회에서 회심하였다. 집회는 옥외에서 열렸고 학교와 극장에서도 열렸다. 젊은 학생들도 많이 회심하여 교회와 교인 수가 많이 불어났다.

개교회 교인 수는 이때 40명에서 100명 내외였다. 선교사들이 세운 학교가 많아졌다. 부흥집회만으로 교회를 성장시킬 수 없었다. 가정과 그리스도교 학교에서 성서공부를 실시하였고, 일본어 성서가 번역되어 출판되기 전에 중국어 성서를 가지고 공부하였고, 선교사들이 일찍부터 신학교를 세워서 일본인 목사와 남녀 전도자를 양성하였다. 무엇보다도 교회가 세운 각급 학교가 교회부흥과 성장에 매우 큰 공헌을 했다. 그리스도인 교수들과 선생들이 전도에 협력했다. 초기 일본 교회 성원은 장년들보다 학생들이 많았다.

이러한 교회 성원의 성격을 가진 일본 교회는 사회운동과 정치운동과 그 밖의 영역의 많은 유능한 지도자들을 배출하였다. 니지마조(新島襄)는 그리스도교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기 위하여, 외국으로 나가는 것이 엄금되어 있던 이때 하코다데 항에서 몰래 배를 타고 미국으로 가서 안도바(Andover)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세례를 받고 목사안수까지 받았다. 그리고 1874년에 일본으로 돌아와서 그리스도교 복음을 가르치는 학교를 세우려는 뜻을 가지고 선교사들의 재정적 도움과 지인들의 도움으로 교토에 세운 학교가 도지샤 학교였고, 이것이 성장해서 도지샤대학이 되었고 여기서 부흥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는 1890년에 사망했다.

유능한 교회지도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1)는 홋카이도의 삿포로 영주 가문의 출신이었는데, 삿포로 농업학교 교장 클라크 박사가 미국으로 떠난 후에 그 학교를 운영해 나갔다. 그의 동지들이 교회를 세우고 어느 교파와도 관계가 없는 무교파 교회를 만들고 이 교회의 목회자가 되었다. 우찌무라의 교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 성전은 하나님의 지구를 교회 좌석 바닥으로 하며 하나님의 궁창을 그 성전의 천장으로 삼으며, 그 성전의 제단은 신자의 심정 안에 두며 성전의 법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성전의 목사는 하나님의 성령이라고 하였다. 우찌무라는 자기 교회를 「무교회」(無敎會)라고 불렀는데 소위 교회가 아닌 교회이며, 어느 형틀에도 안 맞는 교회라는 뜻일 게다. 우찌무라는 유명한 성서주석가가 되어 성서주석 책을 많이 출간했다. 도쿄에서 그의 성경강해 시간에 1,000명이 넘는 청중이 모여들었다. 우찌무라의 무교회 운동은 일본에서 많은 반대를 받았고 그가 교수직에서 쫓겨나기까지 하였다.

1880년대는 일본 교회가 급성장한 시기였다. 1882년 선교사 145명, 신자 5,000명에 가까웠던 수가 6년 후 1888년에는 선교사 451명과 교인 25,514명이 되었다. 이러한 때 일본의 교회가 일본인의 교회가 돼야 한다는 일본 내셔널리즘 사상을 부르짖고 나온 사람들이 있었다. 이 사상의 강력한 지도자는 장로교 목사 마사키사 우에무라(上村)였다. 그는 일본 교회는 일본인이 자주적으로 인도해가야 하며, 일본 전도는 일본이 해야 할 것이며, 일본 교회는 선교사의 원조를 받지 않아야 한다고 했는데, 이러한 주장은 일본 교회의 내셔널리즘이라기보다 이미 서양선교학자들이 주장하던 자전(自傳), 자치(自治), 자립(自立)의 본토민 교회 성장정책이었다. 이 정책은 중국과 한국에서도 논의된 것이었다. 1877년에 일본에서 선교하던 미국의 세 장로교 선교부가 그들이 세운 세 교회를 연합해서 「일본 그리스도 일치교회」를 만들었는데 우에무라는 그 교단에서 떠나서 동경신학원을 세웠다. 일본에서 선교하던 영국성공회 계통의 세 교회가 하나가 되어 「일본성공회」라는 하나의 교단을 만들고 영국성공회의 교리를 지키면서도 영국성공회로부터 완전히 독립하였다. 이러한 일본 교회 독립운동으로 일본의 외래 선교사들이 줄어들게 되었다.

일본국가는 정식으로 일본 교회의 신교와 선교의 자유를 보장하였으므로 17세기 로마가톨릭교회 선교가 받은 것과 같은 박해는 없었다. 그러나 일본에는 역시 불교의 교세가 가장 크고 불교의 문화가 국민생활에 깊이 뿌리박고 있어서 그리스도교 선교운동의 성과는 제한되어 있었다. 그리고 일본의 신도(神道)는 신사를 모든 지방에 세우고 죽은 황제들과 순국병사들을 예배하는 국가종교가 되어 있어서 일본 국민들은 그 신사에 참배하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국가 관리들이 그리스도교 학교들을 괴롭히고 교회의 활동과 집회에 간섭하면서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국가에 대한 충성을 의심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생활 하기 힘들었고 교회의 성장도 어려웠다.

1912년 2월 25일 신도와 불교와 일본의 그리스도교회의 「3대 종교회의」가 열렸다. 이 회의 2~3일 전에 일본 정부의 부수상이 정부의 결정을 발표하였다. 그 발표의 요지는 일본 정부가 그리스도교를 일본의 한 종교로 인정한다는 것과 일본 그리스도교가 좁은 테두리에서 벗어나서 일본국가의 정책을 수용하여 일본의 정서와 관습을 따름으로써 더 큰 성취를 보기를 바란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3대 종교회의의 선언문의 내용은 ‘우리 세 종교는 정부의 권위를 인정하고 각 종교의 권위를 존중하며, 국가의 도덕률을 향상시키고 민중의 기강을 개선시키며, 각 종교의 본래의 신조를 보존하며 서로 간섭하지 말고, 일본제국의 영예를 보존하여 시대의 발전에 기여하자는 것’이었다. 이 세 종교의 성명을 읽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열광적으로 환영하였으나 지혜로운 교회지도자들은 이 세 종교 운동을 외면하였다. 이 세 종교 운동이 일본의 그리스도교를 애국종교로 만드는 것이어서 그리스도교 진리에 위배되는 일본 국수주의의 시종이 되기 쉬운 위험이 있었다. 일본성공회 감독 모토다는 신사참배는 죽은 순국영웅들에 대한 존경의 표시이므로 신앙양심의 자유에 저촉되지 않는다고 말했으나 그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일본 교회는 애국과 충성 문제로 분열이 시작되어 교회 성장과 선교에 차질이 생기게 되었고, 또 다른 한 문제는 독일신학의 소개로 인한 신학의 자유파와 보수파 간 논쟁이었다. 신학사상에 관한 서적들이 신속히 번역되어 널리 보급되면서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신학지식이 크게 신장되었고, 일반 그리스도교 교양서적과 역사서적도 신속하게 번역되어서 일본 그리스도인들은 물론이고 지식층의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서적들을 읽고 교양과 상식의 자료로 삼았다.

일본 그리스도교는 대체로 애국적 교회가 되어서 1903년 일본이 러시아와 전쟁을 시작했을 때 무교회 운동가 우찌무라 외의 다른 일본교회 지도자들이 그 전쟁을 지지하고 협력하였다. 종전 후 일본 황제는 일본 교회의 협력에 감사하는 표시로 일본 교회의 YMCA에 사례금을 보냈다. 1901년에서 1904년에 이르는 일본 전도운동의 표어는 「그리스도를 위한 우리나라」(Our Country for Christ)였는데 전 일본의 복음화를 목적으로 하였다. 일본 교회는 일본국가의 식민정책에 대하여도 관심하지 않고 국가 정책에 순응할 뿐이었다.

일본 교회 안에 일본인의 도덕적 쇄신과 생활개선을 위한 사회정화운동으로 복음을 일본 국민의 생활 속에 심으려는 운동이 있었는데, 그것은 가가와 도요히꼬(賀川豊彦) 목사가 지도한 「하나님 나라 운동」이었다. 그는 불우한 가정에서 태어나 가난과 질병과 절망에서 헤어나와 그리스도인 목사가 된 사람이었다. 그는 고아원을 비롯한 많은 사회사업을 경영하였고 거리에 나가 북을 치면서 동료들과 함께 금주운동을 벌였고 공창폐지운동도 전개했다. 그리고 자연과학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전도설교를 하면서 일본만이 아니고 외국에도 다녔다. 그의 저서 「사선을 넘어서」는 많이 읽힌 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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