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화투쟁
로마가톨릭교회가 계몽주의운동과 종교개혁 운동에 대항하기 위하여 「트렌트 공회」 (1545~1563)를 소집하여 자체 교회의 부분적 개혁과 함께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전통을 더 강화하고 수호하였다. 이것은 제 16세기 이후의 유럽에서 무성했던 민주주의와 과학의 발달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투쟁이었다. 특별히 18세기 말의 프랑스혁명 이후 자유사상과 물질주의사상이 팽창하여 불신시대가 된 것이 로마가톨릭교회의 신앙과 교리의 위기로 인식되었다.
더구나 나폴레옹이 1801년에 프랑스를 통치하기 시작한 후 천 년의 관례를 깨고 교황의 황제대관식 집행을 저지하고 자기 손으로 왕관을 머리에 얹어 황제가 된 후에 로마 교황 피우스(Pius) 7세와 조약을 맺고 교황이 자기 정책에 순종하게 했다. 이것은 교황이 종전처럼 유럽의 국제정치에 간여하는 길을 막는 것이어서 피우스 7세는 그 조약에 불복하였다. 나폴레옹은 군대를 로마로 보내서 교황을 투옥하고 교황청이 소유했던 영토의 대부분을 몰수하였다.
나폴레옹이 유럽 정복 전쟁에서 실패하고 물러난 후 피우스 7세는 실추되었던 로마교황청의 권력을 회복시키게 되었다. 유럽의 여러 나라의 정치가 나폴레옹의 몰락을 계기로 보수주의로 전향하게 된 경향이 교황에게 유리하였다.
피우스 7세는 현대과학문명과 무신론 사상에 정면대결하기 위하여 이성적인 현대인들에게 큰 충격을 줄 만한 교리를 선포하였다. 그것은 로마가톨릭교회의 오래된 민간신앙으로서 신학적으로도 문제가 되어 온 성모 마리아의 무흠수태 교리였다. 성모 마리아는 모든 사람이 아담의 죄를 물려받아 세상에 태어나는 원죄와는 상관없이 첫 번째의 회임 때 예수를 배태해서 예수가 원죄 없이 탄생했다는 교리였다. 피우스 7세는 이 교리의 선포로써 교회에는 사람의 이성이나 과학적 상식이 알 수 없는 초자연의 신비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것이었으나, 가톨릭교회 바깥 세상에서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가톨릭교회는 교황 무오의 교리가 있기 때문에 이의 없이 수용하였으나 일부 가톨릭교회 신학자는 이 교리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다.
교황 피우스 9세는 과거에 만들었던 오류목록을 증보하여 1864년에 발표하여 가톨릭의 신앙과 교리에 위배되는 불신사상을 저지하기 위한 문화투쟁을 강화하였다. 특히 만연되어 가던 개인의 양심과 예배의 자유, 교회와 국가의 분리, 교회의 일반교육권 박탈(교회가 세워서 경영하던 사립학교 폐지), 결혼 절차의 국가 관장, 교회 교권을 억압하는 국가의 권력 등등이 오류의 요목들이었다.
2. 제1차 바티칸 공회와 교황무오교리
역대 교황들 중 가장 오래 집권한 교황 피우스 9세(재위 1846~1878)는 로마가톨릭교회의 모든 교리와 결정의 보장을 위하여서는 교황의 권한 강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여 면밀한 계획을 세우고 1869년에 「제1차 바티칸 공회」를 열었다. 이 회의에 참석한 700명의 감독들은 그와 그의 보좌관들의 설득을 받아 교황의 결정과 교권행사에는 오류가 없다는 교황무오교리를 1870년에 확립하였다.
교황무오교리의 1, 2장에서는 로마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천국의 열쇠를 위임받고 교회의 초석이 된 예수의 수제자 베드로가 세운 교회이므로 세계교회의 머리라는 수위성(首位性)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3, 4장에서는 교황의 무오성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대리자이며 지상의 교회의 머리이며 모든 그리스도인의 아버지이며 스승인 로마 교황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세계교회를 지배하며 먹이며 다스릴 전적권력을 주셨다, 그리하여 로마 교황이 모든 그리스도인의 목회자와 신학자로서의 직책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전체 교회가 지켜야 할 신앙과 도덕에 관한 교리를 그의 교좌(敎座)에서 선언하는 일에 있어서 그에게는 과오나 오류가 있을 수 없다고 베드로가 그에게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교황이 결정하여 선언하는 것은 교회회의의 합의로도 수정할 수 없다, 라고 천명했다.
교황무오교리는 신앙과 도덕 문제에 국한된 것이지만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신학적 비판이 상당히 컸었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가 역대 교황들에게 맡겨서 판단하고 선포하였다는 것만으로는 교황의 결정이 무오하다고 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리하여 신앙과 도덕 문제가 다 성서와 관계되는 것이어서 교황이 성서해석의 최후의 판정자가 되어 그의 성서해석에는 오류가 없다는 조건이 필요하였는데 로마 교황들은 이미 성서해석 문제의 최고의 판결자 역할을 해왔었다.
피우스 9세가 교황무오교리를 선포한 바로 그 해에 그의 무오의 교권 발동의 종지부가 찍혔고 교황청 영토였던 로마 시는 이태리의 신생 왕국의 수도가 되어버렸다. 이태리의 모든 주의 영주들이 연합하여 이태리 왕국을 수립하였고, 이태리의 왕 빅토 임마누엘이 1870년에 교황청 소속 영토 대부분을 이태리 국토로 만들었고 이태리 국민들에 군림해 왔던 교황의 권한을 저지하였고 이태리 국민들도 찬동한 바가 되었다. 로마교황청의 국가와의 투쟁이 다시 시작될 조짐이었다.
로마교황청은 AD 410년에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시가 북방 고트족의 침략으로 함락된 후 로마시의 시정과 시민의 생활 및 후생을 책임지게 된 이후로 이태리의 정치와 외교 문제를 관장하다시피 하였고, AD 800년에는 신성로마제국과 정교일체 관계를 맺었으며, 19세기 초 나폴레옹의 등장까지 무려 1,400년 동안 유럽의 국제정치에 깊이 간여해 왔었다. 그러나 이제 이태리 본국민의 왕권에 밀려 로마교황청의 세속적 정치권력 행사의 종막이 내린 것이다. 그리하여 로마 교황은 좁은 바티칸 영토로 작은 국가를 만들어 독립적으로 다스리기 시작했고 동시에 로마가톨릭교회의 최고의 감독을 겸하여 교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교구는 세계적인 판도를 가진 제일 큰 교파이며 그의 교권은 그리스도교계의 어느 감독이나 주교보다도 강력한데, 로마가톨릭교회의 수위성과 교황무오교리가 그 힘이 되었다.
성모 마리아의 몽소 승천
로마가톨릭교회 문화투쟁의 보다 적극적인 방법의 하나로 마리아의 무흠수태와 교황무오교리 외에 또 다른 한 교리, 곧 성모 마리아의 승천 교리를 교황 피우스 12세가 1950년에 교서로 발표하여 현대 사회를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다. 이 몽소승천(蒙召昇天) 교리는 성모 마리아의 시체가 무덤에서 썩지 않고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이다. 성모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고 원죄 없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잉태하여 탄생케 하였고, 따라서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그를 팔에 안고 또 가슴에 품고 젖을 먹여 키웠는데, 그가 육신적으로 죽어서 서로 이별하였으나 영혼으로는 하나였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지 않을 수 없었던 만큼 마리아의 아들로서 어머니를 또한 영화롭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의 능력으로 어머니가 무덤에서 썩지 않게 보존하신 것이라고 이 교리를 만든 이유를 설명하였다. 이 교리의 선언으로 그동안 성모 마리아의 수태와 예수의 원죄 유무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된 논란이 끝나게 되었다.
3. 제2차 바티칸 공회
교황 요한 23세는 1962년에 「제2차 바티칸 공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새 교리를 만들어 선포할 생각은 없었으나 마리아의 몽소승천교리에 대한 신학적 논란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교리를 그대로 수용하기로 하였다. 그는 현대 사회가 로마가톨릭교회에 혁신적인 시책을 요청함을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급변해 가는 사회 속에서 로마가톨릭교회가 시행해야 할 실천적인 사항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 공회를 개최하였다. 특히 요한 23세는 역사적인 숙제였던 희랍정교회와의 화해와 일치 문제와 영국성공회와의 관계 개선 문제와 그 밖의 개신교회와 친선과 협력의 필요성을 인식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 모든 교회가 이번 공회에 정식으로 대표를 파송하여 참관하여 줄 것을 요청했다. 요한 23세는 이 공회의 첫 회기를 끝내고 죽고 바울 6세 교황이 그를 계승하여 공회를 이끌어 갔다. 이 공회에 제출된 14가지 의제는 가톨릭교회의 자체 개혁을 위한 것이 대부분이고 여타의 의제는 그리스도교의 다른 교파들과의 화해와 친선과 협력에 관한 것들이었다. 이 공회에서 얻은 결과의 주요한 것들을 아래와 같다.
1) 성모 마리아의 승천의 교리가 신학적인 토론거리가 되었으나 교황은 보수파의 편을 들어 수정하지 않았다.
2) 프로테스탄트 교회가 성서를 하나님의 계시의 유일한 근원이라고 주장한 데 대하여 가톨릭교회는 전통과 동등하게 성서도 계시의 근원이라는 종전의 입장을 재확인하였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전통을 제외하고 있다) 그러나 계시의 근원은 둘이 아니고 하나라는 것을 인식시켰다. 그리고 가톨릭교회가 성서의 역사적 해석방법을 반대하여 왔으나 이제 그 방법을 허용하여 성서에 있는 역사적 또는 문자적 오류의 지적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성서가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이라는 것에는 오류가 없음을 천명하였다.
3) 미사를 비롯한 여러가지 성사의 의식을 부분적으로 개혁하였다. 종전에는 미사가 성체성사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의 제물이 된 것을 드높이는 의식이 되었으나 앞으로는 구속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의미를 살리는 것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다. 성체성사(성만찬)가 예수가 제자들과의 만찬에서 떡과 잔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했던 것을 되살리려는 것이 되게 하는 것이었다. 초대교회는 이 의식을 유카리스트 곧 감사라는 말로 표현했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 한 번 자기 육신을 희생제물로 바친 것인데 미사의 성체성사로 그의 희생이 반복되는 것이 되게 하는 것을 프로테스탄트 신학이 비판하여 왔었다.
4) 로마 교황의 무오 교리에 대한 비판이 있었으므로 교황청에 주교회의를 신설하여 주교들의 행정권을 확대시켜서 교황의 권한이 제한 또는 분산되게 하였다. 그 밖의 교황청 기구의 개혁도 있었다.
5) 교황청에 평신도국을 신설하고 평신도가 교회 일에 참여하고 봉사하게 해서 평신도의 위치를 격상시키기 위하여 「평신도의 사도성」이라는 새 용어를 만들었다. (이 용어는 종교개혁자들에게서 나왔다)
6) 과거에 로마가톨릭교회가 개신교를 이단으로 치부하였으나 「갈라진 형제들」이라고 불러왔는데 이번 공회에서는 개인의 인권과 신앙의 자유 문제를 깊이 있게 토론하고 종교선택의 자유를 인정하는 결의를 하였다. 그리하여 로마가톨릭교회 밖의 모든 그리스도교의 교파를 가톨릭교회와 같은 「참된 교회」로 인정하고 개신교회와의 친선과 일치를 희구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개신교의 세례교인이 가톨릭으로 개종할 때 그가 받은 개신교의 세례를 인정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가톨릭 교인과 개신교 교인 사이의 결혼도 인정하기로 하였다.
7) 인권의 존중과 종교 선택의 자유를 인정하면서 타 종교도 관용하기로 하였다. 특히 유대인과 유대교를 정죄하지 않기로 하였다. 그들이 예수를 죽인 죄를 추궁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가톨릭교회는 이슬람교와 유대교와의 대화를 비롯하여 공산주의와의 대화도 시도하기 시작하였다.
8) 교황청에 「일치국」을 신설하여 가톨릭교회가 개신교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동참하여 협력하는 길을 만들었다.
9) 「현대사회 속의 교회」라는 교황의 교서에서 교회가 전쟁과 평화 문제를 비롯하여 빈곤, 사회정의, 경제정의 등등의 문제 해결을 위하여 관심 갖고 참여할 것을 강조하였다. 산아제한 문제는 보류하고 피임은 반대하기로 결의했다.
제2차 바티칸 공회는 모두 16종의 결의안을 통과시켜 가톨릭과 현대 사회와의 거리를 좁히고 가톨릭이 사회 문제에 참여하는 동시에 개신교 및 타 종교와 화해하고 협력하는 길을 터놓았다. 그리고 교황 바오로 6세는 세계평화운동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U.N. 본부를 방문하고 연설하였다. 그리고 미국을 방문한 기회에 미국의 흑인차별 철폐를 촉구하였다. 이처럼 이번 바티칸 공회 이후로 로마가톨릭교회는 현대 사회에 대하여 문을 열고 무슨 문제든지 관심과 간여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교황청의 「일치국」의 비서 베아(Bea) 추기경은 개신교의 세계교회협의회(WCC) 본부를 방문하여 친선과 협력을 약속하였고 WCC의 「신앙과 직제」 연구위원회의 회원이 되어 그리스도교의 일치 문제를 광범위하게 연구하고 토론하게 되었고, WCC 총회 안의 여러 부서에 정식 참여해서 협력하게 되었다.
아무튼 이제는 로마가톨릭교회가 유일한 참된 교회라든가 로마가톨릭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주장을 버리고 그리스도교의 일치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비한 몸에 있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