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71)

조선(한국) 선교 - 프로테스탄트 선교




2. 프로테스탄트 선교

귀츨라프의 선교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로서 최초로 조선을 방문한 귀츨라프(Gutzlaff)는 유대계 독일 출생이다. 그는 네덜란드의 개혁파교회 선교회에 가입해서 동양선교의 꿈을 가지고 1826년에 출발하여 황해 해안의 상하이와 천진 등지를 항해하면서 선교지를 찾았다. 그가 영국의 동인도회사에 속하여서 한국, 일본 및 오키나와 지방을 순방하는 무역선 로드 암허스트(Lord Amherst)호를 타고 통역관으로 출항하였다. 그 회사가 요청한 것은 영국과 통상할 만한 적당한 항구를 조사하면서 그 지방의 관리와 민간인들의 통상에 대한 관심을 알아보는 일이었다.

귀츨라프는 마카오에서 영국 선교사 모리손 목사 집에 머물면서 그의 선교사역에 대해 듣게 되었고 그에게서 중국어 성서와 전도문서를 얻었다. 그는 1832년 2월 27일에 광동을 떠나 상하이와 산동반도 지역을 거쳐 7월 17일에 황해도 서해안 장산곶 부근에 기착하였다. 그는 그곳의 한 노인과 중국어로 대담하고 성서와 전도문서를 전하였다. 그러나 그는 그 지방관청 관리나 정부와 접촉하지 못하고 떠났다. 그 지방 사람들이 서양나라와 접촉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받은 책을 돌려주기도 하면서 그를 지방관청으로 인도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귀츨라프는 거기서 떠나 충청도 홍주만 고대도(古代島) 앞에 정박하여 머물면서 그곳의 지방 관리를 만나서 그들을 통하여 조선 왕 순조(純祖)에게 보내는 교역청원서를 전하고 성서와 서양 과학기물을 선물로 같이 보냈다. 국왕의 회신을 기다리는 동안 귀츨라프는 성서와 전도문서를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고, 가져간 감자씨를 주면서 심어 기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약품을 나눠 주어 호감을 사기도 했다. 그러나 순조는 8월 9일 통역관을 대동한 홍주목사 이민회(洪州牧師 李敏會)를 귀츨라프에게 보내어 통상을 거절하는 동시에 성서와 선물을 돌려주었다. 이유는 중국의 황제의 허락 없이는 서양나라와 조선이 수교하거나 통상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귀츨라프는 약 한 달 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식량보급도 받고 무사히 지내다가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떠났다. 그는 이 모든 일을 그의 일기장에 적어 두었던 것이다.

귀츨라프의 일기와 함께 그가 타고 간 상선 로드 암허스트의 선장 린제이(H. H. Lindsay)의 일기에 흥미로운 기록들이 있다. 귀츨라프는 그의 일기장의 조선항해기의 첫머리에서 조선을 소개하면서 일본 장군과 상당한 크리스천 군졸들이 조선에 왔다가 7년 동안의 전쟁을 끝내고 철수하였을 때 조선에 그리스도교가 소개되었다고 기록하였다. 귀츨라프가 황해도 장산곶을 떠나 충청도 홍주만으로 옮겨 와서 천주교를 아는 사람을 만났다. 린제이 선장의 1832년 7월 27일 일기에 따르면 거기서 ‘양이’라는 조선인을 만났는데 그가 한글 자모를 써 주었고, 귀츨라프가 한문으로 주기도문을 써주고 그것을 양이가 한글로 번역하여 베끼게 했다. 그런데 양이 그것을 베끼면서 귀츨라프 일행에게 자꾸 목을 베는 시늉을 했는데 자기가 관헌에게 발각되면 목이 달아난다는 것을 암시한 것일 거라고 이해하였다. 조선인들은 귀츨라프 일행이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었다고 하는데 신유박해 당시 조선의 천주교인들이 외국선교사들의 도움을 몹시 기다렸던 듯하다. 귀츨라프는 한 달 동안 머무는 동안 조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으나 반응이 없어서 안타깝게 생각하고 그의 일기장에 다음과 같은 말을 썼다.

“나는 이 금지령으로 성서의 가치가 높아졌으며 읽고자 하는 사람이 더 많아졌다고 생각한다. 이 모든 사건들을 내가 기도로써 간구한 것을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신 것으로 생각하여 감사한다. 조선에 파종된 진리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없어질 것인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주님께서 예정하신 때에 푸짐한 열매를 맺으리라. 아주 낮은 서민들도 글을 읽을 수 있고 읽는 것을 좋아하는 것을 알 때 매우 재미있었다. 그들은 다른 종교가 들어오는 것을 질투하리만치 편협한 것 같지 아니하였다. 고관들이 책을 받자 사람들은 몰려와서 책을 받았다. 이 나라에는 종교가 거의 없는 것이 명백하며 우리는 용기를 내어 복음을 전할 궁리를 하게 되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쇄국정책을 거두어 이 약속된 땅에 들어가도록 허락하실 것이다.” (1832년 7월 27일자)

토마스의 선교와 순교

대원군의 쇄국정책 시대에 두 차례의 한국 방문 끝에 순교한 토마스(Robert Jermain Thomas, 1839~1866) 목사는 한국 개신교 역사에서 최초의 순교자이다. 토마스는 영국 웨일즈(Wales)의 독립교회 목사 로버트 토마스(Robert Thomas)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에딘버러의 뉴 칼레지(New College)에서 공부했고 런던대학을 다니면서 학위를 받았다. 그는 대학 조기졸업을 요청하고 중국선교를 계획하였다. 그는 외국어에 능숙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중국어와 몽고어와 시베리아어를 배웠고 조선어도 배우려 했는데 그것이 그가 조선으로 항해하는 무역선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 통역자로 가기로 결심한 이유였을 것이다.

토마스는 1861년 4월 25일 갑자기 중국선교를 결정하였다는 편지에서 실은 자기가 5년 전 대학입학 지원서에 그 결정을 기록하였다고 말하였다. 그는 런던선교회의 선교사 지망 원서에 예수의 명령대로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다고 기록하였다. 토마스는 분명히 모험정신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뉴 칼레지 재학 시절에 친구 로버트 윌슨(Robert Wilson)이 중국선교사로 떠나는 것을 보고 감명을 받았는데 이때 뉴 칼레지에는 선교열풍이 불고 있었다. 그는 혹시 귀츨라프가 쓴 중국과 조선 방문의 기록을 읽었을지 모른다. 이때 영국과 스코틀랜드 교회에서는 런던선교회 외에는 중국선교의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토마스도 이 선교회에 지원한 것이다. 토마스는 런던선교회에서 중국선교사 임명을 받은 1863년 6월 4일에 목사안수를 받았다. 7월 21일 출발하여 부인과 함께 4개월의 긴 여행 끝에 1863년 12월 초에 상하이에 도착하여 그곳의 런던선교회 지부에 들어갔다.

토마스 목사가 상하이의 선교회 지부에서 잠시 떠나 한커우에 가서 2주 동안 있던 중에 그의 아내가 병사하였다. 그는 부인의 죽음으로 완전히 실의에 빠졌고 상심하였다고 편지 쓰면서 “내 아내는 받을 수 있는 모든 고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평화롭고 고통 없는 죽음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말하였다. 토마스는 런던선교회에 속해서 여러 선교지부로 옮겨 다니면서 중국 체푸에서 처음으로 조선인들을 만난 일이 있었다. 그들은 천주교 신자였는데 성서책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묵주와 십자가와 메달을 옷 속에 감추어 걸고 있었다고 한다. 토마스는 모험심이 있는 사람이어서 조선과 같이 위험한 곳으로 가기로 결심하였다.

토마스는 제1차 조선 방문으로 1865년 9월 4일 체푸를 떠나 1865년 9월 13일에 조선 본토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도착했다. 스코틀랜드성서공회(NBSS)가 토마스에게 여행비용 일부와 함께 다량의 성서책을 주었다. 그는 편지에서 조선 본토에 내릴 수 없어서 황해도와 평안도에 속한 서해안 어느 섬에 대여서 머문 것으로 말하였다. 그리고 같은 편지에서 조선말로 “야소교 책이 매우 좋습니다”라고 썼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토마스가 황해도 창린도 자라리에 도착했다고 기록돼 있다. 토마스를 인도한 사람은 김자평과 최선일이라고도 한다. 아무튼 토마스는 “나는 한 조선인 천주교 신자의 도움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복음의 진수 일부를 설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조선어를 익혔다”고 썼다.

토마스가 성서를 조선인들에게 배포하면서 복음을 전한 것을 밝힌 문서가 발견되었는데 한 영국인이 모래사장으로 한 뭉치의 종이를 던지고 남해를 향하여 재빨리 달아났다고 되어있다. 토마스는 편지에서 조선에서의 박해 상황을 경험하였고 이해하였다고 말하였다. 토마스는 조선인들이 외국인에게 매우 적대적인 것을 보았다. 그는 약 두 달 동안 조선에 머물다가 떠났다. 영국의 한 상인의 배를 타고 조선을 다녀갔으나 조선 서해안에 주둔한 영국 군함을 보지 못하였다고 했다.

토마스 목사의 제2차 조선 방문의 때는 고종 3년 천주교 대박해 때 프랑스 신부 3명이 처형되어 프랑스 정부가 함대를 조선 해안에 보내서 처형된 신부 세 사람에 대한 배상 청구와 함께 산속에 숨어 있던 프랑스 선교사 두 명을 구출할 것과 조선이 개항하여 무역할 것을 조선 정부에 요청하려던 때였다. 토마스의 선교모험은 때를 가리지 않았다. 1866년 8월 9일에 그는 영국 회사의 제너럴셔먼호(General Sherman號)라는 일종의 범선을 타고 조선으로 향했다. 이 배는 조선과 교역을 시작하기 위하여 실험적으로 여러가지 상품을 싣고 간 배였는데 아마도 토마스는 그 배의 항해 길잡이와 조선어 통역을 맡은 것 같다. 그런데 토마스는 조선어를 더 공부하기 위하여 조선에 다시 가고 싶다는 희망을 말한 적이 있었다. 이것은 그가 조선선교를 준비하겠다는 말이었다.

토마스 목사가 탄 배는 대동강을 타고 평양을 향하여 항해하였다. 조선 정부의 경비는 삼엄하였고 정부의 포고문이 그 지방에 전달되어 있었다.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의 공격을 받을 위험한 때였다. 그런데 상하이 신문에서는 토마스가 탄 배가 무장한 배라는 것이 기사화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항해가 상당히 위험한 것임을 알고 있었을 텐데, 상당히 낙관적이었다. 그는 두문진에 닻을 내리고 정박했다. 그리하여 그 섬의 관아에서는 수비대에게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토마스는 배에서 내려서 사람들과 관리들에게 성서책을 나눠 주었다. 그 다음 기항한 돛섬에서 토마스는 그전에 그를 조선으로 데리고 갔던 중국선원 한 명을 만났다. 토마스는 그에게 자기를 평양에까지 안내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도 응낙했다. 그리하여 무구에까지 갔을 때 중국선원들은 평양은 금지의 땅이라서 들어갈 수 없다고 하여 돌아가 버리고, 제너럴셔먼호만이 장마로 불어난 강물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그러나 이 배의 동향은 조선 중앙조정에 이미 보고되었다. 조선 정부는 문정관을 파견하여 토마스에게 그 배의 조선 입국 목적을 물었다. 그들은 무역이 목적이라고 대답했다. 1866년 8월 17일에 이 배는 주용포를 떠나 수문에 도착하여 그 지역 감사는 이지로와 신몽진을 문정관으로 임명하여 제너럴셔먼호에 파견하였다. 이 두 사람이 그 배에서 다양한 종류의 무기들(포, 총, 검 등등)을 보고 놀랐을 때 승무원들은 이 배는 군함이 아니라고 설명했다. 문정관들은 그 배가 평양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였으나 그들은 만일 평양에 가지 못하면 서울로 가겠다고 말했다. 그 배에 싣고 온 의류와 교환하자면서 쌀, 금, 인삼 등을 요구했다. 문정관들은 선원들의 생활필수품으로 쌀 두 자루와 쇠고기 30파운드, 계란 60개, 야채 20꾸러미, 그리고 장작 20더미를 교환 물품으로 제공해 주었다.

1866년 8월 20일 토마스 일행과 배는 조방리 사표구 항구에 도착했다. 강변의 주민들이 이상한 배가 나타나서 호기심으로 구경하러 모여들었고 그날이 장날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그 자리에 소년들이 있어서 토마스는 그들을 선실로 데리고 들어가서 먼저 케이크를 주어 먹게 하고 몇 권의 책을 주었다. 또 마을 사람 아홉 명이 밤에 토마스를 찾아왔다. 그 마을 이장 지달해에게 토마스는 자기는 천주교 신부가 아니고 개신교 목사란 것을 이야기했지만 그가 이해하지 못했다. 토마스는 그들에게 성서책과 다른 책들을 많이 주었고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이 새겨진 은화도 하나 주었다. 9월 23일 이 마을 사람들이 외국인과 접촉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1867년 1월 22일에 지달해와 지달수는 평양 보통문 밖에서 참수형을 받았다. 조선 정부의 문정관은 토마스 목사에게 무역을 포기하고 돌아가라고 충고하였다. 이 두 사람 사이에서는 여러가지 대화가 오고 갔다.

8월 21일 여섯 명의 승무원이 작은 배를 타고 나와 대동강의 깊이를 측정하고 나서 평양으로 향했다. 배가 도시를 향해 다가오자 사람들이 강가로 구경하러 모였다. 토마스는 그들에게 책을 나눠 주었을 것이다. 평양 감사는 제너럴셔먼호의 진격에 대비하여 만경대를 둘러싸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교역을 금하는 경고를 내렸다. 긴장감이 감돌았다. 5일 동안의 이 배의 동향의 기록이 없다. 장마가 끝나 대동강 수위가 낮아지자 조선 순시선들이 활동을 개시하고 셔먼호의 작은 배 보트가 평양으로 향해 갔을 때 그 뒤를 좇았다. 그런데 오후 6시경에 승무원들이 조선 순시선의 대장을 사로잡아 순식간에 범선에 억류하였다. 이것은 고종황제 실록의 기록(1866년 7월 22일)이다. 그러나 다른 설명은 임상형이라는 문정관이 그 범선에 접근하자 승무원들이 그를 붙들어 그가 가지고 있던 문서를 읽어보니 그 범선 승무원을 붙잡아 다 죽이라는 조선 관리의 명령이 기록되어 있어서 승무원들이 놀라서 그를 배에 억류했다는 것이다. 어느 기록이 사실인지는 별문제로 하고 승무원들이 그 문정관에게서 공식인장을 빼앗았다고 한다. 조선 공무원이 이 인장을 빼앗기면 처형된다는 규정이 있어서 순시관과 시민들이 그 인장을 돌려주라고 요구하며 소리쳤다. 그러나 그 범선 셔먼호는 계속 평양을 향해 올라갔다.

8월 28일 아침 9시에 범선 셔먼호는 발포를 시작했다. 범선은 계속 평양으로 향하면서 수위를 측정하였다. 강가에 나와 있던 사람들이 체포한 이현익을 풀어 주라고 소리치면서 돌을 던졌다. 다섯 명의 승무원들이 작은 배를 타고 수위를 재고 있었을 때 군인들이 활과 총을 쏘았다. 이렇게 하여 싸움은 점점 커졌다. 군인들과 사람들이 범선에 올라가 이현익을 구출하였다. 범선 승무원은 화가 나서 더 난폭하게 민간인들에게 대포와 총을 발사하였다. 식량과 장작이 떨어졌을 때 범선 선원들은 민간 선박을 공격하고 식량과 장작을 빼앗았다. 그리고 민간인 7명이 죽임을 당했고 5명이 부상을 입었다.

셔먼호의 대포와 총소리는 조선인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평양 감사 박규수는 중앙조정에 보고문을 보내어 대책을 요청하여 마침내 셔먼호를 격파하고 승무원을 다 죽이라는 명령을 1866년 9월 3일에 내렸다. 싸움이 2주간 계속되었다. 조선의 군비와 무기는 빈약했다. 조선 군인들과 민간인들이 필사적으로 싸웠고 평안도, 황해도, 함경도의 사냥꾼들도 싸웠다. 셔먼호는 식량 부족과 포탄과 탄환 부족으로 싸울 수 없어 후퇴하다가 물이 빠져나간 강의 진흙바닥에 좌초하였다. 그리하여 박규수가 특별작전을 써서 군대를 이끌고 셔먼호에 탔던 사람들을 모조리 죽이고 배를 불태웠다. 토마스 목사는 불타오르던 뱃머리에 모습을 드러내고 살려줄 것을 외쳤지만 사람들이 그를 묶어서 끌어내어 죽였다. 선원 24명이 다 죽었다.

토마스 목사는 통역인으로 고용되어서 자기의 선교목적을 이루고자 하였으나 셔먼호의 선장과 일행의 목적은 무역이었다. 그런데 그들의 교역을 위한 수단으로서는 오만하여 대동강 강변의 주민과 평양 주민들의 호감을 사지 못하였다. 조선정부 군인 이현익을 붙들어 두고 무역교섭의 인질로 삼으려 한 것이 큰 실책이었다. 평양 감사 박규수(朴珪壽)는 개화주의의 실학파 박지원(朴趾源)의 손자로서 셔먼호의 평양 입항을 처음부터 반격할 생각이 없었을 수도 있지만 셔먼호의 난폭한 포격과 총격이 그의 분노를 살 만했던 것이다. 토마스의 선교여행은 그 당시 중국과 한국의 쇄국정책 아래서는 있을 수 있는 모험이며 동시에 목숨을 거는 일이었는데 토마스는 그 모험을 자취한 것이었다. 우리는 그의 선교동기와 용감한 선교행위를 보아서 순교자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는 바울의 교훈대로 때가 좋든 나쁘든 가리지 않고 선교한 것이고, 전도자의 말대로 바람이 지나가거나 구름이 걷힐 때를 기다리지 않고 씨를 뿌리고 단을 거두어들이려 하였다.

이응찬의 개종과 만주 한글성서 출판

1862년에 만주 선교를 시작한 스코틀랜드 장로교가 파송한 존 맥킨타이어(John MacIntyre)와 존 로스(John Ross) 목사가 1872년에 만주에 와서 선교하면서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로스는 고려문(高麗門)을 방문하여 조선 상인들을 만나 그들에게 한문 신약성서 책을 주었는데 그가 백홍준(白鴻俊)의 부친이어서 그 성서 책을 같이 읽었을 것이다. 로스는 고려문을 다시 방문하고 1876년 3월에 강화도조약이 맺어진 것을 알고 조선 선교의 가능성을 보았다. 로스는 조선의 의주 상인 이응찬(李應贊)을 만나 조선어 선생으로 삼았고 그의 도움으로 1877년에는 한국 선교사를 위한 「한국어 교재」(Corean Primer)를 발간했다. 이때부터 로스는 한글 성서번역을 시작하여 이응찬과 한두 명의 한국인의 도움으로 1878년 봄에 요한복음과 마가복음이 출판되었다.

서상륜(徐相崙)과 서경조(徐景祚) 형제가 만주에서 인삼장사 하다가 맥킨타이어 목사를 만나 전도를 받았고 로스 목사를 만났다. 로스는 서상륜의 도움으로 누가복음을 한글로 번역했다. 1879년에 백홍준과 이응찬과 그 밖의 4명의 한국인이 맥킨타이어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았는데 이들이 최초의 한국인으로 개신교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고 최초의 한국인 신앙공동체를 만든 사람들이었다. 맥킨타이어 목사를 찾아와서 개종을 결심하고 성서번역을 적극적으로 도운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이름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백홍준은 세례를 받고 전도인이 되어 의주로 돌아와서 의주교회의 초석이 되었다. 선교사를 도와 성서를 번역한 한국인들은 성서를 번역하면서 그리스도교의 진리를 터득하여 향후의 국내 전도를 준비한 사람들이었다.

신약 번역이 1877년에 시작되어 10년 후 1887년에 비로소 「예수셩교젼셔」가 출판되었고 이제부터는 한글성서를 배포하여 전도활동을 가속화하여 교회를 설립하는 일이 시작되었다. 1882년 3월에 로스 목사는 성서배포가 자유로운 한인촌을 대상으로 배포를 시작하였고 식자공(植字工)인 김청송을 최초의 전도사 겸 권서(勸書)로 삼아 파송하였다. 그의 권서와 전도활동으로 그의 고향 집안(輯安)을 비롯하여 널리 한글성서와 전도책자가 배포되어 많은 개종자가 생겼다.

로스는 동료 선교사 웹스터(J. Webster)와 한인촌을 방문하여 1884년 11월에 4개의 마을에서 75명에게 세례를 주었다. 로스는 28개의 한인촌을 여행하며 전도하고 많은 한인들에게 세례를 주어 만주에서 한인교인의 수가 급증하여 1884년 말(이해에 의사 알렌이 한국에 처음으로 들어왔다) 세례받은 100명과 세례 요청자 600명이 있었다. 이렇게 하여 만주에서 한국인 복음화가 먼저 이뤄졌다.

의주 지방은 1879년부터 백홍준의 전도로 개종자가 생기면서 성경이 필요하게 되었다. 1882년 누가•요한복음이 간행되자 수출하는 폐지 속에 제본되지 않은 복음서 낱장을 끼워 밀반출하였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부족하여 1882년 10월 서상륜이 대영성서공회의 최초의 한국 권서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개신교의 전도가 묵인되어서 서상륜은 다량의 복음서를 3개월 동안 배포하고 목적지 서울로 출발하였다. 서상륜을 이어 철산(鐵山) 출신 제4 수세자가 1883년 여러 마을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였고 동민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받았다. 이 무렵 의주에서는 백홍준이 요리문답반을 만들어 지도하였다. 1885년에는 의주에 적어도 18명의 신자가 교회를 형성했다. 이 해는 한국의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목사가 인천에 도착한 해다. 1883년에는 평양에도 복음서가 배포되었다. 최초의 권서 김청송에 이어 두 번째 권서가 모친 위독의 소식을 듣고 평양으로 오면서 가져온 약 1천 권의 누가•요한 복음서를 판매할 수 있었다. 서상륜은 이때 반입한 성서 400권을 받아서 서울로 와서 6개월 동안 성서를 배포하면서 전도하였고 로스 목사는 서상륜에게 더 많은 성서를 보내 주어 전도를 도왔다. 서경조도 전도해서 세례 요청자들이 많아졌다. 그리하여 이들 중에 언더우드 목사에게서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 많았다.

이렇게 하여 한국의 개신교 선교는 만주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거기서 한국선교의 준비로서 성서가 번역, 출판되어 한국에 반입되어 배포되었고, 백홍준의 전도로 의주에서 먼저 교회가 설립됨에 따라 한국 교회는 한국에 선교사들이 입국하기 전에 이미 자전(自傳), 자립(自立) 교회로서 출발하게 된 것이 금후 한국 개신교의 요람이 되었다.

이수정의 개종과 일본 한글성서 출판

이수정(李樹廷)은 1882년 9월에 일본수신사 박영효의 비공식 수행원으로 일본에 갔는데 그의 목적은 일본의 선진문화를 연구하는 것이었다. 그는 일본에 가서 기독교인 농학자 쯔다센(津田仙)을 만나 기독교에 관한 대화를 나누었고 한문성서 한 권을 얻었다. 이수정은 한국의 천주교에 대한 상당한 지식을 이미 가지고 천주교 서적을 읽은 사람이었다. 그는 쯔다센을 만난 후 기독교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성서를 연구하였다.

이수정은 그 이듬해부터 나가다(長田時行)의 지도로 성서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여 불과 몇 개월 만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아들이고 개종하였다. 그리하여 미국 장로교 선교사 녹스(G. W. Knox)에게서 1883년 4월 29일 주일에 일본인 야스가와(安川) 목사의 입회 하에 세례를 받았다. 그는 도일 7개월 만에 일본에서 개종한 최초의 한국인 개종자가 되었다. 그리고 일본 전국 기독교 친목회가 동경에서 열렸을 때 참석하여 공중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요한복음 15장을 중심으로 한 신앙고백을 만들어 발표하였다.

이수정은 재일 미국성서공회 총무 루미스(H. Loomis) 목사의 제안을 받아 곧바로 성서번역을 시작했다. 그는 성서번역을 하다가 한국에서 박해를 받아 순교할 각오를 가졌는데, 실은 그의 숙부가 병인교난(丙寅敎難)때 순교하였던 것이다. 이수정의 개종과 그의 전도로 일본에 와 있던 한국유학생들이 예수를 믿기로 하고 세례를 받았다. 이수정은 이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주일학교를 세우고 한문 요리문답서를 가지고 공부하였다. 이렇게 하여 일본에서 이수정은 성서번역과 전도에 매진하면서 한국에 외국선교사 초청운동을 시작하였다. 이수정은 세례받은 유학생들을 모아 예배를 드림으로써 동경에 한국인교회가 처음으로 설립되었다.

이수정은 1883년 12월 13일에 미국 교회 앞으로 진정서를 발송하고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달라고 간청하면서 아직 한국이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허용치는 않을지라도 기독교인들을 찾아내어 박해하지는 않을 것이라 하였다. 녹스 목사와 루미스 목사도 이수정의 진정서에 감명을 받고 한국에 선교답사를 갈 생각을 가졌다.

이수정의 성서번역은 1883년 5월에 시작되었다. 먼저 한한(漢韓)성서를 시작하고 그 다음에 번역에 들어가기로 루미스와 계획을 세웠다. 1864년 상하이에서 나온 한문 신약전서를 가지고 먼저 번역하기 쉽게 토를 단 성경을 일단 완성하고 그 다음에 한글로 번역하기로 했다. 그 이듬해 6월 21일에 작업이 완료되었고 출판은 11월에 시작되었다. 토 달린 한한성서가 유교도들과 한문을 아는 학생들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이제 이수정은 한글 성서번역에 착수하여 마가복음서부터 시작하였다. 이수정의 학문적 명성이 널리 인정되어서 동경외국어학교 한국어 교사로 임명되었다.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이 1885년 2월에 요꼬하마에서 6천부가 인쇄되었다. 그리하여 1885년 4월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 선교사가 제물포에 도착하여 한국에 왔을 때 이수정의 마가복음서를 가지고 들어왔다. 그 본문을 보면 국어와 한문의 혼용체이다.

이수정은 이어서 누가복음서를 번역하였다. 그러나 출판되지 못하고 이 원고는 훗날 언더우드에게로 넘어갔다. 이수정은 성서 외에 소책자도 번역하였고 감리교 요리문답을 번역하여 1천부가 인쇄되어 곧 한국으로 유입되었다. 이수정은 이 무렵에 일어난 갑신정변의 여파가 일본에 미치고 김옥균 등의 망명 개화파 인사들이 일본에 왔을 때 한국에 귀국하였다. 그는 개화파의 급진주의와 맞지 않았다. 이수정은 일본에 있는 동안 일본의 미국선교사들에게 큰 감화를 주어서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사가 한국에 파송되는 길을 열었고, 그가 번역한 마가복음서가 전도에 도움이 되었다. 일본의 미국 감리교 선교사 맥클레이가 한국에 와서 김옥균과 함께 고종을 만나 기독교 선교의 자유를 줄 것을 진언하였고 의사 알렌이 한국에 들어오는 길을 열었다. 맥클레이가 한국 선교에 열심을 갖게 된 것은 이수정의 개종과 신앙에 감화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개신교 정식 선교사들의 사역

앞에서 진술된 바와 같이 개신교 선교사들이 한국에 정식으로 들어오기 전에 중국과 만주와 일본에서 한국선교를 위한 준비가 있었고, 이미 한국에는 신자들과 교회가 있어서 외래 선교사들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그들의 선교사업에 도움이 되었다. 1884년 9월에 중국에서 의료선교사로 있던 알렌이 입국하여 선교사로서 일하기 시작했고, 1885년 4월 5일 미국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 G. Underwood)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H. G. Appenzeller) 부부가 인천 제물포항에 도착했고, 5월 1일에 감리교 교육선교사 스크랜톤(M. F. Scranton) 부인이 혼자 도착했고, 북장로교 의료선교사 헤론(J. W. Heron) 부부가 도착하였다. 영국성공회 선교사 코르프(C. J. Corfe)가 1890년 9월 29일에 인천에 상륙하였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장로교회 데이비스(J. H. Davis) 목사가 그의 여동생 매리(Mary Davis)와 함께 1890년 10월에 서울에 도착했다. 데이비스 목사가 불행하게도 병사해서 후임으로 맥카이(J. H. Mackay) 목사 부부가 파송을 받았다.

미국 남장로교회에서는 1892년 11월 3일에 레이놀즈(W. D. Reynolds) 목사가 한국에 왔다. 캐나다에서는 게일(J. S. Gale) 목사가 캐나다 YMCA 후원으로 1888년 12월 한국에 왔고, 게일에 이어 의사 하디(R. A. Hardie)와 그 밖의 몇 명이 한국에 왔다. 동양선교회(오늘날의 성결교회) 창설자 킬보른(E. A. Kilbourne)이 동경에 세운 성서학원을 졸업한 한국인 2명이 서울에 와서 1907년 5월에 「동양선교회 복음전도관」을 세우고 전도를 시작했다가 1921년에 「성결교회」란 간판을 붙였다. 안식교회는 1904년에 들어왔는데 일본인 안식교 전도사의 전도를 받은 유은현과 손홍조가 침례를 받고 국내로 와서 전도했고 1905년에 미국에서 스미스(W. S. Smith)가 와서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1898년에 선교를 시작하여 대신부 암브로즈 구드코(Ambrose Gudko)와 함께 몇 신부가 한국에 왔다.

1895년에 미국 침례교 계통의 한 선교단체가 폴링(E. C. Pauling)과 가드라인(A. Gadeline)을 한국에 파송하여 이들이 부산과 공주 지역에서 선교하다가 캐나다 선교사 펜윅(M. C. Fenwick)에게 활동을 이양했다. 그가 만든 「동아기독교」라는 교파가 일제 말경까지 유지되었는데 해방 후 침례교의 모체가 되었다. 일본의 교회들이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한국선교에 뜻을 가지고 「조선전도단」을 조직하고 전도 겸 일본의 조선정책을 돕는 일을 할 생각이었다. 이러한 취지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일본구미아이교회」(日本組合教会)가 조선선교를 위하여 조선에 진출했다.

1884년 7월에 고종황제가 맥클레이 선교사에게 윤허한 것은 선교사들의 교육사업과 의료사업에 국한된 것이었다. 그리하여 알렌이 병원 광혜원(제중원)을 세웠고 스크랜톤 여선교사는 시병원(施病院)을 세웠고 1887년 10월에 내한한 하워드(M. Howard) 여선교사가 여성전용병원을 세웠다. 이 병원사업이 선교하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와 그 밖의 선교사들은 한국을 배우고 지방의 생활사정을 알기 위하여 말을 타고 안내원을 데리고 여행을 다녔다.

언더우드와 아펜젤러는 교육하는 사람으로 입국허락을 받았다. 그리하여 아펜젤러는 1885년 말에 고종으로부터 학교설립을 허락받았다. 처음에 2~3명의 학생을 데리고 시작한 이 학교가 배재학당이며 한국 근대교육의 효시였다. 학생 수는 곧 늘어나 5개월 만에 32명이 되었다. 언더우드는 고아원 형태로 학교를 시작했다. 1886년 5월 11일에 정동에 「언더우드 학당」이 생겼고 그 후 경신학당으로 발전했다.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성경번역과 문서선교를 위하여 「성서번역위원회」를 1889년에 조직하였고 영국성서공회가 이 위원회에 요청하여 로스가 번역한 「누가복음」을 개정하게 하여 1890년 개정 출판 되었다. 이 위원회는 선교사와 한국인 보조원이 일차적으로 번역하고 다음으로 다른 번역자들이 교정하고 다시 다른 번역자에게 넘겨서 검토하고 마지막으로 위원회에서 심의 결정하였다. 신약성서 단편들이 계속 출판되다가 1904년에 1차 개정본이 나왔고 1906년에 비로소 공인된 「신약전서」가 출판되었다. 그리고 1890년 초에 초교파 문서사업기관으로 「조션셩교셔회」(The Korean Religious Tract Society)가 설립되었는데 이것이 오늘날의 「대한기독교서회」다. 언더우드와 헤론과 올링거 선교사의 노력으로 세워진 이 서회는 “조선어로 기독교 서적과 전도지와 정기간행물을 출판하여 전국에 보급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많은 서적과 전도지와 간행물을 출판, 보급하였다. 당시 한국의 인쇄사업은 초보단계였고 문서를 통한 계몽운동이 절실히 필요한 때였다. 그리하여 출판사들이 생겼으나 자금난으로 문을 닫은 곳이 많았는데 이 서회만이 오늘날까지 살아남아서 한국 출판사 중 가장 오래된 100년이 넘은 출판사가 되었다. 그것은 선교사들의 재정적, 인적 자원의 공급 덕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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