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72)

조선(한국) 선교 - 한국교회의 성장




3. 한국교회의 성장

한국에 서양 여러 교파 선교사들이 일시에 몰려든 것은 아시아에서 한국이 맨 마지막으로 개국(開國)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선교단체들이 가능한 한 연합체를 만들어 협력하는 길이 효과적인 선교를 위한 최선의 길이어서 미국 북장로회와 남장로회, 오스트레일리아 장로회와 캐나다 장로회의 선교부들이 1893년 1월에 연합하였다. 그리하여 독노회(獨老會)가 정식 탄생하여 이 선교연합회가 장로교회를 다스렸다. 감리교회도 남북미국감리교회 선교회 연합회에서 감리교회를 다스렸다. 이런 연합회는 신학과 교리의 차이를 넘어서는 연합이었다. 이렇게 하여 한국에 이대(二大) 교회가 조직된 것이었는데 한국 본토민 신자들은 모든 선교회가 하나로 연합하여 하나의 조선그리스도교회를 세우기를 바랐다. 그러나 외국선교회들이 교리적인 차이는 극복할 수 있었으나 교회체제의 일치를 보기는 어려웠다. 장로제도와 감독제도는 쉽게 융합이나 조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선교회가 합의를 본 것은 선교지 분할 문제였다. 한 지역에 여러 선교부가 같이 들어와서 선교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 인구 5천 명이 넘는 큰 도시에는 어느 선교회든지 들어가서 선교할 수 있게 하고, 5천 미만의 도시는 먼저 점유한 선교회가 선교지로 점유하고 그곳에 다른 선교부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되 만일 선교활동이 6개월 이상 정지되면 다른 선교회가 들어갈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교인들은 교파를 옮길 권리가 있게 하였고, 각 선교부는 각 타 선교지의 규칙을 존중할 것을 결의했다.

장로교회나 감리교회가 대체로 비슷한 선교정책을 갖게 되었는데, 그 당시 열린 세계 선교대회에서 구상한 정책과 같았다. 1928년 예루살렘 세계선교대회에서 토착화 선교이론이 거론되었다. 그것은 본토민 교인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선교하고 전도하게 하고 그들이 자력으로 교회를 세우고 운영하며 유지하게 하고 교회의 건축과 예배 등을 본토민 문화의 좋은 요소와 융합되도록 할 것 등이었다. 중국에서 선교하던 선교사 네비우스(Nevius)가 중국 산동성에서 선교하면서 이 자립정책을 실시했으나 실패했던 경험을 한국의 선교사들이 듣고 한국선교에 그 방법을 도입했는데, 한국교회는 그 방법으로 교회가 성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국교회는 선교사들의 재정원조 없이 교회를 짓고 목회자와 전도자의 생활비를 보장하였다. 전도도 한국교인들이 나서서 해서 교세를 키워갔다. 이렇게 하여 한국교인들은 연보를 많이 내야 했고 십일조도 강조해야만 했다. 그러나 한국교회가 선교사의 지도에 너무 의존하고 그들의 대책에 순진하게 따라간 면도 있다. 감리교의 신학은 합리주의적인 것이어서 교리 논쟁이나 신학사상 논쟁이 없었고, 장로교에서는 자유와 보수 문제가 미국 모국에 있었지만 한국 장로교 선교사들은 신학 문제로 시비하지 않았다. 한국의 장로교 선교회들이 연합해서 평양신학교를 운영하면서 신학사상 토론을 멀리하는 교육정책을 세웠다. 미국 북장로교 안에서 심각한 신학사상 논쟁이 일어나 극단의 보수주의 학파가 정통장로교회라고 하는 교파를 세워 분열되어 나갔다.

부흥운동

한국에 개신교 선교가 시작된 때는 구한말 나라가 망하여 일본에 삼켜져 가던 때였고 일본의 조선 지배가 날로 확실시되어 가던 때였다. 그리하여 개화사상을 가지고 서양의 문명과 그리스도교를 동시에 수용하려던 독립운동 애국지사들이 그리스도교로 많이 개종하였는데 이승만을 비롯하여 서재필, 이상재, 윤치호, 박영호 등등이었다. 그리하여 자연히 한국 그리스도교 선교는 민족운동과 병행하는 것이 되어서 신앙과 애국이 한 철로가 되어 한국교회가 애국신앙 때문에 일제시대 박해와 고난을 당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교회의 부흥과 교세 확장은 민족복음화운동인 동시에 애국운동이기도 하였다.

1907년 1월 평양에서 시작된 부흥운동의 발단은 원산 지역에서 선교하던 감리교 선교사들과 중국에서 온 화이트(M. C. White) 여선교사와 장로교 선교사와 한국인들이 참석한 연합기도회였다. 이 기도회 때 캐나다에서 온 의료선교사 하디(R. A. Hardie)가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통회하는 기도를 드렸는데 바로 이것이 부흥운동의 발단이 되었다. 하디는 3년 동안 강원도 지역에서 최선을 다하여 노력했지만 아무런 결실이 없어 자기의 무능함을 고백한 동시에, 자기의 신앙에 허물이 많고 백인의 우월감을 가지고 한국인을 대한 것을 뉘우쳤다. 초기 선교사들과 달리 나중에 온 선교사들은 우월감과 교만심을 가졌고, 고급 양옥주택에 살면서 피서지의 별장까지 가지고 휴가를 즐겼으나 한국민의 가난과 비참에 대한 동정심 없이 생활하였던 것이다. 중국에서는 국민운동이 일어나서 서양인과 선교사를 배척했고 의화단(義和團) 사건 때 수많은 선교사가 살해되었다. 반면 한국에서는 선교사들이 천사처럼 대우받고 있었는데 하디의 고백과 통회를 계기로 선교사들 사이에 심령의 부흥운동이 일게 되었고 이것이 한국교회에 부흥운동의 불을 붙인 것이다.

1904년 1월 원산에서 다시 개최된 연합기도회에서 캐나다 선교사 롭(A. F. Robb)이 성령을 체험한 역사가 일어났고 한국인들도 부흥의 은혜를 체험하였고, 이 체험이 계속되어 1905년 8월 평양에서 다시 부흥이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1907년 1월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대부흥회의 불길이 붙기 시작하였다. 장대현교회는 해마다 사경회를 가졌으나 이해에는 전과는 다른 양상의 부흥집회가 되었다. 부흥사 길선주(吉善宙) 장로가 이 집회 준비를 위하여 새벽기도회를 열었는데 이때부터 성령이 충만하게 역사하여 집회 첫 날 1,500명의 신자들이 성령의 충만한 임재를 체험했다. 북장로회 선교사 블레어(W. N. Blair) 목사가 설교하면서 외국인 선교사와 한국인 사이에 있었던 그간의 반목과 갈등이 사랑의 결핍 때문이라고 고백하면서 다시 모두 통회하여 서양인과 한국인의 구별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아주 하나가 된 경험을 했다.

이러한 부흥운동이 한반도 전역으로 확산되어 갔다. 1909~1910년은 일제가 한국을 완전히 강탈한 때였다. 민족의 비운이 시작된 때 한국교회는 ‘100만 구령운동’을 시작했다. ‘백만 명을 그리스도에게로’라는 구호를 외치고 1910년 9월 19일 선천에서 열린 장로교 독노회에서 운동의 시작을 결의하였다. 이때 동양 지역 전도순방 중이던 미국 부흥사 채프만(J. W. Chapman)과 알렉산더(C. M. Alexander) 목사를 강사로 하여 100만구령운동을 위한 부흥집회를 열었다. 이 두 목사는 5일간 집회를 인도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으나 그들의 동행자 중 한 사람 데이비스(G. T. B. Davis)가 남아서 지방을 순회하면서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전국의 교회와 교계 학교와 학생과 교사가 대거 전도운동에 참여하였다. 이때 전도자들이 ‘날연보’를 바친다는 말을 하였는데 그것은 돈이 아니고 하루를 전도에 바친다는 말이었다. 이때 평양에서 1천 명이 연 2만 2천 일을 날연보 했고 총 날연보일은 무려 10만 일을 넘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모든 교인이 하루라도 전도에 헌신한다는 정신으로 전도했다. 대규모의 전도지를 나눠 주는 문서선교도 겸했다. 노방전도 방법도 나왔다. 70만 권이 넘는 마가복음 쪽복음이 배포되었다.

100만구령운동의 성과는 가시적으로는 크지 못하여 백만 명의 10분의 1 정도에도 채 미치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운동이 한국민족의 민간운동으로서는 유사 이래 가장 크고 치열한 운동이어서 한국을 강탈한 일본 정부 당국자가 이후로 한국의 교회를 주시하게끔 되었다. 그리고 한국교인들은 교파와 지역의 차이를 뛰어넘어 하나가 된 증거를 보였다. 일본이 한국을 삼키려는 이때 한국교회의 이러한 운동은 민족의 정치적 위기를 외면한 것이라는 비평은 교회 밖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일제 36년 동안 민족운동에 가장 적극적이고 민족운동으로 제일 많은 박해와 피해를 입은 사람은 한국교회 지도자들과 목사와 장로와 평신도들인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튼 100만구령운동으로 교인 수가 늘고 교세가 증강된 것은 사실이다. 장로교회는 1912년 9월 7개 노회가 모여서 총회를 조직하였고 감리교회는 1908년 3월 11일에 한국연회가 정동교회에서 조직되었다. 장로교회는 총회가 조직된 데 대한 감사로서 중국 산동성에 선교사(목사와 의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했다.

민족운동

한국교회는 종교단체이므로 어떤 정치단체를 만들어서 민족독립운동을 할 수 없었고 교육사업과 의료사업과 문화사업과 사회복지사업 등을 통하여 민족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의 선교사들과 그들을 모방한 한국인 교육가들은 현대교육을 실시하여 민족의 현대화와 계몽운동의 선봉에 설 수 있었다. 물론 이러한 운동은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운동의 한 방법이 되었다. 이동휘, 안창호 및 이승훈과 같은 사람은 민족정신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 많은 학교를 세웠다.

구한말 국운이 흔들리고 외국의 침략 위험이 박도한 때 한국인의 정치운동으로서 대표적인 것이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였는데, 구한말의 정치개혁을 지향한 이 운동이 대역죄로 몰려 이승만, 이상재, 김정식 등 17명이 사형선고를 받았는데 함태영 판사가 이들을 무죄로 판결 하여 다 풀려나왔고 함 판사는 이로 인해 파면당하였다. 그는 후에 개종하여 목사가 되었다. 이 운동의 지도자들 중에는 기독교 신자들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때 한국교회는 구국기도회를 열어 민족의 소원을 하나님께 호소하였다. 1905년 9월 장로회 공의회에서 길선주 장로의 제안으로 그 해 11월 감사절 다음날부터 구국기도회를 전국 교회가 갖도록 하였다. 감리교 청년들의 엡웟청년회(Epworth League)가 주도하여 1905년 11월에 수천 명의 청년이 상동교회에 모였는데 종교적인 행사였지만 구국기도회였다. 이때 이 기도회를 주도한 상동교회 전도사 전덕기(全德基)와 김구(金九), 이동녕(李東寧) 등 6명은 기도회가 끝나자마자 궁궐로 나아가 도끼를 메고 을사조약 반대의 상소문을 올렸다.

신민회가 1907년 4월에 비밀리에 조직되었는데 주도자는 안창호였다. 그는 미국에서 귀국하여 2개월 만에 이 조직을 만들었는데 상동교회 청년 기도회를 주도한 사람들이 다 이 신민회 회원이었다. 신민회는 전국에 조직체를 갖게 되었고 회원 대부분은 기독교인이었다. 1911년경 회원 수는 400~800명이었다. 신민회의 활동은 정치, 경제, 교육, 산업 등 사회 전반에 걸친 운동이었고 그 모든 운동이 기독교적 정신에 입각한 것이었다.

1907년 을사조약 체결 이후 1910년에 한일합방이 획책되기까지 일제의 침략에 저항하는 운동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1910년 9월 중 조선총독부 총독이 서북지방을 순방한다는 풍설이 있자 윤치호와 이승훈 등 몇 사람이 총독을 암살할 비밀계획을 세워 지휘하였다는 날조된 사건이 있었는데 이때 정식 기소된 사람은 123명이며 구속된 사람은 대략 700명이었다. 이 날조된 사건은 한국의 기독교인 사회지도자들을 제거하며 동시에 기독교 세력을 억압하고 외국선교사들을 추방하려는 의도를 가진 것이었다. 기소된 사람 123명 중 82명이 기독교 신자였는데 그 가운데는 학생도 있었고 목사, 장로, 집사, 영수 등 당시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많았다. 연루된 선교사도 24명이었다. 수감된 사람들에게 잔인하게 고문을 하였는데 그것은 참으로 견디기 힘든 것이었다.

이 사건이 외국 언론에 보도되어 국제적인 관심거리가 되었다. 재판 제1심에서 105인에게만 유죄판결을 내렸고 재판정에서 피고들의 증언이 사실로 드러나자 제2심에서는 99명을 무죄로 석방하고 윤치호 외 5명에게는 징역 6년 형을 선고했다. 이 사건은 총독부의 아카시 켄지로라는 사람이 날조한 것인데 그는 무단통치에 능한 사람이어서 나중에 대만총독에까지 승진하였다.

1919년 3.1 독립운동의 발단은 일본 동경에 있던 조선기독청년회(YMCA)의 기독청년들의 독립운동에 있었다. 그들이 만든 독립선언문이 서울에 있던 종교인 지도자들에게 전달되어 주로 종교지도자들의 규합으로 서울에서 독립선언문을 발표하고 대중운동에 돌입하였던 것이다. 33인 가운데 기독교 지도자들이 가장 활발하게 움직여서 이 운동의 조직과 추진을 모의하였고 33인은 결국 일본법정에 끌려가서 재판을 받았다. 이들은 형을 받은 것을 미리 각오하였고 법정의 재판문제에 대처하기 위하여 법률을 잘 알고 있던 함태영 조사는 33인 중에 들어가지 않고 사건수습에 시달렸다가 결국 옥고를 치렀다. 그는 당시 남대문교회 담임교역자였고 이 교회의 젊은 전도사 송창근은 교회의 등사판으로 독립가를 등사해서 뿌린 죄로 투옥되어서 옥고를 치렀다. 3.1 독립운동 때 다른 종교의 지도자나 신도보다 기독교의 목사와 장로와 유관순을 비롯한 신자들이 훨씬 많이 갇히고 죽었고, 경기도의 제암리교회를 비롯하여 교회당 12개소가 불타거나 파괴되었다.

일제의 종교박해는 갖가지였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신사참배 강요였다. 신사가 종교가 아니고 일본의 국가의식(儀式)이란 이유로 한국교회에 참배를 강요하였다. 물론 교회뿐만 아니고 모든 일본 국민에게 강요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국교회는 그것을 종교행위로 보고 참배를 거부하였던 것이다. 많은 목사와 평신도들이 이 문제로 투옥되고 고문을 받았다. 주기철 목사가 순교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해방될 때까지 투옥되어 있었다. 한국의 천주교는 신사참배를 이의 없이 수용하였지만 개신교는 불응하였다. 결국 1938년 장로교 총회는 압력에 굴복하여 참배를 결의하였고 감리교도 굴복하였다. 성결교회만은 교단적으로 교회를 문닫고 거부하였다.

하나님은 한국민족과 함께 고난을 당한 한국교회의 기도와 호소를 들으시고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의 승리와 함께 한국이 해방이 되게 하셨다. 이 해방은 미일전쟁의 결과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미국의 승리는 하나님의 역사 섭리와 정의의 심판이라고 말할 수 있는 동시에 한국의 해방도 그의 정의의 심판에서 온 것으로 믿는다. 그가 값없이 팔려 간 가련한 우리나라를 돈 없이 돌려보내주셨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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