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홍정수 칼럼] 21세기 평화 신학

홍정수·LA갈릴리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홍정수 박사. ⓒ베리타스 DB

1. 종교(宗敎)의 핵심은, 옛 사전이 말하듯, 안심입명(安心立命), 곧 삶의 기술(맘의 평안과 죽을 수 있는 명분)을 가르쳐 주는 것이지, 신(神)이 아니다. 만일 신이 중심을 차지한다면, 우리 기독교는 불교나 공산주의와 대화 불능이며, 다른 신을 믿는 이들과 교통 불능에 빠지게 된다. 나의 (참) 신이 아닌 다른 모든 신들은 거짓된 신, 곧 우상에 불과하니, 그런 허구의 늪에 빠진 자들과의 “대화”란 첨부터 어불성설이다. 그리고 견해가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대화가 불능이라면, 그런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 평화란, 강자의 억압에 의한 일시적 숨죽임이 아닌 이상 참 평화란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 사는 세상의 실상은 이로써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즉 나와 다른 색깔의 사람들은 용인할 수 없는 가치관 속에 우리는 살고 있다.

2. 이런 파국에서의 탈출은 두 단계를 필수적으로 거쳐야 한다.

3. 첫째는 어떤 종교의 경우든 “신”이란 사람이 “생존의 방편”으로 도입한, 인위적 개념임을 솔직히 시인해야 한다. 예컨대, 행운의 신은 실재하는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실재한다. 복권을 살 때마다 적어도 100만원 이상에 당첨된다면, 그 사람의 행운을 뭣으로 더 잘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에게는 행운의 신이 함께 한다고 하는 것 외에? 즉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바람직한 일 혹은 벗어나고 싶은 심각한 불행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감격과 희망에 가장 최후의 근거, 구실, 핑계로 설정하는 인격적 존재가 바로 신이다. 즉 우리가 만들지만, (어떤 경우) 그 신은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지탱해 준다는 말이다. 어둠 속에다 희망을 주거나 감격을 증폭시켜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야 한다. 그것의 실재성은 우리의 언어 체계 속에 있음을. 즉 다른 말(가치)로 바꿔 설명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우리 만남은 하느님의 섭리입니다”=“전생의 인연이네요!” 혹은 허무주의적 세속주의로 말을 바꾸면, “우린 어쩌다 만났지요.” 이런 언어 체계, 이해의 틀은 그 만남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 우연에 불과하다고 치부하기 때문이다.

4. 그렇다고 무신론을 찬양하자는 건 결코 아니다. 나는 예수를 믿는다. “신”을 인간이 자신의 삶의 한 방편으로 창안해 낸 “말”에 불과하다고 말하는 건, 무신론을 찬양하자는 논리가 전혀 아니다. 사실상 무신론자란 없다. 있다면, 다신론자가 있거나 자의식 결핍자가 있을 뿐이다. 전자는 오늘은 이런 가치를, 내일은 저런 가치를 추구하며, 갈지자 걸음으로 일생을 사는 사람을 일컫는다. (이런 사람은 정말로 존재하는가?) 그리고 후자는 실제로는 어떤 사람이 일편단심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로매진하고 있으나, 그 자신은 그 목표에 대한 자각이 없는 경우를 생각할 수 있는데, 이런 경우도 사실은 존재하기 어려울 것이다. 바람은 늘 세차게 불고 있으니 말이다.

반면, 나는 내가 살아가면서 중대한 판단을 할 때, 혹은 죽음을 생각하면서 내 인생을 걸 때, 그 가치의 근거를 예수의 삶과 가르침에서 찾는다. 곧 양생(養生)의 재미, 보람,명분이다. 그렇다고 내가 예수의 앵무새, 꼭두각시라는 말은 아니다. 그렇게 사는 것은 내가 말하는 예수의 삶도 정신도 아니다. 예수는 자신에게 주어진 전통에 대하여 무지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살았다. “옛 사람(실은 옛 하느님)은 ... 그러나 나는 ... ” 그는 그렇게 독불로 살았고, 그래서 맞아 죽었지만, 나는 바로 그래서 그를 스승으로 모시고 산다.

5. 둘째는 “진리” 혹은 “정의”라는 옛 범주에 집착하지 말고, 이제는 “아름다움”을 함께 추구하는 길이 더 궁극적인 가치라는 생각(철)에 이르러야 한다. 기독교는 중세 이래 아주 오랫동안 “진리”라는 잣대로 사람들과 세상을 다스려왔다. 인간의 타락은 진리를 아는 눈을 멀게 했기 때문에, 하느님의 섭리, 계시, 성경, 그리고 그것을 권위 있게 풀이해 주는 성직자의 가르침에 “복종”하는 미덕 없이는 인간 구원은 생각할 수도 없다. 따라서 교회에서의 출교는 비진리의 영역으로 추방당하는 것이요, 그런 자들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니라, 성스런 직무수행에 해당할 뿐이다(마녀사냥이라는 聖戰).
 
그러다가 1960년(한국에서는 4.19)을 기점으로 전세계에 새로운 물결이 일어났으니, 이른바 사회주의 파동이다. 다른 말로 바꾸면, 정의의 파동이요, 각종 인권 운동이다. 그리고 그 혁명의 바람은 지금도 불고 있다. 불의의 체제를 전복하라! 불의한 세상에서는 신을 찬미할 수 없다!
 
생각해 보라. 내가 진리 편에 서 있다고 확신한다면, 내가 정의 편에 서 있다고 확신한다면, 나와 견해가 다른 부인, 남편, 목사, 정치인을 용납할 수 있겠는가? 무슨 명분으로! 나는 미국의 대학 교실에서 이런 형국을 체험으로 인식하였다. 가령, 우리는 무수한 중국산 제품을 지금 수입하고 있다. 왜? 값이 싸기 때문이다. 그것은 옳은 것인가? 보기 나름이다. 예컨대, 한국에서 한국인이 생산하면 10만원 할 물건이, 중국에서, 소년/소녀들의 착취된 저금임 노동력으로 만들면 단돈 2천원이면 된다 한다면 .... 우리는 지금 아무 생각없이 수입하고 있지 않은가? 중국 소녀 가장의 눈에는 우리가 불의한 편에 서 있다. 그러나 우리도 할 말 있다. 강제 노동을 시킨 건 아니다; 중국 소녀는 농장에서 일할 때 하루 1백원이라면, 한국인 공장에서 일하는 경우 5백원을 받지 않는가! 얼마나 큰 특혜인가! 누가 정의인가?

6. 신 개념, 그리고 진리/정의 개념을 “넘어섬” 없이는, 개인간에, 가정에서, 사회에서, 국가간에 “폭력”은 피할 수 없다. 반진리, 곧 우상숭배, 거짓, 불의를 용인한다는 것은 첨부터 불가능한 일이 되기 때문이다.

7. 페인트 점에 가면, 하얀 색깔도 무지 여럿임을 알 수 있다. 까만 색깔도 ... 파란 색깔도 마찬가지이다. 즉 우리들의 관념 세계와는 달리 현실 세계에는 다양한 값, 가지들이 공존하고 있다. 노래를 잘하는 수도 있고, 그림을 잘 그리는 수도 있고, 둘 다 잘하는 수도 있고, 둘 다 못하지만 탁구는 잘 치는 수도 있다. 암산을 잘하는 자와 말을 잘하는 자를 가리켜 IQ가 높다 하나, 그것은 교실 작업의 편의상 방편이지, 인생의 값을 판정해 주지는 못하는 것 아닌가! 진실을 잘 말하는 자도 있고 권모술수에 능한 자도 있고, 첩보에 능한 자도 있고, 기밀관리에 능한 자도 있다. 해킹을 잘하는 자도 있고, 그것을 막는 자도 있다.  음악처럼, 미술 작품처럼, 아름다움은 홀로 만들어지지 않듯이, 인간 문명은 발전할수록 복잡해지고, 생물은 진화할수록 뇌세포가 복잡해진다 하지 않는가? 단순한 것은 죽음뿐이다. 불변하는 것은 죽음뿐이다. 반면에, 생명은 복잡하고, 변화를 거급하지 않는가? 지구촌 사람들의 생각, 이제는 다시 한번 거듭나야 한다. 아니면, 2012년에 지구 종말을 맞을 수도 있다.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하여, 틀린 것은 아니다. 어울릴 수 없는 것도 아니다.

8. 우리는 2012년을 앞두고, 지금 지구촌 진화의 한 임계점에 당도하였다. 911사건의 주역(?)으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은 오바마에 의하여 즉결처분 받고 사라졌다. 그러나 오사마, 그의 메시지는 살아 있다: 거인국 미국이라도  홀로 잘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팔레스타인이 유네스코에 정회원이 되었다 하여, 지구 평화를 환영해야 할 노벨 평화상 수상자 미국의 오바마는 기금(전체의 20% 차지)을 동결하였고, 이를 예루살렘 신문은 대서특필하고 있다. 지금. 언제쯤 지구촌 사람들이 중대한 성숙에 이를 것인가? 진리, 정의가 아니라 아름다움(서로 다른 가치들의 긴장 있는 평화)이 보다 상위의 가치임을 고백하고, 함께 추구하는 성숙 말이다!

9. 내가 예수를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아브라함의 약속을 구현한 메시야라는 이유도 아니고,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신하여 죽어줬다는 것도 아니다. 그가 물위로 걸어갈 수 있고, 물로 포도주를 만들 수 있으며, 절름발이를 일으킬 수 있는 명의라는 점 때문도 아니다. 물론 신의 외아들이라서는 더욱 아니다. (나의 일상생활과는 아무 상관없는 변수들이다. 손오공의 요술 이야기 정도에 불과하다.)
  
위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내가 예수를 스승으로 삼은 것은 그의 거룩한 낭만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낭만이라 함은, 전체, 대중의 승인이 아니라 단 둘만 있어도 사랑이 있으면 더 바랄 것이 없어라! 하는 심각한 통찰을 말한다. 비밀스런, 배타적인 낭만이 아니라, 누구나 모방할 수 있고, 참여할 수 있는 낭만이라, 그것을 나는 거룩하다 이름한다. 이 세상에의 아름다움은 독점이요 배타이지만, 예수의 낭만은 만인을 초대하는 거룩한 낭만이었다고 나는 보고, 믿는다.  
 
생각해 보라. 문둥이, 창녀, 매국노, 자객, 절름발이, 맹인 등등을 “친구”로 삼고, “잔치”를 벌이는 예수! 그를 사랑하는 자라면 어찌 그를 “미쳤다”하지 않을 수 있었으랴! (성모 마리아 신앙은 반성경적 장난이다) 이 예수를 이해하는 성경적 방식은 그것이 “하느님의 뜻”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하는 말이다. 나는, 위에서 이미 밝혔듯이, “신”이라는 말은 한 방편에 불과한 언어 장치라고 본다. 따라서 이 대목에서 “그 미친 짓을 하느님의 뜻”으로 말하는 어법은, 내 방식으로 바꾸면, “이 재미, 죽어도 좋아요!”이다. 그리고 물론, 그 말속에는 (지극힌 사적인 유희가 아니라) 뭇 생명들을 압살하고, 공포를 평화라 거짓 선전하는 허구가 아니라 양생의 세상으로 가는 길목이라는 확신도 포함된다고 나는 이해한다.
 

글/홍정수 박사(LA갈릴리신학교 조직신학 교수)
 

※ 외부 필자의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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