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기획연재- 이장식의 교회 역사 이야기(75)

중동과 아프리카 선교




제16장 중동과 아프리카 선교

1. 중동

8세기 이후 모하메드의 이슬람교가 아라비아 반도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전파되어 중동지방 즉 옛 페르시아와 시리아 지방의 모든 나라를 정복하고 사하라 사막 이북의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하여 이 지역에 있던 그리스도교를 박해하였고, 특히 북아프리카의 이집트를 비롯한 여러 나라의 그리스도교 정권들을 타도하고 이슬람(회교) 국가로 만들어 버렸다. 동시에 종전의 북아프리카를 식민지로 만들었던 로마제국의 지배도 물러갔다.

이슬람 종교가 정권과 교권을 장악한 곳에 그리스도교 선교활동은 제한됨 범위에서 허용되었으나 이슬람교도를 그리스도교로 개종시키는 것은 엄금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본서 제2부 2장에 상술되어 있다.

구미의 개신교회들이 18세기 이후에 중동과 아프리카 선교를 구상하여 이슬람 세계에 접근해 간 여러가지 탐정적인 여행기록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특기할 만한 것은 여러가지 고통을 거쳐서 힘들게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요셉 올프(Joseph Wolff, 1796~1862) 목사가 이슬람 세계에 들어가서 선교활동 한 것이지만 오래가지 못하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터키 미국의 회중교회 선교부에서 파송한 윌리엄 꾸델(William Goodell, 1792~1867) 목사가 1831년에 터키의 콘스탄티노플에 정주하여 선교하기 시작하고 점차적으로 소아시아와 아르메니아 지역으로 선교를 확장해 갔다. 그는 교육사업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는 터키의 무슬림들보다는 그 나라에 살고 있던 초대교회 시대의 동양교회 교인들(네스토리아파)과 아르메니아인들을 상대로 활동을 많이 했다. 그리하여 이들을 모아서 1850년에 터키 정부의 인가를 받은 복음주의 교파를 세웠다. 미국 선교사들이 1823년에 시리아와 레바논 선교를 위하여 베이루트(Beirut)에 와서 아랍어로 성서를 번역하고 대학을 세워서 교육사업을 하였다.

이란 이란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온 것은 아니지만 본서 제3부 11장에서 진술한 대로 인도에서 선교하다가 영국으로 귀국하던 헨리 마틴이 이란에 들러서 그곳의 이슬람교의 학자들 및 지도자들과 만나서 대담한 일이 있었다. 그가 페르시아어로 신약성서를 번역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던 때였다. 이 짧은 기간에 마틴은 단 한 명의 무슬림을 개종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이것은 작은 소득이 아니었다. 1813년 스위스의 바젤(Basel)선교회의 선교사들이 타브리쯔(Tabriz)에 왔고 미국의 선교회가 1835년에 우르미아(Urmia)에 선교지를 정하였다. 바젤선교회는 무슬림들을 상대로 선교하였고 미국 선교회는 우르미아 지방의 초대 동양교회 신자들의 후손들 사이에서 선교하였다. 이 지방에는 초대교회의 신앙을 지키고 박해를 받으면서 살아가던 소수의 신자들이 있었다. 미국 선교사들은 이들이 미국으로 이민하여 살도록 도와 미국에 네스토리안 교회가 서게 되었다.(본서 제 2부 5장 참조)

팔레스타인 팔레스타인에 먼저 들어간 영국성공회 선교사들이 유대인들 사이에서 선교하기 시작했다. 1824년에 예루살렘에 병원을 세워서 간단한 치료봉사를 하다가 발전해서 1848년에는 아주 유명한 병원이 되었다. 예루살렘에는 러시아정교회도 들어왔고 프랑스의 로마가톨릭교회도 들어왔다. 이 선교단체들이 연합해서 예루살렘 교회를 다스릴 협동감독제도를 만들었다. 최초의 감독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교의 랍비 미카엘 솔로몬 알렉산더(Alexander)였는데 1842년에서 1845년까지 시무하였고, 그 다음에는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스위스인 사무엘 고바트(Gobat)가 시무했다. 그는 몇 해 전에 에티오피아에서 영국성공회 선교사로 선교했었다. 그가 예루살렘 교회의 협동감독이 되어서 동방정교회 교인들을 영국성공회 교인이 되게 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리하여 1886년에 러시아정교회와 영국성공회 사이의 협력구조가 없어진 후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직은 영국성공회에 속하였다.

2. 아프리카

시에라리온 아프리카 서북 해안에 있는 시에라리온(Sierra Leone)은 높은 산과 낮은 평지가 있는 땅이었다. 도망쳐서 런던과 리버풀(Liverpool) 항구에서 불쌍하게 우거하던 아프리카 출신 니그로(Negro)들을 영국 정부는 강제로 수감하지 않고 다른 지역으로 이주케 하려는 결정을 내렸다. 그리하여 박애주의 독지가들이 이들을 정주시킬 땅으로 아프리카 시에라리온의 땅을 구입해 1787년에 제1차로 400명의 니그로들을 정주시켰다. 그리고 1792년에는 캐나다에서 해방된 니그로 1,100명이 이곳으로 왔고 1808년에는 영국 정부가 이곳을 영국의 식민지로 정하고 통치하였다. 그 니그로들이 정착할 때 원주민들과 아랍인 노예상들 때문에 고통을 많이 받았다. 계속해서 해방된 노예들 니그로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1846년에는 50,000명이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이 쓰던 말은 117가지여서 소통에 어려움이 많았다. 그들 중에는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많았다.

1795년에 최초의 선교사 두 명이 시에라리온에 왔고 영국의 여러 선교회도 많은 선교사를 파송했다. 영국성공회 선교회가 가장 많은 선교사를 보냈다. 이 선교사들은 그곳 원주민들 선교에 주력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기후가 나빠서 여러가지 질병에 걸려 많은 선교사들과 백인들이 죽었다. 그리하여 이곳이 ‘백인의 무덤’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원주민들이 노예상에게 팔려 갔는데 그들의 아이들을 선교사들이 가르치는 학교사업이 성과를 거두었을 뿐이었다. 최초의 선교사 피터 그레이그(Peter Greig)가 노예상에게 살해되었고, 학교는 추장과 노예상들 때문에 결국 폐교되었다.

노예상들의 사업이 계속 성세를 보이자 영국 정부도 노예해방정책을 가지고 노예상들을 압박하였다. 영국 해군이 노예상들의 상선을 억류하여 선교사들이 시에라리온에서 선교사역을 잘 할 수 있도록 도왔다. 1825년에 시에라리온의 니그로 인구는 18,000명이었다. 선교사들은 그들을 위하여 학교를 짓고 교회도 세웠다.

가나 가나(Ghana)의 요루바(Yoruba)라는 한 시의 시장 소데케(Sodeke)가 시에라리온에 와서 살고 있던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는 영국 선교사들을 환영하였고, 내란으로 곤욕을 치르고 있던 때 영국 정부의 보호를 받고 싶어 했다. 1828년에 바젤선교회가 덴마크인과 협력해서 상업 목적으로 서해안에 와서 선교를 시작했다. 12년 동안 선교했으나 성과는 없이 선교사 무덤 여덟 곳만 남겼다. 그러나 안드레아 리스(Andrea Riis)는 끝까지 버티면서 선교하였다. 학교를 세워서 교육사업의 성과가 있었고 아프리카 언어 연구에 노력하였다. 바젤선교회는 농업 발전을 지도하여 그곳 기후에 적합한 코코아 재배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19세기 말에는 세계에서 가나가 코코아 생산에서 첫째가는 나라가 되게 했다.

영국의 감리교 선교사 토마스 B. 프리만(Freeman)이 1842년에 가나에 선교사로 왔다. 그는 영국에서 아프리카인 부친과 영국인 모친 사이에서 자라났다. 그가 가나에 와서 선교하면서 기후는 나쁘고 사역은 힘든 가운데서도 건강한 체격으로 이겨냈으나 그의 동료들은 질병으로 많이 죽었다. 그는 가나인들에게 친절하였고 그들의 풍습을 존경하고 추장을 존경하여 사람들에게서 환영을 받았다. 그는 신자들이 스스로 선교해서 아프리카 선교는 아프리카인의 힘으로 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프리만은 가나에 웨슬리의 전통을 이은 감리교단을 만들고 신학교를 세웠고, 가나의 국민운동과 문화발전에 큰 공을 세웠다.

1843년에는 영국성공회 선교회가 가나 선교를 결의하여 1846년에 3명의 선교사가 가족을 데리고 왔다. 선교단장 헨리 타운센드(Townsend)와 함께 온 선교사 사무엘 크로우테르(Crowther)는 가나의 요루바(Yoruba)인이었다. 크로우테르는 노예로 팔려갔던 가족을 25년 만에 다시 만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와 같이 시에라리온에서 자유롭게 살다가 고향을 찾아와서 가족과 만난 경우가 많았다.

요루바 종족이 17년 동안 영국과 전쟁 상태 끝에 1800년에 전쟁을 끝내고 선교사들의 중재로 영국의 통치를 수용하기로 하였다.

나이지리아 나이지리아(Nigeria)는 영국의 네 배가 되는 큰 나라이고 북쪽에는 무슬림들이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동쪽과 서쪽에는 수많은 부족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이 쓰는 말도 수없이 많았다. 오랫동안 유럽의 여러 나라들과 통상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노예상들이 상당히 많았다.

나이지리아에 처음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인들은 시에라리온에서 온 해방된 노예 니그로들이었다. 이들이 자기들의 모국을 찾아 온 것이었다. 이들이 시에라리온에 있는 선교사들에게 편지해서 나이지리아 선교를 요청하였다.

그리하여 1842년에 영국성공회 선교사 헨리 타운센드가 시에라리온에 와서 나이지리아 지방을 순방하고 돌아갔다가 1844년에 사무엘 크로우테르와 다른 몇 사람을 선교대원으로 만들어 나이지리아의 요루바 부족들이 많이 사는 곳에 선교를 시작했다. 크로우테르는 여기서 자기의 어머니와 누이들을 만났다. 그리하여 그의 가족이 나이지리아 최초의 신자들이 되었고 그는 자기 어머니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한동안 선교가 계속되다가 그 지방 추장의 박해가 있었으나 선교가 다시 시작되어 교회가 빨리 성장해 갔다. 나이지리아의 최대 도시 이바단(Ibadan)에 선교부를 설치하였고 T. B. 프리만의 지도 아래서 나이지리아의 감리교회는 왕성해져 갔다.

1846년에는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가 나이지리아 칼라바(Calaba)에 선교를 시작하였다. 이 지역에는 강이 많고 부족 수도 많았다. 선교단장 호프 와델(Hope Waddell)은 자메이카(Jamaica)에서 선교한 경력을 가지고 있었다. 와델의 선교단에는 자메이카인과 니그로 흑인 혈통의 사람들이 있었다. 이렇게 피가 다르지만 이들이 아프리카 선교를 위하여 빛나는 공헌을 하였다.

케이프타운 홀랜드의 더치(Dutch) 식민회사가 1652년에 아프리카 남단에 군항(軍港)을 설치하여 식민개척 거점으로 삼은 후 홀랜드 사람들과 다른 부족의 사람들이 살기 시작하여 그 수가 날로 불어 갔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에 백인 인구가 21,000명이 되었다. 이 지역에는 서부 아프리카보다 살기 좋은 자연 여건이 있어서 식민인구가 격증해 갔다. 그리하여 많은 농토를 백인들이 소유하고 경작하면서 원주민 흑인들을 학대하고 인종차별 하였다.

1737년에 모라비아 교회 선교사들이 이곳에 와서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전도하기 시작했는데 1744년에 그 교회 지도자 조지 슈미트(Schmidt)가 홀랜드인들에게서 쫓겨났다. 1792년에 다시 모라비아 선교단이 이곳에 왔는데 한 여인이 슈미트 선교사로부터 받은 성경책을 지니고 있는 것을 보았다.

1795년에 나폴레옹 전쟁이 일어났을 때 케이프타운의 더치 식민지가 영국의 소유가 되어버렸고 1960년에 남아프리카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까지 영국 식민지였다. 그리하여 영국 식민 통치 아래서 영국 그리스도인들이 선교사역을 주도하였으나, 홀랜드인들과 그들의 교회와 그들이 세운 신학교와 교육기관들이 공존하였다.

런던선교회가 영국이 케이프타운을 점령하기 시작할 때부터 선교하기 시작하였다. 더치 의료선교사 존 반데켐프(Vanderkemp)가 런던선교회에 속하여 봉사하기 위하여 1799년에 왔다. 그는 3명의 친구들과 함께 남아프리카 지방의 한 종족 반투(Bantu)족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사역하였다. 반투족은 용감하고 호전적인 부족이며 백인들에 대한 적대심이 많았다. 그는 특히 호텐토스(Hotentos)인들을 위한 한 피난도시를 케이프타운에서 약 400마일 떨어진 곳에 만들었다. 그리하여 압제를 받는 원주민들의 권리를 옹호하려 하였는데 식민주의자들로부터 의심을 많이 사게 되어 괴로움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와 3인의 동료들이 다 아프리카 원주민 여자들과 결혼하였다. 그 지역의 백인들이 그들의 선교사역에 심한 적개심을 갖게 되었다. 반데켐프는 1811년에 사망하였다. 그는 남아프리카 선교의 선구자로서 흑백인종차별을 철폐하려는 과감한 선교정책을 택하였다. 남아공화국에서 영국인보다 홀랜드인들의 인종차별이 더 심하였다. 그들은 네덜란드의 칼뱅주의 개혁파교회 교인들로서 칼뱅의 예정사상을 오용하여 흑인들은 예정을 받지 못한 멸망할 인종이라고 믿고 차별하였다.

백인의 흑인 차별을 반대한 다른 한 선교사는 존 필립(John Philip) 목사였다. 그도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와서 원주민 흑인들도 평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고, 그들이 교육을 받아 자기들의 능력을 드러낼 수 있게 하라고 주장하였다. 필립 선교사의 주장이 영국 본국에서 큰 반응을 일으켜서 영국 정부의 정책에 변화를 주었다. 그리고 그의 영향으로 영국인 지배 아래서 살지 못하겠다고 하여 이리저리 떠다니던 많은 보어족(Boer) 사람들을 위하여 오랜지 자유 주(Orange Free State)와 트란스발(Transvaal) 주가 생기게 되었다.

런던선교회가 파송한 다른 한 선교선구자는 로버트 모패트(Moffat, 1795~1883)였다. 그는 21세 때 파송을 받았다. 그는 정식 신학교육을 받지 못하였으나 탁월한 선교업적을 남긴 사람이었다. 그가 파송받은 쿠르만(Kuruman)에서 48년 동안 배쿠안아(Bechuana)족을 위하여 사역했다. 그는 밭에 물을 대는 긴 운하가 있는 곳에서 농사하는 그곳 사람들의 게으르고 우유부단한 습성을 자기의 근면을 모범으로 보여서 개선시켰다.

모패트는 원주민들의 말을 배우기로 결심하여 그 어려운 말을 완전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의 말 츠와나(Tswana)는 글자가 없이 쓰던 원주민 말이었다. 언어학 지식이 전혀 없는 그가 그 말의 소리를 듣고 글자를 써서 한 새로운 문법을 만들고, 츠와나 어휘를 가지고 성서를 번역하기 시작하였다. 어려운 문제가 많았지만 1857년경에 츠와나 말로 성서번역을 끝냈다. 그에 대한 주민들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져서 신자가 된 사람이 많아지고 1829년에 처음으로 세례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모패트는 원주민들의 재래 종교나 전통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이 그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정열적으로 가르쳤다. 그는 아프리카인들의 독립심과 자주성을 억누르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는 원시적이고 단순한 생활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문명의 자유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받아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유럽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일러주었다.

리빙스톤 모패트의 선교업적을 능가한 위대한 아프리카 선교의 선구자는 바로 그의 사위 데이비드 리빙스톤(David Livingstone, 1813~1873)이었다. 리빙스톤은 스코틀랜드의 한 가난하지만 경건한 신앙가정에서 태어났다. 글래스고(Glasgow) 근처의 한 작은 공장지대에 살면서 어려서 면직공장에서 일하면서 야간학교에 다녔다. 신앙이 자라면서 그는 의사가 되어 중국에 가서 선교할 생각을 했다. 그리하여 신학공부와 의학공부를 겸하여 가지고 런던선교회에 선교사 지망을 했다. 그런데 그때 영국과 중국이 전쟁하고 있어서 1841년에는 남아프리카로 가게 되었는데 로버트 모패트 선교사에게서 그의 남아프리카 선교 이야기를 듣고 감명을 받았다. 리빙스톤은 모패트의 딸과 결혼하였다. 이 무렵 남아프리카에는 선교사들이 너무 많았다.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의 오지를 탐험하며 선교사들이 없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모험심을 가졌다. 그는 아프리카인들을 길잡이와 수행원으로 삼아 보츠와나(Botswana)에 가서 반투(Bantu)족의 퀘나(Qwena)의 추장 세켈레(Sechele)를 만나 친교를 맺어 그가 리빙스톤의 사역에 큰 도움이 되었다. 거기서 그는 6개월 동안 그 부족 말을 배우고 그들의 생활을 익혔다. 그는 런던선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자기 부인과 함께 추장의 동네에서 같이 생활하였고 추장이 회심하고 예수를 믿게 되었다. 추장 세켈레는 날마다 성서를 읽으며 신실한 신자가 되어 리빙스톤의 사역을 도왔다. 그런데 리빙스톤이 보츠와나의 국경지대에 사는 보어족의 공격을 받았다. 이때 세켈레는 리빙스톤에게 더 광범한 선교사역지를 소개하여 주었다. 거기에는 큰 호수가 있고 강력한 세력을 가진 한 추장이 북쪽에 있는데 그곳이 아프리카 복음화의 적지라는 것이었다. 리빙스톤은 1849년에 사냥꾼 두 명을 데리고 사막을 지나서 나가미(Nagami) 호수를 발견했다. 그는 큰 강물이 북쪽에서 이 호수로 흘러들어 오는 것을 보고 오지에 들어가서 복음을 전파할 대로를 발견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수개월이 지나 리빙스톤은 제2차 탐험을 자기 부인과 아이 셋을 데리고 떠났다. 그런데 아이들이 병에 걸려서 곧 돌아와서 1851년에 다시 탐험을 떠났다. 이때 그가 만난 추장은 쭐루(Zulu) 부족의 하나인 마콜로로(Makololo)족의 세베투와네(Sebetwane)였다. 연로한 쭐루 추장은 이 유럽인이 처자식을 데리고 용감하게 이 오지까지 온 것에 감명하여 리빙스톤과 친선관계를 맺었다. 리빙스톤은 가족을 유럽으로 돌려보내고 자기가 2~3년 동안 혼자 남아서 복음전파의 길을 찾기 위하여 그 큰 강을 끼고 탐험하기로 했다. 그는 북쪽으로 잠베지(Zambezi) 지역을 개척하였다.

리빙스톤은 1852~1856년 사이에 잠베지에서 사역하면서 복음을 전했고 노예매매사업을 저지하는 일을 했다. 그는 2년 반 동안 여러 지역을 여행했고 루안다(Luanda)에까지 여행하면서 유럽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이 넓은 대륙을 동서남북으로 여행하였다. 때로 120명의 병사가 자기와 동행하여 주었다. 리빙스톤의 중앙아프리카 탐험의 명성이 유럽, 특히 영국에 알려져서 런던선교회는 잠베지 마콜로로(Makololo)에 선교사 2명을 파송하기로 했다. 그리고 케임브리지 대학과 옥스퍼드대학이 중앙아프리카선교회(UMCA)를 조직하였으므로 리빙스톤은 크게 감격하였다.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에서 노예매매사업을 없애기 위해서는 다른 산업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잠베지 고원에 영국의 목면생산업을 유치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하여 영국인 노동자들이 이곳으로 오되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이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잠베지의 산업과 상업의 발달의 길을 열었다.

리빙스톤은 아프리카의 비인도적인 노예상의 악덕과 함께 빈곤과 무지를 격퇴하기 위하여 복음전파의 일을 뒤로 미루어도 무방하다는 생각으로 런던선교회와의 관계를 끊고 영국 정부의 한 공사로서 활약하였고, 중앙아프리카에 유럽 국가들이 진출하게 하였다.

리빙스톤은 나일강 유역을 탐험하여 강의 상류를 찾기 위하여 콩고(Congo)와 잠베지 일대의 지도를 만드는 작업을 하였다. 그는 선교사역을 하면서 노예무역을 억지하려는 의도를 가졌다. 그의 탐험단에는 아프리카인들의 여러 그룹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노예에서 해방된 그리스도인 소수가 있었다. 그는 강들과 호수들을 두루 찾아다니다가 아랍인 노예상들에게 식량을 도적맞기도 하였고 그가 복용하던 약이 끊겨서 죽을 뻔한 적도 많았다. 잠비아(Zambia) 북부에 자리잡은 일라라(Ilala) 캠프에서 리빙스톤이 시체로 발견되었다. 허리를 굽히고 기도하는 자세로 죽어 있었다. 사람들이 그의 심장을 떼어서 아프리카 땅에 묻었고 그의 시체는 선편으로 영국에 이송되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그의 석관에 새겨진 말은 그가 죽기 1년 전에 뉴욕헤럴드(New York Herald) 신문사에 써 보낸 편지에 있는 그의 말이었다. “고독 속에 내가 부언하고자 하는 말이 있다. 이 세계가 다 알고 있는 이 아픔을 치유하는 일에 도움을 주는 모든 사람들, 미국인이든 영국인이든 혹은 터키인이든 간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풍성한 축복이 내리시기를 바란다.” 리빙스톤의 사망 한 해 후에 영국 정부는 노예매매사업을 중지시키는 법을 만들었다.

리빙스톤이 죽은 후 스탠리(Henry M. Stanley)가 아프리카 적도지역을 따라 가장 깊은 오지를 탐험하는 길을 떠났다. 그의 탐험은 999일을 소요했다. 그는 빅토리아 호수, 탕가니카 호수 등지를 두루 탐사하였고 강을 따라 대서양까지 가면서 마침내 콩고 강 물줄기를 발견했다. 또 그는 주로 적도에 위치한 수단과 잠베지 사이의 광활한 지역을 유럽의 아프리카 정복자들에게 소개했다. 스탠리는 자신이 발견한 콩고에 와서 개척하기를 영국에 격려했으나 벨기에(Belgium)가 관심을 보였다.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Leopold Ⅱ)가 이곳에 작은 식민지를 건설하기로 했는데 스탠리도 동참했다. 영국 교회의 선교회들이 초교파적으로 「리빙스톤 내륙선교회」(Livingstone Inland Mission)를 조직하여 1878년에 마타디(Matadi)에 선교사를 파송하였고, 같은 해에 「영국 침례교 선교회」가 조직되어 사오 살바도(Sao Salvado)에 선교기지가 마련됐다. 살바도에는 천주교가 두 선교사를 파송하여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 국민들이 가톨릭 선교를 환영하였고 침례교 선교를 멀리했다. 천주교 선교사들은 「홀리 고스트 파더즈」(The Holy Ghost Fathers)라는 선교단체에 속해 있었다. 그들이 스탠리와 만났는데 스탠리가 개척자금이 부족해서 개척기지를 만들지 못하였을 때 그 신부들은 포르투갈 정부의 자금을 얻어 선교기지를 세웠다. 스탠리가 탐험하며 길을 닦는 도로공사를 했을 때 프랑스의 탐험관과 부딪치는 일이 많았다.

스탠리는 1881년에 마코코(Makoko)의 추장을 만나 그 지방에 개척기지를 만드는 허락을 받고 킨샤사(Kinshasa)에서 5마일 떨어져 있는 레오폴드빌(Leopoldvill)에 침례교 선교회 선교사들과 리빙스톤 선교회 선교사들을 불러들여 선교하게 했다. 이때 리빙스톤 선교회는 미국 침례교회 운영으로 넘어갔다. 그리고 콩고의 남부에는 스웨덴 선교회가 와서 선교하였다.

스탠리는 벨기에의 왕의 후원으로 탐험하여 1884년에 개척한 지역들을 연합하였는데 이를 위해 2,000명의 추장들과 400가지 조약을 체결하였다. 그 추장들과 연합한 기구가 「콩고국제협회」(Association Internationale du Congo, A.I.C.)였는데 이것은 리베리아국(Liberia)과 같은 니그로 국가(Negro State) 건설이었다. 벨기에 국왕은 이 작은 나라에서 식민통치를 시작하였는데 독일은 반대하였고 프랑스는 영토의 일부를 차지하고자 했다. 1884년 독일 베를린에서 회의를 열고 콩고의 독립국가를 승인하였다. 벨기에는 콩고에 교회를 세우고 선교를 지원하였다.

아프리카에서는 리빙스톤의 탐험 이래로 구미 각국의 탐험단이 각각 영지를 확보하고 식민지를 세웠다. 콩고는 벨기에의 영토가 되었고, 포르투갈은 앙골라를, 프랑스는 적도지역을, 독일은 카메룬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케냐 아프리카 동해 연안은 유럽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유럽의 식민국가들의 진출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1869년에 수에즈 운하가 건설된 후에는 사정이 달라졌다. 모잠비크(Mozambique) 이북의 전 해안선 지역은 오만(Oman)의 술탄(Sultan)의 이슬람 정권의 지배 아래 있었다. 1841년 술탄은 잔지바(Zanzibar) 섬에 정주하고 영국과 프랑스와 미국과의 무역을 제의하였다. 그리고 술탄은 구미의 국가의 상사들과 함께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이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였다. 1844년에 선교사로서 처음 들어온 요한 L. 카라프(Karaph)는 케냐(Kenya)의 항구 몸바사(Mombasa)에 정착했다. 그는 영국의 성공회 선교회의 파송을 받았다. 그가 몸바사에 온 지 두 달 만에 부인과 아이가 병사했다. 그는 동역할 선교사를 기다리는 2년 동안에 스와힐리어(Swahili)로 신약성서를 번역했다. 그는 동역자 존 렙만(J. Rebmann)이 왔을 때 같이 동해안에 살던 아프리카인 부족의 하나인 기리아마족(Giriama)에게 가서 복음을 전했으나 실패하였다. 20여 년간 사역했으나 다만 회심자 6명을 얻었을 뿐이었다.

카라프는 선교회에 제안해서 몸바사에서 서부 아프리카까지 연결하는 넓은 선교지역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카라프와 렙만은 1847년에서 1851년 사이에 탐험여행을 했다. 그들은 탄자니아의 킬리만자로 산정이 흰눈으로 덮인 것을 보고 신기해했다. 이 지역에는 아랍인 노예상들도 접근할 수 없는 곳이 있어서 서양 선교사가 통과하기 어려운 곳이 있었다. 다행히도 카라프는 캄바(Kamba)족의 추장 키보이(Kivoi)와 친하게 되었는데 그는 자기 고장에서 몸바사 항구 사이를 오가며 교역하던 사람이었다. 그는 다른 지역을 소개해 주었는데 케냐 산(Mt. Kenya)이 있는 지방으로 카라프를 인도하여 탐험에 나섰다. 그런데 원주민 도적떼들로부터 습격을 받아 키보이는 창에 찔려 죽었다. 카라프는 그들을 죽이는 것이 양심에 걸려서 공포를 쏘았다. 다행히 그는 살해되지 않았다.

1853년에 카라프는 건강이 나빠져서 유럽으로 돌아왔다. 렙만은 20년을 더 사역하면서 성서번역과 저술을 위하여 노력했다. 렙만은 파송된 다른 한 선교사와 같이 내륙지역으로 들어가려다가 실패하고 1880년경에 킬리만자로 산 지방으로 다시 가서 모시(Moshi)에 선교기지를 만들었다. 이 지역에서 가장 사나운 부족은 마사이(Maasai)족이었는데 외부인이 그들의 지역에 들어가는 것은 물론 그 지역을 통과하기만 해도 생명의 위험이 있었다. 영국이 케냐를 식민지로 만든 이후에 영국에서 먼저 성공회와 장로교 선교가 시작되었다.

마다가스카르 마다가스카르(Madagascar)는 아프리카의 일부로 보기에는 어려우나 아프리카에서 가까운 큰 섬이다. 주민들은 말라야인과 비슷하다. 이 섬에 일찍부터 선교가 시도됐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1818년에 런던선교회가 다시 사역을 시작하여 1820년에 선교단을 파송하였으나 데이비드 존스(D. Jones)만이 살아남고 그의 아내와 아이와 동료들이 다 살해되었다. 그는 마다가스카르의 수도에 가서 라다마(Radama) 왕을 만났다. 왕은 선교사의 전하는 종교에 대한 흥미는 없고 선교사를 통하여 서양의 물건을 구하려 했다. 그리하여 존스는 런던선교회에 편지해서 수공업기술을 가진 선교사들을 파송받아서 현지인들에게 공업기술도 가르치고 복음도 전할 수 있게 하였다.

왕의 후원을 받아 선교사역이 순조로워서 1831년에 회심자가 28명이 생겼고, 1835년에 왕 라다마가 죽고 그의 아내 라나발로나(Ranavalona)가 왕위에 올라 그리스도교 선교를 박해하였다. 여왕은 병사들에게 명령하길,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체포하여 손발을 묶고 웅덩이 속에 집어넣어 그 속에 끓는 기름을 부어서 죽이라고 했다. 200명 정도의 신자가 희생되었다. 1861년 그 여왕이 죽을 때까지 박해가 계속되어 수백 명이 더 살해되었다. 그러나 그 여왕의 사후에 추방되어 방랑하면서 살던 남녀 그리스도인들이 돌아왔다. 더러는 얼굴과 몸에 상처가 생긴 채로 나타났고 더러는 기근 상태에서 해골처럼 된 모습이었다. 시민들이 그들을 환영하며 맞아들이고 그리스도인의 형제애를 회복하였고, 박해 때 그리스도인 수의 네 배가 넘는 신자들이 모여서 찬송을 불렀다. 이렇게 숨어 있던 신자들이 많았던 것은 신약성서가 번역되어 있어서 그것을 신자들이 손으로 베껴 써서 돌려서 읽었기 때문이었다. 이 섬에 처음에 온 선교사들이 그 섬나라의 말을 배워서 성서를 일찍 번역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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