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분 : 한국복음주의협의회 11월 월례발표회 발제문
일시 및 장소 : 2011년 11월 11일, 화평교회
발제 : 조동진 (통일환경연구원장)
자료 출처 : 한국복음주의협의회
3년이 지나면 국토분단 70주년을 맞게 됩니다. 신구약 성경에서 40과 70은 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광야 40년을 거쳐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갑니다. 또한 바벨론 포로 70년 만에 유대 민족은 그들의 조국에 돌아가 수도 예루살렘에 성전을 재건합니다. 우리는 분단 70년을 맞게 되는 2015년 전에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의 역사가 종식되도록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앞에 간곡히 기도해야 됩니다.
1.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의 원인 제공자
우리는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의 역사 종식을 위하여 먼저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의 원인을 바로 알아야만 합니다.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의 원인 제공자는 미국입니다.
김영삼 정권에서 통일원 장관으로 부총리를 지낸 한완상 박사는 1985년 국토 분단 40주년을 맞는 해에 <아! 부끄러운 짝사랑 40년>이라는 글을 월간조선에 실었습니다. 한국의 양심적 지식인으로 널리 일려진 한완상 박사는 그 글에서 1905년 7월 29일 가쯔라-데프트를 통한 루즈벨트 비밀협약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을 통하여 한국이 미국에 팔아넘겨진 역사적 사실을 증언합니다. 다음은 한완상 박사의 글을 참고한 것입니다. 이 비밀협약은 한국의 사망증명서에 날인(to seal Korea's death warrant)을 한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미국은 19세기 대서양 국가에서 태평양 국가로 전환하기 위하여 동진정책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1864년 점령한 것이 하와이 섬들입니다. 하와이에서도 더 동쪽으로 가기를 원하여 스페인령의 필리핀 섬들도 점령하고 일본을 바라보게 된 것이 1900년 초입니다.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에서 대 중국을 패망시키고 승전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1904년부터 1905년까지의 러일전쟁에서 러시아를 패전시킨 세계 최강의 군사국가로 등장합니다. 이 때 미국 대통령 시어도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는 자신의 심복인 육군성장관 테프트 (William Howard Taft) 장군을 일본으로 보내 일본 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郞)를 만나 필리핀에서의 미국 지배권을 일본이 승인하는 대신 조선반도를 일본이 지배할 권리를 인정하는 루즈벨트의 가쯔라와 테프트의 밀회를 통한 밀약(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 through Katsura-Taft Secret Meeting)을 맺습니다. 이것은 1905년 7월 29일의 일입니다.
이것이 1882년 한국과 미국이 체결한 조미수호조약을 위반하고 한국을 일본에 팔아넘긴 추악하고 부끄러운 한미관계의 시작입니다.
1905년 루즈벨트의 가쓰라-테프트 밀약이 있은 지 40년이 되는 1945년 8월,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에 패망하던 때 미국은 또 다시 한국 민족에게 부끄러운 죄를 짓게 됩니다. 미국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일본은 미국에 항복할 뜻을 밝혔습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소련은 8월 8일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고 소련 극동군으로 중국 만주에 있는 일본 관동군을 공격했습니다.
미국은 소련이 일본을 점령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소련군을 만주와 조선의 38도선 북부를 관할하는 관동군 지역을 점령하도록 하고 일본 본토와 조선의 38도선 이남은 자신들이 점령하겠다고 소련에 제안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1945년 8월 10일 밤 미 국무성과 국방성의 딘 러스크(Dean Rusk) 대령과 찰스 본스틸(Charles Bonsteel) 두 사람이 만든 미소 점령지역 계획안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지 이틀 밖에 안 되는 소련은 두 말 없이 이 소련에 유리한 제안을 수락하였습니다.
미국은 한국을 패전국 일본의 식민지 영토를 점령한 점령군이지, 한국의 해방과 독립을 위한 해방군으로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증거는 뒤늦게 9월 8일이 되어서야 인천에 상륙한 미군 제24군단 사령관 하지 중장의 첫 포고문에 “미군은 조선의 38도선이남 일본 식민지 조선의 점령군이다”라고 한 포고문 내용에 나타나 있습니다.
미군은 조선의 점령군으로서 항복한 일본 정부의 조선총독부에 계속적인 행정 책임을 계속 맡기고 일제 앞잡이 조선인 관리들과 경찰들에게 모든 행정과 경찰 업무를 위임했습니다. 한 달 후 미군은 아놀드(A. V. Arnold) 소장을 군정장관으로 임명한 후에도 총독부 고위 일본 관료들을 군정고문으로 임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영어만이 조선 점령 통치의 공용어임을 선포했습니다.
이러한 미국의 과오는 종전 후 남한에서 친일 매국 세력이 친미파가 되는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이것이 남한 사회 통치권이 친일파와 그 후손들에게로 넘어가도록 만든 것이 미국의 책임이 되는 이유입니다.
국제연합(UN) 총회는 종전 후 2년이 지난 1947년 11월 24일, 한국 독립에 관한 문제 (The Problem of the Independence of Korea)를 공식으로 결의합니다. UN 총회는 “한국민의 자유와 독립을 원하는 주장은 합법적이고 정단한 것이다”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한국의 재건과 독립을 위하여 모든 점령군은 신속히 철수해야 한다”고 결의하였습니다. UN 총회는 점령군의 철수 없이는 한국민의 자유의사에 의한 대표선정과 정부수립이 불가능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1948년 3월 31일 전에 비밀투표를 통한 자유선거를 할 수 있도록 감시하기 위한 UN한국임시위원회(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를 구성하였습니다. 임시위원단은 “호주와 캐나다, 자유중국(대만), 프랑스, 엘살바도르, 시리아, 필리핀, 인도, 그리고 우크라이나 소비에트연방 등 10개국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미국은 남한 점령군을 존속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제외되었지만 소련은 이미 북한에서 철수하였기 때문에 UN한국임시위원회에 포함되었습니다.
UN한국임시위원회는 3분의 2 찬성으로만 모든 결의를 할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호주, 필리핀, 캐나다, 프랑스, 대만, 엘살바도르 여섯 나라는 미국편으로 만들 수 있었지만, 나머지 네 나라 중 중립국인 인도를 회유해야만 UN한국임시위원회를 미국의 뜻대로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미국은 한국의 여성 지도자였던 모윤숙을 이용해 섹스외교를 하여 인도 대표를 포섭하도록 했습니다.
1946년 3월부터, 미국은 이승만을 시켜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도록 했습니다. 미국은 북한이 UN한국임시위원회의 입북을 허락하지 않는다면서 위원단의 입북을 가로 막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훗날 거짓임이 들어납니다. 단독정부 수립을 거부하고 남북 점령군의 철수와 남북 동시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김구 주석과 김규식 박사를 이북이 초청하였기 때문입니다.
주한 미군은 친일파 친미 정당인 한민당을 통하여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게 하다가 호남과 영남 일부의 매국 친일파로 구성된 한민당 안의 유일한 황해도 출신으로 김구 주석의 제자였던 정치부장 장덕수가 계속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므로, 당수 김성수의 침모 아들인 종로경찰서 박광옥 경사를 시켜 장덕수를 암살합니다.
미군과 한민당은 도리어 장덕수를 암살한 것이 김구 주석의 한독당 일파라면서 임시정부 김구 주석 직계 한독당 간부 여덟 명을 체포하여 용산 이태원에 있는 미군 형무소에 수감합니다. 그리고 여운형과 송진우의 암살범이 한국 민간 법원에서 재판을 받은 것과는 달리, 미군사재판을 통해 암살자 박광옥과는 일면식도 없는 김구 주석 직계 여덟 명에게 사형을 언도합니다. 이들은 UN임시위원단이 입국한 지 열흘만인 1947년 12월 7일에 체포되어 1948년 4월 2일에 교수형을 언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 주석과 김규식 박사는 1948년 4월 19일 평양을 방문하여 남북 양측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기로 합의하게 됩니다.
그러나 미국과 한민당이 합세한 반통일세력들은 1948년 5월 10일 남한만의 선거를 통하여 한국을 반신불수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미국의 앞잡이 이승만은 1949년 6월 26일, 육군 소위 안두희를 경교장으로 보내어 백주에 김구 주석을 시해하였습니다. 그럼에도 패역무도한 살인범 안두희는 육군대령까지 승진하게 만들었습니다.
1950년 6월 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 또한 미국이 전쟁의 원인 제공자입니다.
1948년 남한 정부 수립 후에는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에서 한국을 제외시키고 일본과 오키나와와 대만만을 포함하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함으로써 소련이 북한을 부추겨 남한을 침공할 야욕을 품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1950년 6.25전쟁의 원인이 된 것입니다.
미국은 6.25로 한국의 정부가 부산으로 피난한 후인 7월 7일에야 UN을 부추겨 소련 대표가 결석한 기회를 타서 안전보장이사회를 열어 미군이 UN군이라는 이름으로 이북에 선전포고를 하게 하였습니다. 미군 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소위 UN군은 부산을 제외한 남한 전국토를 북한군에게 내어주었다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38선을 넘어 압록강까지 갔었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밀려 내려오는 중국군에 쫓겨 또 다시 서울을 중국군에게 넘겨주었습니다.
1953년 7월에 미국은 중국군과 북한군의 휴전협상 제안을 받아들여 휴전협정을 맺었습니다. 중국군은 즉시 북한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휴전 58년이 넘도록 남한에 남아있고, 휴전협정은 그대로 지속되었으며 미국은 북한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끝내 반대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1945년 종전 이후 63년 동안 미국이 한국 강토에 UN군이라는 이름으로 군대를 주둔시키고 모든 작전권을 행사하고 있는 역사적 현실입니다.
2. 미국이라는 나라의 실체
이제 한국 민족에게 치욕을 안겨 준 미국이라는 나라가 시작된 미국 건국 역사의 근원과 그 이후를 더듬어 보아야겠습니다.
미국의 양심적 지식인으로 세계에 널리 알려진 진보적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은 미국을 “세계에서 가장 오만한 제국”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미국을 “4천만 명이나 되는 흑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노예무역을 통해 건설된 오만한 제국”이라고 말합니다.
또 다른 세계적으로 명망 높은 미국의 양심적 지식인 노암 촘스키(Noam Chomsky)는 미국을 “세계 최악의 야만적 불량국가(Rogue States)”라고 지목합니다. 공화당 대통령 조지 부시가 2002년 1월 29일 핵폭발 실험을 하고 미국에 적대하려는 국가들, 곧 북한과 이라크, 이란을 가리켜 ‘악의 축(Axis of Evil)’이라고 칭한 이후 그해 5월 국무장관 볼튼이 시리아와 쿠바도 추가하여 악의 축에 속한다고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 대미 적대국가들은 모두 불량국가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촘스키는 이러한 일방적 패권주의 제국인 미국은 온 지구를 파멸시킬만한 엄청난 핵무기를 소유하면서도 약소국들의 핵물리학 연구를 정죄하는 야만적 불량국가라고 고발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건국 역사를 잘못 이해하고 있습니다. 미국은 미합중국의 시작을 1620년 영국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신대륙 아메리카를 찾아 매사추세츠 플리머스에 메이플라워호가 상륙한 때를 기준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역사 기록은 잘못된 것입니다.
플리머스에 상륙한 것은 영국의 청교도가 아니라 화란 국왕의 새로운 네덜란드 건설에 동원된 노역을 거부하던 일부 청교도 유민들과 유랑민들이었습니다. 실상은 그보다 13년 앞선 1607년에 영국 여왕의 출자로 아메리카 개척을 위해 버지니아에 상륙하여 런던의 제임스 강 이름을 딴 제임스타운을 건설한 것이 미국의 시작입니다. 이를 위하여 동원된 종신형 죄수들과 방랑자들로 깡패 두목들과 가정이 파괴된 홀아비들, 그리고 붙잡혀온 탈옥수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떠돌이들이었습니다.
그중에 존 스미스라는 최대 골칫거리 인물이 스스로 일당의 두목이 되어 영국의 신대륙 점령의 기수가 되어 미국을 건설하기 시작합니다. 이들은 미국의 원주민 인디언들을 모두 도륙하는 일부터 시작했습니다. 인디언들을 도륙하기 위하여 인디언 포로 한 명당 40 파운드의 상금을 걸었습니다. 그것을 법률로 정해 합법화시키기까지 했습니다. 1770년에는 인디언 머리가죽 한 장에 100 파운드로 올렸습니다. 펜실베이니아에서는 값이 더 올랐습니다. 1814년 미국 연방정부는 미국 전역의 인디언 족속의 머리가죽 한 장에 50달러로 정하는 법령이 공포되었습니다. 한 때 미국 대통령이었던 윌리암 해리슨은 1812년 인디언 추장 데쿰세의 머리가죽으로 면도날을 가는 가죽띠를 만들어 친구들과 나누어 가졌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이 미국 건국의 내면적 역사입니다.
3. 민족 분열 역사 종식과 평화통일을 위한 길
이제는 맑고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이라는 평화 민족의 자유와 평화를 동양의 군국정권 일본에 팔아넘긴 미국, 그리고 종전 후 이 땅을 점령하고 전쟁만을 부추긴 미국과의 관계를 바로 잡고 국토 분단과 민족 분열 역사의 종식의의 길을 찾아야겠습니다.
미국의 아시아 전문 저널리스트인 패트릭 스미스 (Patrick Smith)는 “20세기가 미국의 세기였다면, 21세기는 다른 누군가의 세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세기는 20세기로 끝났습니다. 지금은 탈서구, 아시아의 시대이며, 우리 민족은 그 선두에 서 있습니다.
지난 100년의 한미 관계는 한국을 일본에 팔아먹은 원수와의 동침 같은 부끄러운 관계였습니다.
오직 남은 길은 미국이 갈라놓은 한반도가 통일이 되도록 미국이 책임을 짐으로써 한미관계를 바로잡는 일입니다. 지난날의 오욕된 관계와 불공정한 관계, 불평등한 관계를 완전히 청산한 뒤에 미국은 남북통일의 책임을 짐으로써 통일된 한국과 새로운 관계를 다시 맺어야 합니다.
남한 정부는 우리보다 앞서 평화통일을 이루어 낸 독일을 배워야 합니다. 독일은 패전 독일의 전승국들인 네 개의 나라의 점령과 관할에서 벗어나서 그들이 갈라놓은 독일 국토와 민족의 통일을 이루기 위하여 네 개의 전승국들과 더불어 균등한 관계를 만드는 새로운 대로를 구축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Herbert Ernst Karl Frahm)의 신동방정책(Neue Ostpolitik)입니다. 신동방정책 20년, 독일은 통일을 반대하는 소련과 영국, 프랑스, 그리고 미국과 더불어 균등한 외교를 펼치고 어느 한쪽으로도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우리나라는 지난 60년 동안 친미 일변도의 종속 외교관계에만 매달려 주변국들인 러시아, 중국, 일본, 그리고 미국이라는 4개 국가와의 균등한 관계 맺기에 실패했습니다. 한완상 박사가 미국과 한국의 40년 관계를 “부끄러운 짝사랑 40년”이라는 글을 발표한 이후에도 27년이나 계속되고 있는 이 부끄러운 짝사랑, 친미 일변도의 종속외교를 이제는 끝내야 합니다. 그리고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 주변 4개국과 균등하고 평화로운 외교를 시작함으로 평화로운 민족통일을 이루어야만 합니다.
이 길만이 진정한 민족 화해와 평화통일로 가는 길입니다.
참고문헌
1. 한완상. “아, 부끄러운 짝사랑 40년” 월간조선, 1985.
2. 일본신문 <고꾸민: 國民>, 1905년 10월.
3. Dennett Taylor, "Theodore Roosevelt's Secret Pact with Japan", 1924.
4.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기정의 “동아시아 개입의 역사적 원형과 20세기 초 한미관계 연구”
5. 조동진, 「나는 사형수의 아들이었다」제1권, 제2권. 서울: 도서출판 동서선교연구개발원, 2011.
6. UN Documents. "Gathering a Boby of Global Agreements" from United Nations website.
7. 하워드 진, 「오만한 제국: Declaration of Independence from American Ideologies」 서울: 당대출판사, 2001.
8. 노암 촘스키, 「불량국가: Rogue States」 서울: 두레, 2001.
9. 브루스커밍스.「한국전쟁의 기원」서울: 일월서각, 20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