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는 지난 4일 한국기독자교수협의회와 한국교수불자연합회가 공동으로 주최한 학술대회 ‘믿음과 수행, 그 접점을 찾아서’에서 개신교 측에서 대표로 발제한 정재현 교수(연세대 신학과, 종교철학)의 발제문 <믿음과 삶- 기독교에서 수행이 지니는 뜻과 더불어> 전문을 그의 동의를 얻어 총 5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이 발제문에서 정 교수는 믿음이란 우리의 삶과 뗄려야 뗄 수 없는, 서로 밀접하게 얽혀 있는 관계임을 확인했습니다. 그러면서 깨달음 또는 행위/수행의 차원이 믿음에 대해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의 구성을 위한 본질과 정체임을 드러내고자 했습니다. 개신교 신학자로서 사뭇 그 성질이 상이한 것처럼 보이는 ‘믿음’과 ‘수행’ 간의 거리를 좁힐 뿐 아니라 그 접점을 찾은 것입니다.- 편집자주
▲정재현 연세대 신학과 교수. ⓒ베리타스 DB |
인간에게 종교란 무엇인가? 물어 마땅한 물음이지만 대답이 그리 간단하지는 않다. 게다가 ‘종교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앞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물어야 오히려 앞선 물음에 대한 대답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는 통찰도 주목해 마땅하다. 종교의 연원이 죽음을 넘어서려는 인간의 생존본능과 떼어놓을 수 없으니 죽음이 없었다면 종교도 없었을 것이라는 주장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네 발로 기어 다니면서 유한한 본능의 만족으로 살다가 앞의 두 발을 들어 ‘직립인간’(homo erectus)이 되면서 본능의 유한성을 넘어서게 되었으니 이전에 알지도 못했던 무한한 욕망이 심겨지면서 바로 이 욕망으로부터 무한성을 배우게 되었는데 새로 힐끗이라도 보게 된 무한과 겪을 수밖에 없는 죽음 사이를 이으려는 몸부림이 인간으로 하여금 ‘종교적 인간’이게 했던 것이라 하겠다.
말하자면 ‘종교적 인간’(homo religiosus)이라는 것은 이미 사람이라는 것이 그 무엇인가를 넘어서고 구하도록 생겨먹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물론 이도 삶의 자리에 따라 ‘믿음’과 ‘깨달음’으로 그 모양새를 달리 하기도 하니 전통과 문화의 다양한 꼴들은 그 좋은 증거가 된다. 신을 말하는 유태-그리스도-이슬람교와 같은 사막의 종교가 ‘믿음’으로 넘어서고자 한다면 힌두교-불교 등과 같은 초원의 종교는 ‘깨달음’을 구하는 것으로 비교되곤 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인간은 그렇게 생겨먹었을까? 도대체 사람은 그 무엇인가를 왜 구하는가? 본 연구가 관심하려는 기독교의 입장에서 묻는다면,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사람이 이미 그렇게 생겨먹었다는 것인가? 그런데 이런 물음을 새삼스러우나마 되묻지 않으면 우리는 이미 그렇게 생겨먹은 대로 살면서 믿는 것을 대단하고 심지어 거룩한 것인 양 착각하게 된다.
게다가 문제는 이게 단순히 착각에만 머무르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믿음과 얽힌 착각은 곧 자기를 절대화하고 심지어 신격화하는 데에까지 가려는 생리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이를 되돌아보지 않으면 그 무엇인가를 믿고 있는 자기 자신의 굴레로 더욱 파고들어가게 되고 결국 자기 자신이 무엇인가를 믿고 있다는 사실을 붙들고 늘어지게 된다. 즉 자기의 믿음을 믿게 되는데 자기의 믿음이란 곧 자기 자신이니 결국 자신을 믿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기 신앙이 자기 구원으로 이어지는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최소한 이런 자가당착으로부터라도 벗어나려면 믿음에 대해서 되돌아보는 것은 하면 좋고 안 해도 그만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안에서는 강박에 사로잡히고 타인과의 관계에서는 독단에 빠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확신이라는 이름으로!
그래서 믿음에 대해서 되돌아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되돌아 볼 수 있을까?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우리 믿음에 대해서 물음을 묻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그런데 믿음에 대해서 묻게 되면 이것이 또 의심이나 회의를 거쳐 불신앙에 빠지게 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를 하게 된다. 그래서인지 기독교 안에서는 물음이라는 것이 거의 없었다. 물음을 묻기 전에 이미 많은 대답들이 기라성같이 등장해 있으니 물음을 물을 겨를이 없기도 했지만 물음을 물을 필요도 없는 것처럼, 나아가 물어서는 안 될 것처럼 느껴지게 하기도 한다. 그동안 기독교는 물음표를 거부하고 마침표, 그리고 더욱 빈번하게는 느낌표를 남용해 왔다. 그러나 앞서 말한 이유를 보더라도 우리는 우리 믿음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에 대해서 물을 수 있을까? 물음을 나타내는 모든 의문사들이 믿음에 대해서 뜻이 있겠지만 여기서는 의문사들을 그 내용적인 연관성의 견지에서 몇 개의 물음으로 제한해서 살피고자 한다. 우선 ‘무엇’ 물음을 두 갈래로 물음으로써 믿음의 대상과 정체에 대해 되돌아보고, ‘왜’를 통해 그러한 믿음의 근거나 이유를 논하며, 나아가 ‘어떻게’라는 물음을 가지고 믿음의 방법에 새기고자 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믿음이라는 것이 삶과 동떨어져서는 믿음으로서조차 성립될 수 없음을 밝히게 될 것이고, 이로써 깨달음 또는 행위/수행의 차원이 믿음에 대해 부수적인 것이 아니라 믿음의 구성을 위한 본질과 정체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아울러 그러한 깨달음이나 수행이 은총에 대해 모순적이어야 할 이유가 없음도 함께 밝히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믿음에 대한 물음은 어디에서 시작해야 하는가? 이야기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첫째 물음은 당연히 ‘무엇’일 것이다. ‘무엇’이 있지 않고서는 나머지 물음은 물을 수도 없고 물을 필요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믿음과 관련하여 ‘무엇’을 물을라치면 우선 ‘무엇을 믿는가?’, 그리고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데 이 두 물음은 그 방향과 운명에서 서로 대조적이다. 앞의 물음이 바깥을 향한 것이라면 뒤 물음은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고, 앞 물음이 많이 물어지고 그보다 더 많은 대답을 지녀왔었다면 뒤 물음은 의심과 회의를 일으킬 수도 있다는 불순성의 혐의와 함께 오히려 억눌려져 왔었기 때문이다. 우선 순서대로 살펴보자.(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