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윤재 교수(이화여대 인문과학대학 기독교학과, 이화여대 대학교회 담임목사)
성경본문
에스겔 37:15-17, 에베소서 2:14-18, 마태복음 5:38-48 -
설교문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아침, 저는 뉴욕의 맨해튼에 있었습니다. 벌써 24년 전의 일이네요. 평소보다 조금 일찍 일어나 설레는 마음으로 새 학기 첫 수업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머리 위로 큰 비행기가 굉음을 내고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아, 저러다가 내 기숙사 옆 70미터나 되는 높은 교회 종탑에 부딪히기라도 하면 어떡하지?"하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세계무역센터에 불이 났다는 아내의 소리가 들렸습니다. 뛰어가 TV를 보니 정말 거기에서 시커먼 연기가 치솟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높은 건물에서도 불이 나는구나!"하며 저는 고층빌딩 화재를 다룬 영화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시커멓게 치솟는 연기 사이로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단순한 화재는 아닌가 보다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그 건물 뒤편의 쌍둥이 건물에서 어마어마한 화염이 하늘로 치솟았습니다. 지금은 다 아시지만, 첫 번째 비행기가 북쪽 타워를 친 18분 뒤에 두 번째 비행기가 남쪽 타워를 파고드는 순간이었습니다. 우리 모두 보았던 순간입니다. 우리뿐만 아니라 거의 전 인류가 생생한 영상 이미지로 이 순간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냄새로도 911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고통의 기억 가운데 사람에게 가장 오래 남는 기억은 냄새의 기억이라고 합니다. 긴급구호 활동가 한비야 씨가 스리랑카 쓰나미 피해의 현장을 다녀와서 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발밑 물속에 물컹물컹 밟히던 그 시신에 대한 감각은 어찌어찌 잊을 수 있는데, 냄새의 기억은 가장 잊기 어렵다고 합니다. 한국에 돌아와서 쓰레기차만 옆으로 지나가도 기절했다고 합니다.
맨해튼에서 911로 모든 것이 무너진 그 '그라운드 제로'(Ground Zero, 폭심지)에서 겨우 1.5킬로미터 떨어져 있던 저의 신학대학원 기숙사 쪽으로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저는 그 참혹한 냄새를 맡으며 2년 동안 박사학위 논문을 써야 했습니다. 그 냄새를 저는 '지옥의 냄새'(scent of hell)라 불렀습니다. 그 냄새는 인간이 만든 모든 물질과 그리고 - 이 아침에 말씀드리기가 참 죄송하지만 - 인육(人肉)이 함께 타서 뒤섞인 냄새입니다.
911 이후 저는 종종 그라운드 제로를 찾아갔습니다. 희생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싶어서 찾아갔습니다. 하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습니다. 눈이 따가워 서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매캐하고 비릿한 연기에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거기서 저는 참 많이 울었습니다. 그렇게 저에게 '21세기'는 시작됐습니다. 저에게 21세기는 2001년 9월 11일 아침의 전쟁으로 시작됐습니다.
911 때 저는 사랑하는 학생 하나를 잃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앤드류 킴(Andrew Kim)입니다. 애칭으로 '앤디'라 불렀습니다. 유학 시절 저는 맨해튼의 뉴욕한인교회 전도사 생활을 했습니다. 이 교회는 3.1운동 직후 도산 안창호 선생이 미국 동부에 세운 최초의 한인교회입니다. 유학 시절의 김활란 선생님도 이 교회를 다니셨습니다. 이 교회에는 지금도 안익태 선생님이 애국가를 지으실 때 사용한 피아노가 보존되어 있습니다. 유학 생활이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저는 이 피아노를 치며 외로움을 달랬던 기억이 납니다.
앤디는 이 교회를 다니던 신실한 한 가정의 사랑스러운 둘째 아들이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민 1세대로서 새벽청과시장과 생선시장 그리고 세탁소 등 안 해본 일이 없는 분들이었습니다. 그 아버지가 어느 날 저에게 자기 손을 보여주면서 말씀하시더군요, "전도사님, 손가락에도 습진이 생긴다는 걸 아십니까?" 어찌나 하루 종일 생선 시장에서 손을 물에 담그고 일했던지 습진에 걸린 손을 저에게 보여주었습니다.
이렇게 고생고생해서 키운 자식은 고맙게도 공부를 잘해주어 명문 컬럼비아대학을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나 한 번쯤은 일해보고 싶다던 그 세계무역센터 북쪽 타워 102층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911 그날 그 시간에 앤디는 그 건물 안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모는 끝내 아들의 시신을 찾지 못했습니다.
앤디의 장례 예배를 드리던 날, 저는 그의 친형이 나와 유족을 대신해서 했던 인사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형은 처음 한동안 끓어오르는 복수심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중동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은 다 죽이고 싶은 충동에 치를 떨었다고 했습니다. 그들이 기르는 턱수염까지 가증스러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쟁에 반대한다고 말했습니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보복으로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려 하는데 자신은 그 전쟁을 반대한다고 말했습니다.
누구보다 그 전쟁에 찬성해야 할 사람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와 모두 의아해했습니다. 하지만 앤디의 형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보니 이렇게 가슴이 아픈데, 만약 또 어디서 전쟁이 나면 또 다른 사람들이 지금 나처럼 이렇게 아프지 않겠습니까. 그 고통을 알기에 저는 전쟁을 반대합니다."
사실 전쟁이 일어나면 희생자의 3분의 2는 아무 죄 없는 여성과 어린이과 노인들입니다. 2015년 노벨문학상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가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에서 이를 잘 그렸습니다. 자기처럼 아픈 사람이 더는 없기를 바라기에 전쟁을 반대한다는 말 앞에 장내는 더욱 숙연해졌습니다. 깊은 감동이 밀려왔습니다. 그때 저는 알았습니다. 그때 저는 앤디의 형과 같은 사람이 바로 예수께서 복이 있다고 칭찬하신 '평화를 만드는 사람'(peacemaker)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실 때 하루는 나지막한 언덕에 올라가 이렇게 가르치셨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마태복음 5:9, 새번역) 예수님은 이 산 위에서 모두 여덟 가지의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긍휼히 여기는 자, 마음이 깨끗한 자, 평화를 만드는 자, 그리고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는 자가 받는 복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 여덟 가지 복 가운데 일곱 번째의 복, 곧 평화를 만드는 자들에게 선포하신 복이 가장 좋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보다 더 좋은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오늘의 복음서 본문은 이제까지 세상이 듣지도, 알지도 못한 새로운 가르침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앙갚음하지 마라, 공동번역)...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복음 5:38-39a, 43-44) 단호하고 권위 있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라고]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예수님의 화법에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적인 권위와 힘이 느껴집니다. 저도 이렇게 무게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유대인들의 문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유대 문화는 '수치와 명예'(shame and honor)를 기반으로 하는 문화였습니다. 이런 문화에서는 내가 받은 수치와 모욕을 반드시 되돌려주어야 합니다. 정확한 "give-and-take"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일 상대에게 맞고도 대항하지 못하고, 만일 수치를 당하고도 복수하지 못하면 그는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만일 내가 도저히 힘으로 감당할 수 없다면 시편 109편을 낭송해서라도 수치와 모욕을 주는 사람에게 앙갚음해야 했습니다. 시편 109편은 하나님께 '재앙을 비는 시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런 말들이 성서에 있어도 되나 싶은 정도입니다.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1-5절) 이렇게 시작하는 시편 109편은 이제부터 저주의 말을 퍼붓습니다.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을 받을 때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6-10절) 아직 시작도 안 했습니다. 저주의 기도가 이어집니다.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내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11-15절) 결국 어머니까지 건드렸습니다... 계속할까요? 아니요, 그만하겠습니다. 혹 치 떨리는 복수심으로 잠을 못 이루시는 분이 있다면 시편 109편을 펼쳐 크게 소리 내어 읽으시길 권합니다. 속이 다 시원해서 잠이 잘 올 것입니다. 아마도 하나님께서 이런 험한 말들을 거룩한 책에 남겨 두신 이유는 억울하고 분통한 사람들을 위로하시기 위함이 아니었겠는가 생각합니다.
이런 유대 문화의 한복판에서 예수님이 단호하게 말씀하신 겁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앙갚음하지 마라)... 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마태 5:38-39a, 43-44) 그런데 한 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왜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합니까? 왜 우리가 나를 박해하는 자에게 앙갚음하지 말고 그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까? 무슨 근거로 예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의 대답이 또 허를 찌릅니다.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의 아버지의 [자녀가]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너희가 너희 형제[자매]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45-48)
사실 이 말씀은 앞서 하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거나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는 말씀들보다 더 놀랍고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지금 '악인과 선인',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그리고 '형제자매와 이방인'과 같은 구분을 부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악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해를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us)만이 아니라 '저들'(them), 곧 우리가 죄인이라고 배척하는 세리나 이방인들도 하나님께서는 차별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말씀을 하시는 걸까요?
예수님 당시 유대 사회를 지배한 이데올로기는 '거룩'이었습니다. 거룩이 무엇입니까? 거룩의 기본 뜻은 '자르다', '구분하다', 혹은 '분리하다'입니다. 바벨론 포로기 이후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은 바로 이방 세계와의 분리이고 구분입니다. 그것이 그들에게 곧 거룩입니다. 거룩은 원래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겁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레위기 19:1-2) 그런데 이 거룩은 예수님 시대에 이르러 대제사장들과 헤롯 가문의 사람들이 백성을 더 악랄하게 수탈할 때 무서운 통치 이데올로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스스로 거룩하다고 말하는 소위 '의인'들이 날카로운 이분법 논리로 수많은 사람들 '죄인'으로 낙인찍어 구분하고, 분리하고, 사회에서 잘라냈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이 가난한 자, 병든 자, 그리고 여성과 이방인들이었습니다. 그런 '거룩의 정치'(politics of holiness)는 분열에 분열을 낳고, 갈등에 갈등을 더하여 세상을 혐오와 정죄와 폭력이 난무하는 무서운 사회로 만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히 여기에 메스를 대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인과 선인'에게 똑같이 해를 비추시며,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똑같이 비를 내려주시는 분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48)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의 전통적 가르침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하심과 같이 너희도 거룩하라'(레위기 19:2)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너희 하나님이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온전'이 무엇입니까? 온전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타밈'은 '구분이 없음' 혹은 '분리가 없음'입니다. 거룩의 기본 뜻이 '자르다', '구분하다', 혹은 '분리하다'임을 생각하면 예수님은 지금 이데올로기로 변질되어 폭력을 낳는 거룩의 정치에 메스를 대고 계심이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명의(名醫)이십니다. 환부(患部)에 정확히 칼을 대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끊임없이 전쟁과 폭력으로 치닫는 이 세계의 깊은 문제점을 아셨습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언제 끝나나 하고 있었는데, 온 세계에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가자(Gaza) 지구는 전쟁이 아니라 인종청소와 학살 상황입니다.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잠잠해지나 싶더니 이스라엘-이란 전쟁이 한 치 앞을 모를 상황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혐오와 분리와 폭력의 파시즘이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습니다. 분단된 남과 북은 80년이 반목과 증오의 역사를 살고 있습니다. 75년 전 그 처참한 동족상잔(同族相殘) 전쟁의 상흔(trauma)은 아직도 치유되지 않았습니다. 6.25 전쟁으로 군인 70만 명, 민간인 250만 명, 도합 약 300만 명의 소중한 인명이 살상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언제 다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휴전' 상태로 70년 이상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안으로도 분열과 분리가 끊이지 않았습니다. 언제부턴가 한국 사회는 '곁은 없고 편만 남은 세상'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 사회는 각자도생(各自圖生)의 사회가 되면서 경쟁이 극심해지고, 혐오와 적대의 언어가 늘고, 공감과 소통을 능력은 현저히 저하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곁에서 함께 웃어주고 울어줄 사람, 곁에서 함께 걷고 보듬어 줄 사람이 없는 세상, 즉 '곁이 없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대신 '네 편 내 편' 편만 남은 세상이 되었습니다. 오래전 이스라엘을 향한 예레미야의 탄식이 오늘 우리 한국 사회를 향한 탄식처럼 들립니다. "내 백성의 혀는 독이 묻는 화살이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거짓말뿐이다. 입으로는 서로 평화를 이야기하지만, 마음속으로는 서로 해칠 생각을 품고 있다."(예레미야 9:8, 새번역)
이렇게 "평화는 없고, 폭력뿐"(예레미야 30:5)인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습니다. 그분은 "평화의 왕"(이사야 9:6, 새번역)으로 오셨습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의 평화"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신]"(에베소서 2:14-16, 새번역) 분입니다.
그렇습니다. 곁은 없고 편만 남은 이 세상에 주님은 '우리의 평화'로 오셨습니다. 버림받은 사람들, 정죄 받은 사람들, 깊은 상처와 아픔을 가진 사람들, 생계를 걱정하며 한숨짓는 사람들, 도무지 내일을 꿈꾸기 어려워하는 젊은이들, 역사의 진실 앞에서 여전히 사과를 받지 못한 피해자들, 그리고 배제와 폭력과 전쟁의 공포에 떠는 사람들, 그 모든 사람의 '곁으로' 오셔서 그들의 참 평화가 되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그리스도 안에서 에스겔 선지자의 예언대로 두 막대기를 합하여 서로 하나가 되게 하실 것입니다.(에스겔 27:15-17)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태 5:48) 주님이 말씀하신 '온전'(穩全) 혹은 '완전'(完全)은 히브리어에 '나누어지지 않게'(undivided)라는 뜻이 있습니다. 나뉘지 않고 본바탕대로 고스란히 있는 게 '온전'입니다. 그래서 모자람이나 흠이 없는 게 '완전'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자르고 가르고 분리하지 마십시오. 잘린 것은 다시 붙이고, 갈라진 것을 다시 잇고, 분열된 것은 서로 합하십시오. 둘이 온전히 하나가 되게 하십시오. 그것이 평화를 만드는 길입니다. 그것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는 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 곧 '온전한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되십시오. 앤디의 형처럼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평화의 사도가 되십시오. 전쟁과 폭력이 끊이지 않는 이 세상에서 그렇게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님은 말씀하실 겁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복이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라고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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