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교와 불교에도 도덕 이상의 신앙이 있다”
“믿기만 잘하면 구원 받는다는 생각은 심각한 편견”
▲이장식 한신대 명예교수(본지 회장). ⓒ베리타스 dB |
기독교인들이 흔히 말하기를 기독교는 소위 도덕 종교가 아니다, 라고 한다. 그 말은 도덕을 강조하는 유교와 불교와는 달리 도덕 이상의 종교라는 말이겠다. 그러나 이 말에는 어폐가 있다. 불교는 석가를 믿고 극락세계로 간다고 믿고 있고 유교는 중국 상고시대부터 하늘 또는 천신을 믿고 그 하늘을 두려워하는 신앙이 오늘날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신앙 이상이었다. 즉 유교와 불교에도 도덕 이상의 신앙이 있고, 그 신앙과 병행하는 도덕적 계율과 도덕적 교훈이 있었다.
유교의 도덕적 계율에는 삼강오륜 밖에도 많은 성현들의 윤리도덕의 계율이 있고 그 교훈들이 엄격하고 보편적인 것이 되었었다. 불교에도 팔계라는 고전적 도덕적 계율이 있고 그리고 108원이라는 도덕적 교훈은 참회할 것과 다짐하고 서원해야 할 도덕적 실천항목들인데 이러한 도덕적 교훈들은 기독교가 가르치는 십계와 신약성경에서 가르치는 도덕적 행위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 기독교는 모세의 10계명 외에 예수님의 산상설교에서 계시된 행위들과 사도 바울의 사랑의 행위 16가지를 가지고 있다.
기독교와 도덕적 계율은 그 종류에 있어서 유교와 불교보다 못하므로 기독교는 소위 도덕적 종교가 아니라고 자위적으로 말한지 모르나 문제는 어느 종교의 신도들이 더 도덕적인 행위와 생활을 실천하느냐일 것이다. 그리고 신도들이 도덕적인 생활을 선도하거나 강권하는 방법으로 어떤 방법이 더 효과적이냐가 문제일 것이다.
기독교와 유교와 불교도 인간이 생래 가지고 있는 양심의 이성의 법이니 또는 자연도덕률이니 하는 사상을 알고 또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 양심과 이성의 판단이나 자연도덕심의 판단이 주관적이어서 사람이나 민족이나 지방에 따라 또는 시대에 따라 조금씩 다를 수 있고 또 이념이나 철학에 따라 다를 수 있으므로 유교와 불교가 되도록 많은 도덕적 계율과 교훈을 만들어서 신도들에게 가르치게 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즉 이러한 종교적 도덕계율이 없으면 양심의 법이니 이성의 판단이란 것이 있으나마나 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재래 종래 종교들은 지옥과 천당이 있다는 것과 지옥의 형벌과 천당의 복락을 가르쳤는데 그것이 있고 없고는 둘째 문제이고 지옥과 천당의 교리 없이는 종교들이 만들어 권고하는 도덕적 계율과 교훈도 효과가 없을 것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즉 사람들의 양심이나 이성의 도덕적 판단을 하기 전에, 또는 할 줄을 몰라도 지옥의 형벌이 무섭다는 생각으로 악을 버리고 선을 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기독교의 한국선교 초기에는 설교자들이 재래의 지옥사상을 이용하여 예수를 믿고 천당에 가자고 외쳤다. 성경에도 지옥이 있다고 가르친다. 물론 재래의 지옥사상과 성경의 지옥사상이 다소 다르기는 하지만 아무튼 한국의 기독교인들도 지옥의 형벌을 무서워했었다. 그러나 해방 이후 특히 교회성장을 목표로 하는 부흥회가 성세를 이루기 시작한 시절부터 지옥의 공포보다는 천국의 축복과 교회의 성장과 번영과 더불어 신도들의 현세적 축복과 번영이 삼박자 설교가 되어 전국 교계를 풍미하게 된 것이다. 죄와 부도덕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보다 교회성장을 통한 하나님의 축복이 강조되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보다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사모하는 마음이 더 커졌다. 이 때 부흥사들이나 일반 목회설교자들이 다 지옥의 설교는 보류해두었고 동시에 신도들의 심성(心性)과 도덕적 행위에 대한 설교도 소홀히 했다. 그리하여 설교자들은 구약을 설교본문으로 하는 설교를 많이 하고 구약의 족장들과 그들의 민족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길을 설교했고 따라서 예수의 이름이나 십자가와 성령의 언급이 전연 없는 설교를 많이 했다.
이처럼 이 시기의 한국개신교 부흥설교가들이나 일반 목회자들이 구약의 예언자들과 신약의 예언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설교를 회피한 것은 이 시기의 한국의 현대화 또는 계몽주의 시대의 풍조와도 일치된 것이었다. 내세적이기보다는 현세적이고 종교보다는 과학정신이 만연되어 간 시기였으므로 한국 개신교계는 한국의 경제성장과 현대화에 보조를 맞추어 갔던 것이다. 그리하여 세속화 한 교회의 설교자들과 목회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부패한 평신도들도 다 한 배에 타고 유람한 것이다.
천주교는 여전히 연옥의 교리를 신도들에게 가르쳐서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 방도를 가르친다. 그런데 프로테스탄트 개혁자들은 지옥은 부인하지 않으면서 연옥교리를 없앴고 존 칼빈의 교훈대로 신자는 죽으면 바로 그 영혼이 하늘나라로 간다고 믿게 되었다.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는 불경한 자들이 지옥에서 받을 고통을 강조하였다. 가톨릭교회가 연옥의 교리와 함께 신자들의 행위를 강조하였고 경건한 행위는 구원을 받는 데 도움이 된다고도 가르쳤다. 그런데 종교개혁자들은 행위의 공로사상을 일축하고 믿음으로만 의인의 인정을 받고 은혜로 거저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쳤다.
루터가 바울의 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다는 말을 주석하면서 본문에 없는 “만으로” 라는 말을 붙여서 “오직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고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친 것이 잘못되어 “오직 믿음만이”니 “오직 은혜만이”니 또는 “오직 성서만으로” 라는 말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하여 루터의 신학에는 윤리가 없다고까지 평하게 된 것이다. 20년 후의 칼빈은 교회신도들에게 엄격한 행위를 지나치게 독려해서 폭군이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서양에서 18세기 중반에 합리주의 신학이 인간의 자연도덕성을 강조하였고 그 여파로 기독교의 도덕적 계율이 신앙의 교리와 분리되어 일치 또는 병행하는 것이 못되었다. 동시에 천당과 지옥에 대한 신앙적 교리가 무력하게 되었다. 18세기 중엽에서 19세기 중엽에 영국에서는 지옥의 영원한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 사람들의 마음에 없어지자 비도덕적 행위가 사회에 만연되었고 여기에 대한 강력한 비판이 주공하여 영국정부는 사형을 받을 수 있는 범죄의 죄목을 백배로 늘렸다고 한다.
오늘 우리는 지옥의 공포를 강조해야 한다든지 그것이 무서워서 도덕적 행위를 권해야 될 것이 아니지만 믿기만 잘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생각은 심각한 편견이 있는 것을 지적해야 한다. 개인의 양심의 자유니 판단이니 또는 이성의 판단이니 하는 원리만 믿고 있을 수 없다. 바울이 은혜를 강조했지만 그 은혜는 ‘값진’ 것이어서 아무나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했고, 믿음도 사랑으로 역사하는 것, 즉 행위와 일치하는 것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갈5:6). 예수님도 천국은 사람들이 행위와 심판을 받아야 들어갈 수 있음을 가르치셨다. 한국 개신교는 도덕적 반성과 갱신이 시급한 상황이다. 특히 교계의 조직체들과 단체들을 이끄는 사람들이 노정하는 자신들의 도덕성이나 세속성은 한국 개신교의 수치거리인데 일부 교계 언론은 이 수치거리들을 확산시키는 데 급급한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