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를 끌고 산을 넘는다
그는 배를 끌고 산을 넘는다 ㅣ 홍성욱 김한나 ㅣ 신앙과 지성사 ㅣ 326쪽 ㅣ 1만 2천원
신학공부를 마치고 남들보다 한참 늦게 사역지를 배정받았다. 동기들이 이런저런 교회나 기관에 부임할 때 그저 부러움의 눈길로 쳐다만보다가 드디어 첫 사역지를 가게 되었을 때의 그 설렘이란. 그렇게 부푼 꿈을 안고 첫 성직자의 옷을 입었던 곳은 경남의 한 장애인 시설 내에 있는 교회였다.
선천적 장애자, 부랑인, 알콜중독자, 마약중독자…. 갖가지 이유로 버려져 거리에서 방황하던 이들이 모인 곳에서, 그는 평범한 정상인으로 살면서 단 한번도 생각해보지도 못했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들을 숱하게 겪었다.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 죽음도 외로운 그곳에서 시체를 직접 닦아 장례식까지 치루는 일도 목회사역의 일부가 되었고, 춤이라면 곤장을 친다해도 안추던 그가 한달에 한번 있는 합동생일잔치에서 여자원생들이 현란하게 추는 블루스 파트너가 되어 온몸이 몰매를 맞은 것처럼 온 근육이 지칠때까지 파트너 역할을 해주는 것도 ‘특수사역’이라 부르게 됐다.
이곳에서 사역한지 6년차가 되던 해, 미국의 한 초교파 한인교회가 그에게 담임목사로 와달라는 제안을 했다. 젊은 날 광활한 미국을 보며 꼭 한번 대륙횡단을 해보고 싶은 꿈이 있었는데, 아, 이게 웬 떡이냐, 복지원에서 끽소리 없이 고생했더니 하나님이 이런 기회를 주시는구나 싶었다. 얼씨구 절씨구 할렐루야가 절로 나왔다.
기대에 부풀어 짐을 싸고 주변정리를 하고 있던 차에 친구들이 미국으로 떠나면 자주 못본다고 필리핀으로 이별여행을 가자고 제안해왔다. 패키지 여행일정을 따라 필리핀 겉핥기를 하는 수준이었는데, 그런데 그곳에 복병이 있었다. 스모마운틴이라는 곳에 갔을 때, 아무리 휴식차 짧은 관광을 왔다지만 그래도 목사들인데, 세계적 악명을 가진 빈민 거주지를 그래도 보고 가야하지 않느냐 하는, 알 수 없는 양심의 소리였다. 잠시 스쳐만 가려고 했는데, 얼마나 비참한 곳인지를 보고 내가 살고 사역하는 곳이 얼마나 감사하고 고마운 곳인지 깨닫고 더 열심히 사역해야겠다는 마음을 더욱 다잡아야겠다고 생각했을 뿐인데, 그런데 한 소녀의 발목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쓰레기 더미 속에 동굴을 파서 낡은 비닐로 천장을 친 움막집에서 한 소녀가 파리가 붙은 구운 감자를 그에게 내밀었는데, 그 소녀의 발목이 모기에 물린 상처가 썩어 문드러져 있었다. 물파스 한 통, 항생제 주사 한 대가 없어 소녀의 인생이 발목잡혀 있는 현장에서 목회관이 흔들렸다.
하나님 앞에 하소연 했다. “하나님, 이러지 마세요. 저 복지원에서 고생할 만큼 했지 않습니까. 이제 폼 좀 나게 살고 싶습니다. 아무리 그러셔도 저 모른척 할겁니다. 그리고 저 선교사는 생각도 해본 적 없거든요.”
이렇게 필리핀 선교를 시작한 홍성욱 목사, 김한나 사모가 13년간의 필리핀 선교현장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했다. 홍 목사 부부는 1998년 필리핀 원주민 교회 깜덴교회로 부임하여 빈민층을 대상으로 선교하고 있다. 빈민촌 선교에 대해 조금이라도 들어본 사람은 알 것이다. 한국인의 근성, 힘든 일이 있을 때 어떻게든 이겨내려는 한국 보통 사람의 근성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원주민 빈민들의 ‘내가 저지른 현실에 대해 나 몰라라’ 하는 삶의 태도는 전도나 성경공부반은 고사하고 경제적 문제조차도 생각이 안날 정도로 처음 넘어야 하는 크디 큰 산이다.
그래서 13년의 사역을 쓴 책 제목이 「배를 끌고 산을 넘는다」(신앙과 지성사)이다. 젖먹이 어린애는 먹을 것이 없어 아내가 커피를 묽게 타서 먹이고, 뛰어다닐만한 큰애는 아픈데도 약이 없어 골골거리는데 아버지·남편이라는 사람은 한가롭게 코골고 하루종일 누워 자는 것이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 마을이다. 답답해서 교회에 불러다가 없는 일을 만들어서 일을 시키고 삯을 주고 밥을 먹여주면 간식값은 왜 안주냐고 따져온다. 없는 살림 집에 노래방 기계 앞에서 밤낮 노래 부르며 흥에 겨워있고,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면서 빚이라도 내서 파티는 하는, 합동결혼을 시켜주려고 했더니 피로연을 해줄거냐 말거냐 오히려 당당하게 요구해오는 그런 현장에서의 부딪힘에서부터 홍 목사의 필리핀 사역 이야기는 시작된다.
석달 주일을, 벽을 보고 의자를 보고 설교하고 있을 때, 현지인들과의 처음 소통의 문을 열게 된 계기는 장례식이었다. 한 아이가 죽었는데 돈이 없어 장례를 못 치르고 있는데 한국에서 온 얼굴 노란 사람이 그래도 목사라고 하니 아쉬운대로 찾아왔던 것인데, 홍 목사는 6년간이나 복지원에서 수많은 죽음을 거두었고 스스로 ‘시체 닦기 은사’라는 표현을 쓸만큼 장례 치르는 것에 있어서 현지인들의 신뢰를 사고도 남음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홍 목사의 부부 사역이 지금은 교회가 세워졌고 병원도 세워졌고 현지인들을 교육하는 학교도 세워진, 성인 출석교인 500명 규모인 ‘깜덴 나눔 공동체’가 되었다. 이들의 눈물겨운 그러나 30배 60배 100배의 열매가 있는 사역 이야기는, 이제 교회가 너무 많아 더 이상 일할 곳이 없다는 오늘날의 젊은 예비 목회자들에게 새로운 도전을 던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