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성중학교는 학교가 있는 곳의 지명을 따서 일명 ‘소영자중학교’라고도 불렸다. 당시 ‘독립군학교’로 불리면서 명동촌의 명동중학교 못지 않은 명성을 지니고 있었다.
광성중학교에 간 송창근은 그의 전 생애에 매우 강력하고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을 만났다. 성재 이동휘 선생이었다. 광성중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는 일에 이동휘가 적극 관여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이동휘와 송창근의 만남은 그 정서상에서 보았을 때 흡사 물과 물고기가 만난 것 같았을 것이다. 지닌 품성으로 보아, 두 사람은 서로 매우 비슷했다. 세상에 익히 전해진 대로 이동휘는 ‘감격의 인물’이었다. 연설에 매우 능했고, 하고자 하는 일에 자신을 던져 불사르는 열정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런데 송창근 역시 본질적으로 ‘감격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이동휘는 만나는 즉시 소년 송창근을 매우 아끼고 총애했다. 그를 따로 불러 사동처럼 심부름을 시키면서 가까이 데리고 다녔다고 한다. 송창근도 마음을 다해서 이동휘를 모셨고 깊이 따랐다. 그리하여 송창근은 어린 나이에 국가적 대인물의 훈도를 경험한 것이다.
이동휘는 독립운동가이자 교육가로서 “속이는 자에게는 알고도 속이워야 한다. 만일 그 속임을 당하지 아니한다면 똑 같은 적은 사람이다”라는 소신으로 평생을 살았다. 그는 열정의 인물이었다. 웃을 곳에 웃지 않고 울 곳에 울지 않는 사람을 볼 때면 “냉혈의 동물이다. 목우와 등신다”라고 크게 나무랐다. 그는 대중 앞에서 연설할 때 피눈물을 휘뿌리고 목 놓아 통곡하는 때가 많았다.
이동휘는 ‘기독교’에 희망을 걸고 살았다. “민족이 갱생하려면 사람이 먼저 변화해야 한다”는 절체절명의 명제 안에 그가 기독교에 걸었던 희망의 본질이 있었을 터였다. 기독교의 가르침을 따라서 사람들이 변화할 때 우리 민족이 나아갈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래서 어린 송창근에게 “너는 본국에 돌아가서 목사가 되라”고 명한 것이다.
이동휘의 가르침은 송창근의 뼛속 깊이 아로새겨졌고, 그의 나머지 생애를 관통하는 지침이 되었다. 이동휘의 그 놀라운 재능과 뛰어난 능력, 충정을 가지고도 해결할 수 없었던 것, ‘사람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지닌 기독교적 대변혁에 대한 열망이 송창근을 사로 잡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불과 5년 뒤에 송창근은 신학을 공부하여 목사가 될 길을 밟았다. 당시 3.1운동이 일어나서 상해엔 임시정부가 설립됐고, 이동휘가 상해 임시정부의 국무총리가 되었지만 송창근은 상해로 가지 않았다.
그러나 이동휘의 삶과 연결된 마음의 끈은 오래도록 송창근의 마음 속에 생생하게 살아남아 있었다. 그는 뒷날 일본 동양대학에 유학했을 때 출신학교를 적는 난에 ‘광성중학교’라고 적어 넣었다.
송창근은 북간도에서 집으로 돌아온 뒤, 한동안 부모님의 농사일을 거들었다. 신학을 공부하러 가려 해도 서울에 갈 돈이 없었다. 그는 길게 간 밭이랑을 따라가면서 두 알 세 알 콩을 심고 소를 먹이는 등 하릴없는 농사꾼의 나날을 보냈다. 그의 첫딸 한나가 1916년생인 것을 보아, 그가 고향에 돌아온 때는 적어도 1915년임을 알 수 있다.
가출하여 외지에 나갔을 때 게속 미션스쿨을 다녔던 사람답게 그는 고향에 돌아온 뒤에도 교회생활을 열심히 했다. 그래서 19세의 어린 나이에 이미 그의 고향 교회에서의 신급이 ‘영수’였다. ‘영수’라면 장로와 집사 중간에 있는 직책으로서 그 당시의 교회 풍속에서 보자면 매우 높은 직책에 속했다. 그냥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역시 농사꾼으로서의 소박한 삶을 살아내기에는 꿈과 이상이 너무도 컸다. 그는 어느 날 홀로 된 셋째 숙모가 소를 사려고 모아 두었던 돈을 훔쳐서 서울로 달아났다. 그리하여 이동휘 선생이 “너는 본국에 돌아가서 목사가 되라”고 명했던 가르침을 지키는 첫걸음 떼었다. 실행 방식이 과히 은혜롭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나 서울에 가서 신학 공부를 하려는 데 차비가 없었으니 그런 비상수단을 쓴 것이다.
당시 조선은 총독 사내정의의 무단통치 하에 있었다. 정치, 사회, 경제, 교육 모든 면에서 숨이 꽉 막힐 듯 억눌려 있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종교계 그것도 기독교계만은 숨이 나가는 곳이었다. 서양 선교사들과 그들의 모국인 서양 열강의 국력이 일종의 방패막이가 되어준 까닭이다. 그래서 많은 젊은 인재들이 기독교 안으로 뛰어들었다.
송창근은 1916년에 서울에 온 뒤 피어선 성경학원에 다녔다. 피어선 성경학원은 1912년에 설립된 초교파적 성경학원이었다. 입학 당시 성경학원은 새 교사를 건축 중이었다. 송창근이 왜 피어선 성경학원에 들어갔는지는 알 수 없다. 배재학당이나 경신학교나 연희전문처럼 기독교 계통 학교들도 있었고, 신학교로는 협성신학교도 있었는데, 그는 피어선을 선택했다.
송창근은 피어선 성경학원에서 공부하는 한편,중앙기독청년회(YMCA)에 가입하고 기독교청년회관(YMCA 회관)에 드나들면서 여러 지도자들의 가르침을 받아다. YMCA 회관은 종로에 우뚝 서 있던 3층의 커다란 붉은 벽돌 건물이었다.
이때부터 1926년 일본 청산학원을 졸업할 때까지 만 ‘10년’이란 세월에 걸쳐서 YMCA는 송창근의 삶에서 떼려야 뗄 수 없는 인연을 가진 매우 소중한 신앙공동체이자 사회단체가 되었다. 그는 서울에서는 서울 YMCA에서 열심히 활약했고, 일본 유학 중에는 동경 YMCA에서 크게 활동했다. YMCA 활동을 위해서 자신을 던지고 헌신했다.
송창근이 처음 YMCA에 갔을 때 민족의 지도자이자 YMCA의 지도자였던 이상재 선생이 그를 상대로 장난을 쳤던 일화가 있다. 이상재 선생은 마침 바나나 송이를 갖고 있었다. 그는 새로 온 젊은 친구 송창근에게 바나나 한 가닥을 떼어준 뒤, 보란 듯이 자신도 한 가닥을 떼어서 입에 넣고 껍질째 깨물어 먹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바나나를 난생 처음 본 송창근도 그를 따라서 바나나를 껍질째 깨물었다. 그러나 이상재 선생이 대뜸 손벽을 치고 웃으면서 “저, 촌놈. 바나나 먹는 것 좀 봐라!”라고 놀리더라고 한다. 아마도 유쾌한 웃음판이 한바탕 벌어졌을 것이다. 집 떠난 외로운 젊은이의 마음을 훈훈하게 녹이고 따뜻하게 다독여주는 것은 그처럼 죄 없이 밝은 한바탕의 웃음판이었다.
당시 서울 YCA 회관이 집과 고향을 떠나서 서울에 새로운 둥지를 튼 젊은 송창근의 마음에 얼마나 위안이 되었을지 역력하게 알 수 있다. 국경지방의 젊은이가 홀로 서울에 올라와서 지낼 때 사방을 돌아봐야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백사지와 같은 고장에서 YMCA는 그에게 따뜻한 가정의 역할을 해주었다. YMCA에서 만나는 이들이 곧 그의 가족이요 보호자요 친구였다.
송창근은 이상재 선생과 같은 대인물이 자리 잡고 있는 종로 YMCA 회관을 드나들면서 그의 직접적인 훈도를 받았다. 송창근이 후일 유머를 즐기고 사람들을 대할 때 매우 포용력이 큰 우의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했던 것에는 이처럼 청소년 시절에 이상재 선생을 가까이에서 모시면서 직접 보고 들음을 통해 받은 감화가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서울 YMCA를 통해서 그와 같은 대인물을 가까이 대할 수 있었던 것은 젊은 시절의 송창근이 누렸던 커다란 인복 중의 하나였다.
* 자료제공: 경건과 신학연구소(소장 주재용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