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곤 한신대 명예교수. ⓒ베리타스 DB |
이러한 물음들을 함께 생각하면서, “믿는 자마다” 구원을 얻는다.(요한 3:15,16) 또는 “부르는 자마다” 구원을 받는다. (행 2:21; cf. 욜 2:32; 롬 10:12-13)라는 성서의 증언을 과연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여야 할 것인지를 규명해보는 일은 우리의 신앙을 바르게 정립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구원’[=‘義‘]에 이르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그리고 ‘오직 은총으로만!’(sola gratia) 열린다는 주장은 루터와 칼빈(깔벵)의, 이른 바, 피를 쏟고 살을 찢어내는 필사적인 종교개혁활동의 주요 기치(旗幟)였습니다. 즉 ‘천국열쇠’를 쥔 베드로(마 16:19)와 그의 권위를 계승한 ‘로마교황의 권위’를 통하여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여, ‘교회교리’(TULIP; 인간의 전적 타락/무조건적 선택/제한된 救贖/불가항력적 은혜/성도의 堅忍; 칼빈주의 5대 교리)를 의심 없이 받아들임을 통하여서도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며, 단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인 구원사건을 섭리하신 하나님의 은총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서만(!) 구원이 이루어질 뿐이라는 것이 종교개혁을 단행한 그 주요 출발점이라고들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종교개혁운동이 출발하게 된 그 성서적 근거는 가깝게는 로마서 1:17(cf. 롬 9:30; 갈 3:11; 히 10:38)에, 좀 멀리는 하박국 2:4, 그리고 아주 근원적으로는 창세기 15:6의 ‘성서증언’에 두고 있다는 것은 주지(周知)의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의미에 대한 바른 이해와 판단은 이러한 성서적 전거(典據)들에 대한 올바른 성서해석에 근거되어야 한다는 것은 하나의 ‘상식’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럼에도 인간으로 하여금 ‘의’(義)에 이르게 하고 또 ‘구원’(救援/復活을 통한 永生)에 이르게 한다는 그 ‘믿음’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이해는, 그러나,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서, 이미 신약 성서 자체 안에서도 신랄한 토론의 쟁점이 되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를 우리는 사도 바울의 ‘신앙론’(信仰論; 롬 1:17)과 사도 야고보의 ‘실천론’(實踐論; 약 2:26) 사이의 심도 있는 쟁의(爭議)에서 충분하게 접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사도 바울은 매우 격정적으로 말하기를 “어리석도다. 갈라디아의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 무릇 율법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합 2:4] 하였음이라.”(갈 3:1-3a,10a, 11)라고 말하면서 갈라디아 교인들을 힐책한 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사도 야고보 역시 더욱 격정적인 언어로 말하기를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오.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 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창 15:6]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사 41:8]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수 2:1-21; 6:22-25]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약 2:14, 17, 19-26)라고 반박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 우리가 주의하여야할 점은 이것입니다. 즉 우리의 과제란 여기 나타나는 바울과 야고보 사이에 서서 이분법적 흑백논리에 따라 두 견해 중 어느 한 견해를 선택하는 <택일(擇一)의 문제>에 천착(穿鑿)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 만일 그렇게 하면, 우리는 결코 정답을 얻을 수 없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성서는 여기서 결단코 이 두 견해 중 어느 하나를 택일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1)사도 바울의 경우, 비록 그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라고 역설(力說)은 하였으나, 곧 이어서 그는 또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롬 3:31)라고 말하였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라면, (2)사도 야고보의 경우에서도 또한 마찬가지였습니다. 즉, 사도 야고보 역시도 ‘믿음’의 폐기를 주장하는 ‘행동주의’를 말하고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 다만, ‘자기 자신을[=양심을] 속이는 열매 없는 믿음’!(약 1:22,26)을 주로 비판하고 있을 뿐임을 봅니다. 하나님의 실재는 귀신들(demons)이 더 잘 알고 두려워 떤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 귀신들이 그들의 그런 믿음과는 달리, 행위로는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동을 하므로 그들의 그 앎과 그 믿음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헛것’(vain/ barren)일 뿐이라는 것(약 1:26; 2:20)이 사도 야고보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정신’을 이어받았다는 ‘개신교’가 좀 더 진지한 성서해석학적인 각고정려(刻苦精勵)를 하지 않고 너무 성급하게 지나친 열정으로 ‘믿음으로만’과 ‘은총으로만’을 서둘러 교조화(敎條化)함으로서, 사도 야고보가 우려한대로(약 1:22,26; 2: 20), 스스로 자기 양심을 속이는 ‘신조신앙’에 매몰되기 시작하였던 그것이 문제를 더 크게 악화시켰다고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 만’과 ‘은총으로만’이라는 교조는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에 관한 구원의 복음을 ‘값싼 은혜’로 만들어서!! 우리로 하여금 절대 절명의 멸망에로 이끄는 ‘미로’(迷路)의 덫이 되도록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그리하여 ‘믿음으로만’과 ‘은총으로만’이라는 교조는 마침내 ‘복음’이 되지 아니하고! 오히려 교황의 면죄부 판매 흉내(!)를 내면서 개신교 전반을 부식(腐蝕)시키는 부패의 요람이 되고 만 것입니다. 드디어는 20세기의 대표적 순교자요 최고의 신학자로 존경 받는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 1906-1945)는 “값싼 은총은 교회의 절대 절명의 원수이다.” (“Cheap grace is the deadly enemy of our church”. In his controversial Nachfolge, 1937)라고 외치기에까지 이르렀던 것입니다.
우선, 우리 본문이 말하는 ‘믿음’론을 살펴보면,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창 15:6)이 될 때, 야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환상을 통하여’(창 15:1) 받은 바, 그 ‘칭의’(稱義/義認)의 ‘은총’이란 결코 ‘값싼 은총’은 아니었다는 것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즉 창 15:6의 문맥인 창 15:1-5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창 15:1-5가 말하는 바에 의하면, 창 15:6은 논의의 여지없이 한 실존적인 탄식,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라고 하는 아브라함의 탄식(Klage)이 ‘아브라함의 의인(義認) 신앙’의 실존적 배경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증언은 매우 중요한 증언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소명 받고 출향(出鄕)할 때의 아브라함에게 야훼 하나님께서 주신 바, 그 ‘아들 약속’(창 12:2)이란, 어디까지나, ‘불확정적 미래’에 관한 ‘신(神)의 약속’뿐임을 아브라함이 현실적으로 인식하고 그 ‘신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지닌 가슴 아픈 실존적 고뇌를 표출한 증언이기 때문입니다. 이른 바, ‘믿음’이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이 이르는 것”만은 아님(!)을 실토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많은 현대 성서주석가들이 창 15:1-5의 문맥을 자세히 살피면서 추적해 간 바에 의하면, 우리 본문 문맥의 ‘역사적 삶의 환경’ (Sitz im Leben)은 기원 전 8세기의 예언자 이사야가 “마음이 [마치] 숲이 바람에 흔들림 같이 흔들리고 있는”(사 7:2) 매우 믿음이 약한 유다 나라 아하스 왕에 대한 당시 유다 백성의 심각한 불신(사 7:1-9)과 동의평행(同義平行)을 이루고 있음을 확인하였던 것은 바로 이 사실을 웅변한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창 15:1 -6은 어디까지나 ‘불확정적 미래에 대한 신(神)의 약속(約束)’을 향한 고뇌에 찬 아브라함의 실존적 ‘신앙’ 현실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입니다. 결단코 그것은 <마음으로 믿고 입술로 시인만하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값싼 은총’의 ‘믿음’>을 말하고 있지 않음을 웅변적으로 증언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의 고통스러움 죽음과 그 죽음을 정복한 부활의 사건을 하나님의 구원사건으로 믿는 믿음의 그 ‘값비싼 은총’을 목하(目下)에 보여주는 증언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기독교가 성서를 통하여 말하는 그 ‘믿음’의 정체성(identity)이 무엇임은 이로서 분명히 드러다고 하겠습니다.
성서가 증언하는 ‘믿음’은 결단코 입과 마음으로 ‘시인’하는 일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행위의 공적주의만을 가리키는 것도 아니라 다만 그 둘 다의 조화로운 통합을 의미하는 것이 확실하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저 유명한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마 5-7장)의 결론 말씀(마 7:21-27) 속에는 이미 이 대답이 잘 적시(摘示)되어 있었음을 발견한다는 것은 하나의 놀라움이라고 하겠습니다. 산상수훈의 그 결론은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주’(主)님으로서 신앙고백을 하는 자라고 해서 모두 다 구원 받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못을 박으며 ‘믿음’과 ‘행위’의 불가분리적 관계를 통찰하기 시작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그 만큼 이 논제가 중요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분명, 구원의 길은 따로 있었습니다. 즉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그 뜻에 부합하게) ㉡행하는(실천하는) 자(※㉠+㉡!!)여야만 들어가리라. 라고 단호히 매듭짓고 있었습니다. 말하자면 이 시작 언어가 매듭지어진 후, 예수님의 말씀은 즉각 매우 강력한 언어로 (1)<아버지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행동주의>를 비판하여 말씀하시기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노미아=율법 파괴 행동을 하는 자들)>이라고 책망하시면서 ‘예언’ ‘귀신추방’ 그리고 ‘권능행위’ 등을 비록 주의 이름으로 행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최후 심판의 날에는 저들에게 <내게서 떠나가라>고 명하시겠다고 예수님께서 친히(ipsissima verba) 말씀하셨던 것입니다(행동주의 비판). 말하자면 아버지의 뜻에 대한 바른 이해가 없이는(하나님의 마음에 대한 ‘믿음’이 없이는) 비록 ‘주의 이름으로(!) 행하는’ 놀라운 종교행위들(예언/귀신추방/온갖 권능 행사)일지라도 모두 ‘불법’이 되고 또 최후의 심판 날에는 주님으로부터 추방의 명령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뿐만은 아니었습니다. 비록 아버지의 뜻을 헤아려 알았다고 하더라도(마음으로 믿음고백을 하였다고 하더라도) (2)실천의 행동이 따르지 않는다면 <모래 위에 지을 지은 어리석음>과 같아서 비바람이 날 때는 쉽게 그리고 심하게 무너지게 된다고 경고하셨던 것입니다(믿음으로만主義 비판). 그리고 이 말씀(산상수훈 전체)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을 성서기자는 ‘저들이 그 가르침의 권위에 놀랐다!’라고 부언하여 말하기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실로, <이론(theory)과 실제(praxis)/ 믿음과 행위> 사이의 관계를 이토록 선명하게 정확히 설명하고 정리한 곳을 성서 다른 곳에서는 찾기 어렵다 하겠습니다.
믿음의 조상(모범)이 된 아브라함의 ‘믿음’은 그러므로 ‘듣고 긍정만 하고 실천은 하지 않는,’ 이른 바 ‘값싼 은총’으로 얻는 그런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100세가 될 때까지도 약속의 아들을 얻지 못해 애태우며 그 약속의 성취를 기다린, 그러므로 차라리 다메섹에서 데려 온 이방인 종 ‘엘리에셀’(창 15:2)을 양자로 삼아 상속자로 하여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나님께 항변한 그런 <고뇌를 이겨낸! ‘믿음’>이었고 마침내 100세의 노경에 얻은 그 ‘약속의 아들’까지도 번제 제물로 신에게 내어줄 위기까지도 인내하고 이겨내는 그런 ‘고뇌에 찬 믿음’이었습니다. 말하자면 십자가의 대속적인 죽음과 그리고 그 죽음의 쏘는 것(독침, 고전 15:55,56)을 제거하고 극복한 부활의 승리에 대한 ‘값비싼 은총’에 기초한 믿음만이 참 믿음인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100세가 되도록 까지 무자(無子)와 불임(不姙)이 계속되는! 저 불확정의 미래!, 즉 저 불확정의 ‘신의 약속’을 믿는, 이른 바, 죽음의 고통까지도 헤쳐 나오는, 즉 은총의 값비쌈을 감내하며, 더딜지라도 기다려서 얻는(합 2:3) 그 ‘믿음’(합 2:4)이 성서가 말하는 진정한 의미의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만 하면 구원에 이른다는 그런 ‘값싼 은총의 믿음’이란 중세 로마 교황의 면죄부 판매와 같은 그런 사악한 ‘불법’(마 7:23)행위를 ‘참 믿음’이라고 믿는 것과 마찬가지의 어리석음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귀 있는 자는 지상교회들을 향하여 말씀하시는 이 성서말씀에 귀 기울여서 중세 로마교황이 면죄부 판매 하듯 그렇게 ‘믿음으로만’과 ‘은총으로만’의 복음을 값싸게 팔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